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폴 틸리히: 그리스도론 59

[틸리히조직신학3_269-274] 70. 구원의 세 가지 측면

"구원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주 꺼내 들어야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구원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구원을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구원이라는 것은 그 의미가 매우 다양합니다. 사람마다 다른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에 대해서 긴 대화를 해야 합니다. 마치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늘 이야기하고 사랑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사랑이 무엇인지 새롭게 깨닫고 배워가는 것처럼 구원에 대해서도 같은 자세를 취하면 좋습니다. 틸리히는 구원을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세 가지밖에 없을까요? 아마 훨씬 더 많은 측면을 다룰 수도 있겠지만 가장 주요하게 세 가지 측면을 거론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정리했을 것입니다. 그 세 가지 측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틸리히조직신학3_265-269] 69. 속죄론의 원리

틸리히는 속죄론의 원리를 여섯 가지로 제시합니다. 하나씩 열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고요. 틸리히가 속죄론의 원리를 제시한 것을 읽어보면서 느낀 것은 역시 '속죄'라는 단어를 다른 말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속죄는 죄를 속한다는 말인데 죄를 속하는 것은 주로 그에 대한 벌을 받거나 돈을 지불하거나 선행을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의미합니다. 속죄는 죄와 깊은 관련이 있는 단어인데 실제로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말하는 속죄는 이런 식의 죄와 벌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영어 단어 atonement의 어원적 의미에 기반을 둔 '화해'나 '하나 되기'로 번역하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습니다. 틸리히는 속죄론의 첫 번째 원리는 다음과 같다고 주장합니다. 가장 결..

[틸리히조직신학3_260-265] 68. 속죄론의 유형들

속죄는 영어 atonement를 번역한 말입니다. 물론 atone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자신이 잘못한 일에 대해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속죄'의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atone이라는 단어를 잘 보면 이 단어는 at one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atone은 하나가 되다, 화해하다, 또는 조화를 이루다의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속죄'는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거나 그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돌이키는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속죄는 돈으로 할 수도 있고, 노동으로 할 수도 있고, 선한 일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속죄라고 하죠. 그런 의미에서 atonement를 속죄라고 번역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atonemen..

[틸리히조직신학3_257-260] 67. 구원자, 중보자, 구속자

예수에 대한 호칭은 다양합니다. 제일 흔한 것이 구원자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사용하는 단어가 구속자라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구원자와 구속자는 그 의미가 매우 다릅니다. 구원과 구속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죠. 그리고 또 자주 사용하는 호칭이 중보자입니다. 이 세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 호칭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스스로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책에서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틸리히는 이 세 가지 용어 중에 구원자라는 단어를 선호할 것 같습니다. 예수가 구원자인 이유에 대해서 틸리히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새로운 존재로서의 그의 존재의 보편적인 의의 때문에 구원자이다. (틸리히 조직신학 III, 258) 틸리히가 이 책에..

[틸리히조직신학3_253-257] 66. 구원의 의미

폴 틸리히는 그리스도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구원의 의미를 다룹니다. 구원은 참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대별로 또한 종파별로 구원에 대해서 다르게 이해합니다. 예를 들어 구원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 교회에서 구원은 죽음과 오류로부터의 구원이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구원은 죄책으로부터의 그리고 이생과 저생에서의 그의 결과로부터의 구원이었다. 개신교 정통주의에서 구원은 율법으로부터의 그리고 율법의 불안을 생산하는 힘과 저주하는 힘으로부터의 구원이었다. 경건주의와 신앙부흥운동에서 구원은 회개를 통한 불신 상태의 극복과 회개한 사람들의 변화였다. 금욕적이며 자유주의적인 개신교에서 구원은 특별한 죄들의 극복과 도덕적 완전을 향한 진보였다. (틸리히 조직신학 III, 254)..

[틸리히조직신학3_244-253] 65. 부활과 관련된 상징들

예수의 삶은 크게 두 가지의 상징으로 대표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입니다. 여기에서 틸리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일맥상통하고 있는 상징들을 살펴봅니다. 십자가의 상징이 예수의 선재와 관련되어 있다면 부활은 예수의 후재와 관련이 있습니다. 선재라는 말은 종종 들어본 말인데 후재라는 말은 낯선 단어이네요. 후재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이후에도 부활과 승천을 통해 여전히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선재는 십자가뿐만 아니라 예수의 부활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가 부활하고 후재할 수 있었던 것도 예수가 선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상징과 관련된 사건은 예수가 행한 수없이 많은 기적이죠. 부활이 삶과 죽음이라는 세..

[틸리히조직신학3_243-244] 64. 십자가 사건의 상징성

틸리히는 예수의 십자가는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고립된 사건이라면 예수의 십자가가 예수에게 일어났던 다른 일들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사건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슈퍼맨 영화에서 보면 슈퍼맨은 내내 강력한 능력을 지닌 절대 패배 불가능의 존재로 등장하는데 갑자기 그 힘을 잃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슈퍼맨은 악당들에게 뭇매를 맞고 심지어 죽을 뻔한 위기를 겪게 됩니다. 이것은 고립된 사건이죠. 슈퍼맨이 힘을 잃었기 때문에 단기간 혹은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 고립된 사건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그런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고 틸리히는 주장합니다. 십자가가 고립된 사건이라는 느낌을 주는 이유는 예수의 사역이 꽤 화려했거든요. 예수는 죽은 자도 살리고 수 천명의 사람들을 먹..

