설교 일시: 2025년 3월 9일 사순절 첫 번째 주일
설교 장소: 분당성화감리교회

본문: 누가복음 4:1-13
(눅 4:1-13, 개정)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인사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종종 ‘광야 같은 세상살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거친 빈 들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광야 같다’는 표현은 기댈 곳도, 쉴 곳도 없는 삶의 고단함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살이는 바쁘고, 신경 써야 할 일도 많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고, 긴장을 늦출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오면, 마치 거센 바람이 부는 곳에서 바위 뒤에 숨어 잠시 숨을 돌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여기서는 잠시 가만히 쉬면서, 긴장을 풀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에 오면 더 바쁘다’ 며 불만을 터뜨리는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저도 교회에 오면 바쁩니다. 하지만 그 바쁨의 성격이 다릅니다. 세상의 바쁨은 우리를 지치게 하지만, 교회의 바쁨은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바쁘게 움직일수록 방전되지만, 교회에서는 바쁘더라도 충전이 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충분한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설명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요단강에서 돌아오셨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고 돌아오셨고 성령에게 이끌렸다고 나와 있습니다. 성령에 이끌렸으면 그냥 좋았을 것 같은데 성령님만 계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탄도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성령에 의해 이끌렸고 또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을 받은 사건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아주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금식하신 이후에 시험을 받았다고 나와 있는데 누가복음에는 사십 일 동안 시험을 받은 것처럼 서술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고 싶었다면 금식하는 사십 일 동안 기다려주고 있을 필요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금식하는 동안에도 여러 차례 시험을 받으셨을 가능성이 높으며, 오늘 본문에 기록된 시험들은 금식이 끝나거나 끝나갈 무렵에 있었던 가장 강력한 시험이었을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세 가지 시험을 했습니다. 첫 번째 시험과 세 번째 시험은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두 시험 모두, 앞에 조건이 붙습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그렇다면 이 돌을 떡이 되게 하라, 그렇다면 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 시험은,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십 일을 굶주린 생존 욕구를 건드리는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심하게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귀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저 같았으면 그냥 “싫은데.”라고 했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거절을 하시니까 품위가 있고 권위가 있어 보입니다. 인용하신 말씀은 신명기 8장 3절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앞부분만 서술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라고만 대답하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는 앞부분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번째 시험을 위해서 사탄은 예수님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산 아래로 드넓은 광경이 펼쳐졌겠죠. 그리고 마귀가 예수님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모든 권위와 영광을 너한테 줄게. 이것은 나에게 넘어온 것이니까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어. 네가 나한테 절하면 이거 다 니꺼야.” 사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중 하나는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얻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굳이 어렵게 갈 필요 있나, 그냥 나에게 절 한 번 하면 이거 다 너 주고 나는 물러날게.”라고 제안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6장 13절을 인용하셨습니다. 권력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권력은 누군가 반드시 차지하게끔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누구보다도 권력을 차지하기에 합당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옳지 않다면 아무리 목적이 좋다고 하더라도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옳지 않은 수단에 대해서 거절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 시험을 위해서 사탄은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의 꼭대기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마귀의 전략이 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계속 성경 말씀으로 응답을 하자 마귀도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10]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시편 91:11-12을 정확하게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신명기 6:16로 응수하셨습니다. 그 구절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한 사건에 대한 경고입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어서 고생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하나님을 시험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면 지금 우리에게 물을 주십시오.”라고 시험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사탄에게 말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은 욕망을 건드리는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을 것이고 응당 그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탄의 모든 시험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떠났지만, 완전히 물러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마귀가 얼마 동안만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욕구만으로 살지 말라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탄의 첫 번째 시험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던 것처럼 부정적인 말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욕구만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떡은 빵으로 바꾸어도 되고 밥으로 바꾸어도 되는 단어입니다.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음식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는 생존을 위해서 음식을 먹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고플수록 그 욕구는 더 커집니다. 왜냐하면 그 욕구를 채우지 못할 때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40일을 굶은 예수님에게 음식에 대한 욕구가 얼마나 컸을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굶어서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예수님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음식이었습니다. 그것 없이는 생명을 잃을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마귀는 이런 식으로 유혹을 했던 것입니다.
“야, 너 인간이잖아. 배고프면 죽잖아. 40일을 굶었잖아. 지금 필요한 것은 뭐야? 밥이지. 그러면 이 돌을 밥으로 바꿔서 먹어. 먹고 살아. 인간이 그 이상 뭐 있니? 인간으로서 체통, 존엄성, 품위, 이런 게 무슨 소용이야. 죽게 생겼는데. 인간은 밥을 먹고 사는 존재 그뿐 아니니?”
