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틸리히 16

[틸리히조직신학3_176-183] 47. 우리는 예수를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원래 이 부분의 제목은 "신앙과 역사적 회의주의"입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는 예수를 얼마나 알 수 있을까?"로 제목을 붙였습니다. 틸리히가 붙여 놓은 제목을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제가 볼 때는 이 부분이 이 책에서 제일 중요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틸리히의 그리스도론을 공부하면서 제가 궁금했던 질문은 "어떻게 해야 우리가 예수와 같은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였습니다. 예수가 위대한 존재라는 것은 너무 잘 알고 있고 인정하고, 틸리히가 말한 것처럼 예수가 새로운 존재라는 사실도 저는 믿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나도 예수와 같은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틸리히의 조직신학은 그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아서 좀 답답했습니..

[틸리히조직신학3_142-146] 40.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역설

틸리히가 주장하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사실이 아닙니다. 단순한 사실이 아닌 역설이라고 강조합니다. 틸리히가 말하는 그리스도교의 근본 역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새로운 존재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 나타났다." (142) "The New Being has appeared in Jesus as the Christ." 좀 더 쉬운 번역으로 "새로운 존재가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로서 나타났다"로 옮길 수 있다. 틸리히는 이 주장이 역설이며 그리스도교의 모든 주장을 포함하는 역설이라고 말합니다. 틸리히는 이 사실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며, 반성적인 합리도 아니며 변증법적인 합리도 아니고 비합리도 아니고 부조리도 아니고 무의미도 아니라 역설이라고 말합니다. 그..

[틸리히조직신학3_139-142] 39. 역사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

히브리어로 메시아, 헬라어로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는 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 예언자, 제사장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들이었지만 틸리히는 그리스도는 왕이라고 설명합니다. 제가 볼 때도 이러한 설명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로 계속 타민족의 지배를 받아왔는데 그들 사이에서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예언자나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줄 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어봤는데 그때 베드로가 했던 대답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도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이해했는데 이는 예언..

[틸리히조직신학3_133-137] 37. 성례전, 교리, 감정을 통한 자기 구원

틸리히는 종교, 금욕, 신비 체험, 율법을 통해서 자기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례전, 교리, 감정을 통해서도 자기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먼저 성례전부터 살펴봅시다. 로마 가톨릭이 성례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교파별로 성례전의 종류가 다른데 로마 가톨릭은 성례전으로 부르는 것이 일곱 개가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세례와 성찬식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고해성사도 일종의 성례전입니다. 성례전에 참여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널리 퍼져 있습니다. 특별히 세례가 그렇습니다. 죽기 전에 꼭 세례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성례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톨릭에서 성례전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개신교에..

[틸리히조직신학3_132-133] 36. 신비주의의 문제

틸리히는 자기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래서 종교, 율법주의, 금욕에 이어서 이번에는 신비주의와 구원에 대해서 다룹니다. 틸리히는 종교, 율법, 금욕, 신비주의에 대해서 모두 기본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종교가 모호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존재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좋고, 율법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설명이자 요구라는 점에서 선한 것이며, 금욕도 지나친 탐욕보다는 훨씬 더 바람직한 것입니다. 신비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비주의는 신의 현존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경험이고 황홀한 경험입니다. 하나님을 느낀다는 것은 신을 믿는 사람이 가장 원하는 체험이기도 합니다. 신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을 부인하는 종교라면 도덕 체계에 불과할 뿐이죠. 그런 것을 종교라고..

[틸리히조직신학3_130-131] 35. 금욕에 대하여

틸리히는 구원을 위해 실천하는 금욕주의의 방법들에 대해서 비판합니다. 금욕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지적하는 것이죠. 틸리히는 금욕에 대해서는 긍정의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나친 금욕, 달리 말하면 금욕주의가 문제인 것이죠. 틸리히가 말하는 소외의 세 가지 표지는 불신앙, 자기 높임, 그리고 지나친 욕구입니다. 금욕은 욕구를 억제하는 것인데요. 인간이 가지는 무한대의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큰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따라서 적절한 금욕은 당연히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틸리히의 생각은 다음 두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과정들의 한 요소로서의 금욕주의는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자기 구원의 시도로서의 금욕주의는 위험한 왜곡이며 실패이다. (131) 인간의 실존 상..

