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폴 틸리히: 그리스도론 59

[틸리히조직신학3_139-142] 39. 역사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

히브리어로 메시아, 헬라어로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는 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 예언자, 제사장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들이었지만 틸리히는 그리스도는 왕이라고 설명합니다. 제가 볼 때도 이러한 설명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로 계속 타민족의 지배를 받아왔는데 그들 사이에서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예언자나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줄 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어봤는데 그때 베드로가 했던 대답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도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이해했는데 이는 예언..

[틸리히조직신학3_137-139] 38. 새로운 존재에 대한 탐구 두 가지 유형

인간은 소외 상태에 놓여 있고 이러한 상태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본능적으로 인간은 소외를 극복하려고 시도합니다. 인간의 곤경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극복의 노력도 보편적으로 나타난다고 틸리히는 말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존재에 대한 탐구입니다. 틸리히는 탐구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비역사적인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인 유형입니다. 달리 말하면 첫 번째 유형은 새로운 존재는 역사 속에서 절대 발생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유형이고 두 번째 유형은 새로운 존재가 역사 속에서 발생했거나 혹은 발생할 것이라고 믿는 유형입니다. 틸리히는 동양에서는 주로 비역사적인 유형으로, 서양에서는 주로 역사적인 유형으로 새로운 존재를 탐구했다고 설명합니다. 새로운 존재란 유한성의 ..

[틸리히조직신학3_133-137] 37. 성례전, 교리, 감정을 통한 자기 구원

틸리히는 종교, 금욕, 신비 체험, 율법을 통해서 자기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례전, 교리, 감정을 통해서도 자기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먼저 성례전부터 살펴봅시다. 로마 가톨릭이 성례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교파별로 성례전의 종류가 다른데 로마 가톨릭은 성례전으로 부르는 것이 일곱 개가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세례와 성찬식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고해성사도 일종의 성례전입니다. 성례전에 참여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널리 퍼져 있습니다. 특별히 세례가 그렇습니다. 죽기 전에 꼭 세례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성례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톨릭에서 성례전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개신교에..

[틸리히조직신학3_132-133] 36. 신비주의의 문제

틸리히는 자기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래서 종교, 율법주의, 금욕에 이어서 이번에는 신비주의와 구원에 대해서 다룹니다. 틸리히는 종교, 율법, 금욕, 신비주의에 대해서 모두 기본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종교가 모호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존재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좋고, 율법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설명이자 요구라는 점에서 선한 것이며, 금욕도 지나친 탐욕보다는 훨씬 더 바람직한 것입니다. 신비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비주의는 신의 현존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경험이고 황홀한 경험입니다. 하나님을 느낀다는 것은 신을 믿는 사람이 가장 원하는 체험이기도 합니다. 신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을 부인하는 종교라면 도덕 체계에 불과할 뿐이죠. 그런 것을 종교라고..

[틸리히조직신학3_130-131] 35. 금욕에 대하여

틸리히는 구원을 위해 실천하는 금욕주의의 방법들에 대해서 비판합니다. 금욕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지적하는 것이죠. 틸리히는 금욕에 대해서는 긍정의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나친 금욕, 달리 말하면 금욕주의가 문제인 것이죠. 틸리히가 말하는 소외의 세 가지 표지는 불신앙, 자기 높임, 그리고 지나친 욕구입니다. 금욕은 욕구를 억제하는 것인데요. 인간이 가지는 무한대의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큰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따라서 적절한 금욕은 당연히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틸리히의 생각은 다음 두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과정들의 한 요소로서의 금욕주의는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자기 구원의 시도로서의 금욕주의는 위험한 왜곡이며 실패이다. (131) 인간의 실존 상..