이러한 사탄의 시험을 예수님은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아니,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 이상이거든.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야.”
달리 말하면 인간은 욕구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욕구 이상의 존재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욕구가 있습니다. 욕구는 반드시 필요한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영어로 바꾸면 needs입니다. 필요한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욕구가 없으면 사람이 죽습니다. 배가 고픈데 밥을 먹고자 하는 욕구가 없으면 큰일납니다. 목이 마른데 물을 마시고자 하는 욕구가 없으면 죽습니다. 날씨가 추운데 몸을 따듯하게 하려는 욕구가 없으면 몸이 얼어 버립니다.
욕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욕구로 인해서 사람은 나쁜 일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장발장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빵을 훔친 것처럼, 많은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부도덕한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을 표현하는 말로 “목구멍이 포도청이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즉, 먹고사는 문제는 그만큼 인간에게 절박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굶주린 상황에서도 “사람은 욕구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람이 욕구만으로 사는 존재라면 여호와의 말씀은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존과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밥을 먹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 먹고 살 수 있습니까? 오늘 설교 시간이 길어져서 한 시간 정도 설교를 들으면 배가 불러서 점심을 안 먹어도 괜찮게 될까요? 아닙니다. 더 배가 고파질 것입니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밥만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밥만 먹어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직장만 다녀도 살 수 있습니다. 직장을 다니면 돈을 벌 수 있고 돈을 벌면 그 돈으로 음식을 사서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밥을 먹지 않는다면 살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직장을 다니지 않는다면 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밥이고 직장입니다. 그 말은 어느 정도 맞습니다.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말씀보다는 밥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구만으로는 살지 않습니다. 사람은 욕구만으로 사는 존재, 먹고 사는 것으로 충분한 존재가 아닙니다.
사탄은 사람을 과소평가했습니다. 그는 “인간은 결국 욕구를 채우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그렇게 단순한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사람은 욕구 이상의 존재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만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고, 꿈을 꾸고, 더 높은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생존 욕구 이상으로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꿈꾸기 위해서 또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욕망
마귀는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고 생존하는 것 이상의 존재라는 의미를 얼른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인정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40일을 굶은 상황에서도 음식에 대한 평정심을 유지한 예수님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욕구 이상의 존재라면, 사람에게는 욕구 이상의 무엇이 있을까요? 욕구 이상의 그것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쉽게 말하면, 그것은 욕망입니다.
욕구와 욕망은 다른 것입니다. 욕구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에 대한 바람이라면, 욕망은 그 이상을 바라는 것입니다. 욕망의 ‘망’자를 보면 중국글자 안에 달이 들어 있습니다. ‘망’은 사람이 달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유래한 한자입니다. 그래서 ‘망’자는 멀리 바라보다, 기대하다, 소망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달을 바라보는 것은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행동이 아닙니다. 생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생존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멀리 떠 있는 달을 본다고 해서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사람은 멀리 있는 달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기대하고 소망하는 존재입니다. 욕망은 영어로는 desire입니다. 이 단어는 별과 관련이 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별을 갈망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별을 바라보며 그것을 원하는 것은 사람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질없는 바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런 존재입니다. 욕구 이상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존재입니다.
욕망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데 그 욕망이 선한 것이라면 소망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될 것 같습니다. 소망의 ‘망’자는 욕망의 ‘망’자와 같은 중국글자입니다. 저는 그냥 욕망이라는 말로 쓰겠습니다. 예수님의 욕망은 무엇이었을까요? 마귀는 예수님의 욕망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가지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기적인 욕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가지려고 했던 이유는 사람들을 자신의 제자로 삼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권력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권력의 자리가 빈 자리가 되어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선한 사람 또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권력을 차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권력의 자리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마음속 깊은 욕망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온 세상을 보여주며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네가 바라는 권력과 영광이 지금 내 꺼거든. 그런데 내가 이거 너 줄게. 단, 나한테 절 한 번만 해라. 그러면 내가 가진 권력과 영광, 시원하게 너에게 넘길게.”