[틸리히조직신학3_232-236] 62. 성서와 예수 사건의 의미

예수는 역사 속에서 태어났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예수의 삶은 사람들의 환상도 아니고 상상도 아니고 실제로 일어났던 구체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비밀리에 발생한 일도 아니고 수많은 사람이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눈으로 본 사람들이 자신이 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거나 기록으로 남겨서 그 이야기가 계속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예수라는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 큰 관심이 없습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전달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성서가 전달하려고 하는 바는 예수의 삶과 죽음이 어떤 의미가 있고 그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즉 성서는 예수 사건의 의미에 관심이 있습니다. 성서는 예수..

[틸리히조직신학3_225-232] 61. 현대 그리스도론의 과제

틸리히가 말하는 현대 그리스도론의 과제는 예수에 대한 이론인 두 본성론을 제거하고 새로운 이론을 세우는 것입니다. 틸리히가 과제라고 말한 이유는 아직 자신도 풀지 못한 숙제이고 해야할 일이기는 하나 과연 이 작업이 가능할 것인지 의문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예수의 두 본성론, 즉 예수는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이론은 칼케돈 공의회(451) 이후 적어도 1500년 정도 지속되어 온 이론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루 아침에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주 정교하고 그럴 듯한 이론을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1000년 이상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던 것을 빼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의 두 본성 이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어제오늘일은 아닙니다. 개신교 신학..

[틸리히조직신학3_220-224] 60. 니케아와 칼케돈 공의회

그리스도교가 가진 가장 큰 난제는 예수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데 부족함이 있습니다. 예수는 깔끔하게 설명이 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틸리히는 예수의 그리스도성과 예수의 예수성이 서로 역설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신성과 예수의 인성이 충돌하는 것 같은데 어느 한쪽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한쪽을 포기하면 좋은데 한쪽을 포기하면 예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그리스도성과 예수의 예수성을 모두 다 살려 놓으면 모순이 되는 것 같습니다. 무조건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리스도교는 주로 신성을 살리는 것을 택했습니다. 틸리히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충돌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

[틸리히조직신학3_215-220] 59. 그리스도교 교리의 목적과 한계

틸리히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목적은 메시지의 본질을 보호하는 것이었다고 지적합니다. 본질이 훼손되지 않도록 교리가 본질의 수호자 역할을 해 온 것입니다. 즉 교리는 그리스도교의 체계를 만들기 위해서 만들었다기보다 그 메시지의 오염을 막기 위한 방어의 역할을 감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오염될 수 있는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론입니다. 예수에 대한 이해에 대해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항해서 교리를 만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교리적 작업의 중심은 기독론의 교리를 창조하는 데 있었다. 그 밖의 다른 교리적인 명제들은 기독론 교리의 전제로 주어지거나 아니면 기독론 교리의 결과였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세례 고백문은 초대교회의 기본 텍스..

[틸리히조직신학3_211-215] 58. 예수에 대한 견해의 충돌

틸리히는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에 통일성이 있는지 질문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일관성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성서가 그렇게 묘사하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틸리히는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하서 첫 번째로 역사적인 대답을 해야 하고 두 번째로 조직신학적 대답을 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첫 번째 역사적인 대답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틸리히는 말합니다. 이전에도 틸리히가 언급했지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해서 성서의 저자들은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성서는 예수에 대한 일치된 고백 위에 세워진 “공동체의 책”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대답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고요. 큰 틀에서 성서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하여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차이..

[틸리히조직신학3_209-211] 57. 예수가 가진 연속성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예수는 독특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를 독특한 존재로 완전히 고립시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독특성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그를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분리하는 시도를 하기도 하고 역사적으로도 예수가 살았던 시기를 다른 시기와 완전히 다른 시기로 따로 떼어놓으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틸리히는 이러한 시도에 반대해서 예수의 연속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가 가진 연속성은 공간적인 것이기도 하고 시간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신약성서의 기록들은 예비적인 계시의 담지자들의 생애로부터 유래된 예수의 족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210) 복음서에 보면 예수의 족보가 지루하게도 길게 나와 있습니다. 왜 이렇게 길게 예수의 조상들에 대해서 언급할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복음서의 저..

[틸리히조직신학3_208-209] 56. 하나 됨 안에 불안 집어 넣기

틸리히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불확실성이나 불안을 제거하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불확실성과 불안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할 수만 있다면 없애고 싶어하죠. 사람들은 확실하고 안정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불확실성이나 불안을 제거하면 그런 존재를 더 이상 사람이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사람은 다른 어떤 존재보다도 불확실성을 많이 가지고 살아갑니다. 돌멩이를 생각해 볼까요. 돌멩이가 돌멩이로 태어나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요? 원하지 않는 장소가 가게 될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 정도가 가장 큰 일이 될 것입니다.돌멩이는 어디를 가더라도 돌멩이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이 태어나서 그가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만큼 인간은 불확실성을 가지고..

[틸리히조직신학3_205-208] 55. 예수에게도 삶은 모호했다

틸리히는 이 부분에서 삶의 모호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예수가 삶의 모호성에 참여했다고 주장합니다. 말이 어려운데, 삶이라는 것이 불확실하고 모호한 것인데 예수에게도 그랬다는 말입니다. 삶이 불확실하고 모호한 것은 인간의 유한성에만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여러 대상들 자체가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과의 모든 만남은 실천적인, 이론적인 불확실성의 짐을 지고 있다. 이 불확실성은 개인의 유한성에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인간이 만난 것의 모호성에도 원인이 있다. (205) 이 부분이 삶의 모호성과 예수가 그것에 참여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어서 그런지 내용 자체도 좀 모호한 것 같습니다.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고 좀 억지스러운 것 같은 내용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