[틸리히조직신학3_127-128] 33. 자기 구원과 종교

틸리히는 자기 구원의 방법들과 그 실패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서론이 엄청 길었는데 드디어 이제 본론이 나오기 시작하려고 합니다. 조직신학 세 번째 책이 그리스도론인데 이제야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틸리히는 자기 구원의 방법들을 소개하고 그 방법들이 모조리 실패했다고 서술합니다. 첫 번째가 종교입니다. 종교가 자기 구원에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시작하죠. 존재가 행위를 선행한다는 원리는 종교사가 인간의 자기 구원의 시도와 실패의 역사인 한에서 종교사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함축한다. (127) 종교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서 구원을 받으려고 시도하지만, 사실은 존재가 행위를 선행한다는 원리를 잘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들이 종교에 관심을 가지는..

[틸리히조직신학3_125-127] 32. 의지의 노예

그리스도교 신학자 사이에 계속 논쟁을 하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자유와 운명이라는 주제입니다. 틸리히도 여기서 언급하고 있지만 가장 먼저는 바울과 유대주의자들이 서로 대립했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도 이것 때문에 한참을 싸웠고요. 펠라기우스 논쟁이라고 하고요. 마틴 루터와 에라스무스도 이 주제로 토론을 했죠. 여기서 나온 논문이 루터가 쓴 의지의 노예라는 논문입니다. 운명 속에 살고 있는 실존 또는 의지의 노예로서 살고 있는 실존을 말한다면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는 것이고요. 반대라면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는 것이겠죠. 토론의 주제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였습니다. 물론 이것을 이분법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토론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지점이 있는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교에서 인..

[틸리히조직신학3_123-124] 31. '저주'라는 상징

절망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저주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말을 하기도 합니다. 저주는 사람한테 받을 수도 있지만 절망에 상태에 빠져서 자신이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신의 저주'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영원한 저주'에 대해서 말합니다. 영원한 저주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신의 저주이겠지요. 하지만 틸리히는 영원한 저주라는 말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말이라고 지적합니다. 영원과 저주는 서로 반대말이라는 것이지요. 인간의 시간은 그 자신과 함께 끝난다. 따라서 우리는 '영원한 저주'라는 용어를 신학적인 어휘에서 삭제해야만 한다. 그 대신에 우리는 저주를 영원으로부터의 배제의 의미로 말해야 한다. (124) 영원..

[틸리히 조직신학III_122-123] 30. '하나님의 진노'라는 상징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롬 1:18, 개정)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대표 구절입니다. 진노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검색해 보면 신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성경은 로마서와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진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을 상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틸리히는 하나님의 진노는 '상징'이라고 말을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소외 상태에 있는 인간이 경험하는 절망을 '하나님의 진노'라는 상징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이 경험하는 절망을 표현하는 상징입니다. '신들의 분노'라는 개념은 그의 감정이 다른 유한한..

[틸리히조직신학3_115-119] 28. 소외, 의심과 무의미

유한성은 의심을 포함한다. 진리는 전체이다. 그러나 어떠한 유한한 존재도 전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115) 그러나 유한성은 또한 다른 모든 점에 있어서 불확실성을 포함한다. 불확실성은 유한한 존재의 일반적인 불안정성, 그의 존재의 우연성, 그는 스스로 있지 않고 "존재 속으로 내던져진" 존재(하이데거)라는 사실, 필연적인 장소와 필연적인 현재의 결여의 표현이다. (116) 이 모든 형태의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은 인간의 본질적인 유한성에, 그것이 창조된 것인 한 피조물의 선함에 속한다. (116) 만일 소외의 상태에서 궁극적인 것의 차원이 차단된다면 상황은 달라지게 된다. (117) 소외는 실존 구조의 특징이다. 하지만 이 소외가 어떻게 해서 압도적으로 나타나게 되는가 하는 것은 역사의 문제이다. 역사에..