[틸리히조직신학3_123-124] 31. '저주'라는 상징

절망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저주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말을 하기도 합니다. 저주는 사람한테 받을 수도 있지만 절망에 상태에 빠져서 자신이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신의 저주'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영원한 저주'에 대해서 말합니다. 영원한 저주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신의 저주이겠지요. 하지만 틸리히는 영원한 저주라는 말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말이라고 지적합니다. 영원과 저주는 서로 반대말이라는 것이지요. 인간의 시간은 그 자신과 함께 끝난다. 따라서 우리는 '영원한 저주'라는 용어를 신학적인 어휘에서 삭제해야만 한다. 그 대신에 우리는 저주를 영원으로부터의 배제의 의미로 말해야 한다. (124) 영원..

[틸리히조직신학3_107-109] 25. 죽음을 생각하는 게 좋을까?

기독교는 영혼의 불멸을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그 말은 일부분 맞고 일부분 틀린 말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대체로 맞냐, 틀리냐로 물어보면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흑백논리로 물어보면 틀리다에 가까운 말입니다. 기독교는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의 자연적인 특성으로서의 불멸성은 플라톤의 교리로서는 가능할지라도 기독교의 교리는 아니다." (107) 사도신경에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하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히 사는 것이 영혼의 불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이해하는 '나의 영혼'은 '나'와 같은 존재입니다. 자기 동일..

[틸리히조직신학3_103-104] 23. 역동성과 형식

폴 틸리히는 인간의 본질적인 본성에는 역동성과 형식이 통일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소외라는 인간의 실존 상태에서는 이것이 분리되어 있다고 이해할 수 있고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질료와 형상의 구분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형상은 틸리히가 말하는 형식과 거의 비슷한 의미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역동성은 질료와 다른 의미로 보입니다. 질료는 형상이 되기 위한 가능태의 재료를 뜻하기 때문에 역동성과 통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역동성도 새로운 존재를 가능하게 만드는 힘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질료는 재료를 의미하는 물질인데 역동성은 전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틸리히는 인간의 삶에 역동성과 형식이 모두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둘 중에 하나만 있는 삶, 또는 하나만을 추구하..

[틸리히조직신학3_100-102] 22. 제멋대로 하지 마라

틸리히는 자유와 운명을 계속 같이 언급합니다. 인간의 운명은 자유가 있는 운명이고 인간의 자유는 운명이 있는 자유입니다. 자유를 고려하지 않으면 운명이 왜곡되고 운명을 고려하지 않으면 자유가 왜곡됩니다. 틸리히는 자유의 왜곡을 자의 arbitrariness 라고 말하고 운명의 왜곡을 기계적인 필연성 mechanical necessity 이라고 말합니다. 옆에 영어를 써 놓는 이유는 '자의'는 크게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글자말을 쓸 때 생기는 문제입니다. 음은 똑같은데 뜻이 다릅니다. 자의自意는 자기 뜻이나 의지를 뜻하는 말이고요. '스스로 자'를 쓸 때 그런 뜻을 가집니다. 또 다른 자의가 있습니다. 자의恣意는 제멋대로 하는 생각입니다. 여기서 '자'는 '방자할 자', '마음대로 자..