어쩌면 예수님은 사탄의 제안을 듣고 흠칫 놀랐을 것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예수님의 욕망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그 제안은 꽤 솔깃할 수도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원했던 것이 바로 그것인데 절 한 번 하면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하니 저라면 마음이 꽤나 흔들렸을 것 같습니다. 일단 원하는 것을 얻으면 그 다음에는 그것을 선하게 쓰면 되지 않겠나, 뭐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않겠나, 바라는 것을 바로 얻을 수 있는데 굳이 돌아서 어렵게 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면서 보는 사람도 없을 텐데 눈 감고 딱 한 번 절할까, 라는 생각도 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단칼에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야 한다고 마귀를 꾸짖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목적이 선하더라도, 과정이나 수단이 악하다면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대체로 우리는 목적이 선하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사기도 칠 수 있고 적당히 타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정직하고 바른 길을 걸어서 목표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권세와 영광을 얻는 방법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고통스럽고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반면, 사탄에게 한 번 절하는 것은 훨씬 쉬운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든 길이었지만, 정직하고 선한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면 결국 예수님은 그분이 바라던 권세와 영광을 얻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게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통해 그분이 바라던 목표를 달성하셨습니다. 사탄의 유혹을 거절하시고, 정직하고 바른 길을 선택하셨기에 결국 참된 권세와 영광을 얻으신 것입니다.
적용
사랑하는 성화교회 성도 여러분, 선한 욕망을 품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늘 죽을 것 같은 상태에 이르더라도, 내일 지구의 종말이 임할 것 같더라도 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먹고 사는 존재 이상입니다. 사람은 욕구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욕구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미안하지만 그는 진정한 인간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면 우리가 어떤 별과 달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지 그에게 말해 주고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뭘로 정할까 고민하다가 윤동주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윤동주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1917년 평안북도에 태어난 그는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고 가정 전체가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교육받은 평양 은진중학교와 숭실중학교는 미션스쿨이었으며, 그곳에서도 그는 신앙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의 시에는 신앙적 세계관이 깊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라는 제목의 시를 지을 정도로 신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본 유학 중 항일운동 혐의로 체포되었고,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은 그의 ‘서시’의 한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서시는 1948년에 나온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맨 처음에 나오는 시입니다. 원래는 제목이 없는 시인데 시집의 맨 처음에 나와서 책의 서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시이므로 서시라고 부르다가 언제부터인가 그냥 ‘서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의 시집 전체를 안내하고 설명하는 시로서 윤동주의 신념과 삶의 자세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시입니다. 길지 않으니 제가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민국 사람의 삶은 인간 이하의 삶이었습니다. 숨이나 쉬고 밥이나 먹으면서 살아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삶을 살기를 강요받았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옴짝달싹할 수 없었고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윤동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그는 생존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욕구만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별을 노래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성경 말씀과 같은 구절을 남깁니다.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윤동주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본 재판관 앞에서도 당당히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쉬운 때가 없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고요. 대학에 가면 또 공부를 해야 하고 군대도 가야 하고 연애도 해야 하고 취업도 준비해야 합니다.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기도 어렵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도 어렵습니다. 직장에 들어가면 결혼을 준비해야 하고, 그나마 결혼할 사람이 있으면 다행인데 없으면 시간을 쪼개서 소개팅도 하도 데이트도 해야 합니다. 아무나 만나서 결혼할 수는 없으니까요. 결혼하면 아이를 낳을 생각을 하게 되고요. 요새는 늦게 결혼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아이를 낳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기도도 하고 병원도 찾아가 보고 겨우겨우 아이를 낳으면 이때부터 또 대형 프로젝트가 시작됩니다. 아이 잘 키우기 프로젝트입니다. 돈도 많이 들고 신경도 많이 써야 하고 시간과 체력도 요구됩니다. 그래도 건강하게만 커 주면 참 다행인데 자녀가 아프기도 합니다. 그러면 참 숨 돌릴 틈이 없습니다.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고 독립할 때쯤 되면 스스로도 나이가 들어서 몸 여기저기가 고장이 납니다. 그리고 그때쯤 되면 부모님도 많이 연로하셔서 돌봄이 필요합니다.
그냥저냥 살아가는 것만으로 숨이 찹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수시로 속삭입니다. “야, 밥만 먹고 살아. 밥만 먹고 살기도 바쁘고 버겁잖아. 꿈은 무슨 꿈이야. 교회는 무슨 교회야. 하나님의 말씀이 밥 먹여 주냐?” 그때 사탄에게 말씀하십시오. “사람은…… 잘 들어. 사탄아. 사람은…… 밥만 먹고 살지 않는다. 나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거야.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살아갈 거야. 그게 사람이야. 이 어리석은 사탄아.” 그런데 사탄이 말귀가 어두워요. 아마도 어두운 척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자주 말해 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살지 않습니다. 삶이 힘들고 고될지라도 늘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사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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