[틸리히조직신학3_112-115] 27. 소외, 고난과 고독

틸리히는 인간 소외의 결과인 고난과 고독에 대해서 말합니다. 고난과 고독은 문제죠. 영어로는 suffering과 aloneness인데 우리말로 고난과 고독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고난과 고독은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둘 다 나쁜 것 같은데 틸리히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고난과 고독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고난과 고독은 필요악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필요악이라고 하면 근본적으로 악한 것인데요. 틸리히에 따르면 고난과 고독은 필요악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며 악한 것도 아닙니다. 고난은 죽음처럼 유한성의 한 요소이다. 고난은 몽상적인 순진무구의 상태 속에서는 제거되지 않고 축복으로 바뀐다. (112) 틸리히는 고난은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

[틸리히조직신학3_109-112] 26. 소외, 시간과 공간

시간, 공간, 인과성, 실체를 포함하는 유한성의 범주적인 본성은 피조물 전체의 구조로서 타당한 것이다. (110) 범주들은 불안을 낳지만 이 범주들은 비존재에 대한 존재의 우위가 경험된다면 용기에 의해서 긍정될 수 있다. (110) 시간이 존재 자체의 힘의 현존을 통한 "영원한 지금" 없이 경험될 때, 시간은 현실적인 현재가 없는 단순한 무상함으로 알려진다. (110) 그는 자신을 위해서 기념물을 만들어서 그의 시간이 아닌 미래 속에 존재하려고 시도한다. (110) 공간이 존재 자체의 힘의 현존으로서의 "영원한 여기" 없이 경험될 때, 공간은 공간적인 우연성으로서, 즉 인간이 속해야 할 필연적인 공간이 없는 것으로 경험된다. (111) 최후의 집에 대한 모든 동경 속에는 이런 욕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틸리히조직신학3_107-109] 25. 죽음을 생각하는 게 좋을까?

기독교는 영혼의 불멸을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그 말은 일부분 맞고 일부분 틀린 말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대체로 맞냐, 틀리냐로 물어보면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흑백논리로 물어보면 틀리다에 가까운 말입니다. 기독교는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의 자연적인 특성으로서의 불멸성은 플라톤의 교리로서는 가능할지라도 기독교의 교리는 아니다." (107) 사도신경에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하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히 사는 것이 영혼의 불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이해하는 '나의 영혼'은 '나'와 같은 존재입니다. 자기 동일..

[틸리히조직신학3_103-104] 23. 역동성과 형식

폴 틸리히는 인간의 본질적인 본성에는 역동성과 형식이 통일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소외라는 인간의 실존 상태에서는 이것이 분리되어 있다고 이해할 수 있고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질료와 형상의 구분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형상은 틸리히가 말하는 형식과 거의 비슷한 의미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역동성은 질료와 다른 의미로 보입니다. 질료는 형상이 되기 위한 가능태의 재료를 뜻하기 때문에 역동성과 통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역동성도 새로운 존재를 가능하게 만드는 힘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질료는 재료를 의미하는 물질인데 역동성은 전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틸리히는 인간의 삶에 역동성과 형식이 모두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둘 중에 하나만 있는 삶, 또는 하나만을 추구하..

[틸리히조직신학3_100-102] 22. 제멋대로 하지 마라

틸리히는 자유와 운명을 계속 같이 언급합니다. 인간의 운명은 자유가 있는 운명이고 인간의 자유는 운명이 있는 자유입니다. 자유를 고려하지 않으면 운명이 왜곡되고 운명을 고려하지 않으면 자유가 왜곡됩니다. 틸리히는 자유의 왜곡을 자의 arbitrariness 라고 말하고 운명의 왜곡을 기계적인 필연성 mechanical necessity 이라고 말합니다. 옆에 영어를 써 놓는 이유는 '자의'는 크게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글자말을 쓸 때 생기는 문제입니다. 음은 똑같은데 뜻이 다릅니다. 자의自意는 자기 뜻이나 의지를 뜻하는 말이고요. '스스로 자'를 쓸 때 그런 뜻을 가집니다. 또 다른 자의가 있습니다. 자의恣意는 제멋대로 하는 생각입니다. 여기서 '자'는 '방자할 자', '마음대로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