[틸리히조직신학3_96-100] 21. 자기-상실과 세계-상실

틸리히는 인간의 모순된 상태에 빠져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본성적 본질이 있지만 동시에 인간은 실존의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인간의 실존 상태를 소외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본성적 본질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틸리히는 인간 소외의 세 가지 표지로서 불신앙, 자기 높임, 그리고 무한대의 욕구를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존재 자체가 이미 신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소외의 불신앙이라는 표지는 불가피한 것이기도 합니다. 분리될 수밖에 없지만 다시 결합하기를 희망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외라는 인간의 실존 상태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본질적 본성대로 살 수 없는 모순을 경험하는데 틸리히는 자기모순은 자기 파괴로 나아갈 수 있다고 지적합니..

[틸리히조직신학3_94-96] 20. 집단적인 범죄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6. 개인적인 소외와 집단적인 소외 집단적인 범죄라는 것이 존재할까요? 틸리히는 집단적인 범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집단적인 범죄로 보이는 사건은 꾸준히 있어 왔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것입니다. 틸리히도 이런 점에 대해서는 인정을 합니다. 집단적인 범죄는 인간의 의식에 있어서 결코 완전히 부재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적인 본성에 반대되는 행위들을 저지르고 자신들이 속해 있는 집단을 파괴하는 지배자들, 지배 계층들, 지배적인 운동들이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94) 틸리히가 집단적인 범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이유는 사회집단은 결정의 주체를 가지고 있기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사회집단 전체가 범죄를 저지를 결정을 한다면 집단적인 범죄라고 할 수 있지만 사회집단 안..

[틸리히조직신학3_84-90] 18. 욕망과 리비도

틸리히는 인간 소외의 세 가지 표지로 불신앙, 자기높임, 무한대의 욕구를 제시합니다. 무한대의 욕구는 제가 나름대로 번역을 한 것이고 영어로는 concupiscence라고 합니다. 원래 번역은 '강한 욕망'이나 '성적인 욕구'를 뜻하지만 틸리히는 무제한적인 욕구로 이해하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불신앙과 자기높임을 다시 한번 이렇게 정리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중심을 신적인 중심으로부터 분리하는 것(불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자신과 그의 세계의 중심으로 만드는 것(휴브리스)이다. (84) 틸리히가 이렇게 다시 설명을 하니 소외의 표지로 왜 세 가지를 드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왜 네 가지나 다섯 가지가 아니고 세 가지로 정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인간은 자신의 존재 근거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시..

[틸리히조직신학3_81-84] 17. 휴브리스와 교만의 차이점

틸리히는 인간 소외의 세 가지 표지로 불신앙, 자기높임, 무한대의 욕구로 설명합니다. 불신앙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분리를 의미하고 무한대의 욕구는 말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자기높임은 설명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영어로는 hubris(휴브리스)라고 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휴브리스는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휴브리스는 신의 영역으로의 인간의 자기높임(self-elevation)이다. 인간이 이러한 자기높임을 행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위대성 때문이다. (82) 휴브리스는 자기를 높이는 것인데 어디까지 자기를 높이는 것이냐면 바로 신의 영역으로까지 자기 자신을 높이는 마음과 행동을 휴브리스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의 영역이라는 것은 무엇이냐면 바로 무한성의 영역입니다. 무한성의 영역으로까지 자기 자신..

[틸리조3_44-47] 8. 본질주의 대 실존주의_틸리히 "조직신학3"

[틸리조3_44-47] 틸리: 폴 틸리히 Paul Tillich 조: 조직신학 Systematic Theology 3: 3권 44-47: 44쪽에서 47쪽까지 틸리히는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실존주의가 등장한 것은 헤겔의 본질주의에 항의하기 위해서라고 지적합니다. 틸리히는 그렇게 말했지만 제 생각에는 반드시 헤겔에 대한 반동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인간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헤겔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헤겔은 개인을 비롯한 인류가 참된 존재와 화해되어 있다고 주장했는데 개인, 공동체, 그리고 인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이나 공동체의 경우는 각각 그 경험이 다르겠지만 인류가 함께 경험한 20세기 초반의 세계 대전은 본질주의의 깃발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