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신학자 사이에 계속 논쟁을 하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자유와 운명이라는 주제입니다. 틸리히도 여기서 언급하고 있지만 가장 먼저는 바울과 유대주의자들이 서로 대립했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도 이것 때문에 한참을 싸웠고요. 펠라기우스 논쟁이라고 하고요. 마틴 루터와 에라스무스도 이 주제로 토론을 했죠. 여기서 나온 논문이 루터가 쓴 의지의 노예라는 논문입니다. 운명 속에 살고 있는 실존 또는 의지의 노예로서 살고 있는 실존을 말한다면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는 것이고요. 반대라면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는 것이겠죠. 토론의 주제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였습니다. 물론 이것을 이분법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토론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지점이 있는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다고 주장한 쪽이 모두 이겼습니다.
틸리히는 이 부분에서 특별히 루터의 의지의 노예에 관한 이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의지의 노예라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립니다. 뭔가 내 의지의 노예인 대상이 있는 것 같은 말입니다. 영어로는 bondage of the will이라고 합니다. 의지의 속박 상태라고 번역할 수 있겠네요. 루터가 주장한 바는 의지가 속박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즉 의지가 노예라는 뜻입니다. 의지라고 하는 것이 인간이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앞에 자유라는 말을 붙여서 자유의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의지가 노예다라는 말은 "자유가 노예다", "자유는 자유가 없다", "의지는 의지가 없다", "의지는 자유가 없다" 이런 식으로 바꾸어서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정리하면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 자유의지는 자유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틸리히는 인간에게는 유한한 자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루터도 인간에게 아예 자유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자유라는 말이 사실 범위가 너무 넓은 말이어서 좀 더 한정해서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틸리히가 설명하는 대로 말하자면 인간에게는 자신의 소외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꼭 필요합니다.
은총은 본질적인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다. 하지만 은총은 실존의 조건들 속에 있는 자유가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한다. 즉 은총은 소외된 자를 재결합시킨다. (126)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는데, 인간의 소외 상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재결합을 발생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주장입니다. 의지가 자유가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노예 상태에 빠져 있는데 이것을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자유는 인간이 자신의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없다고 할 수 없는데 굳이 사람의 의지가 노예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 마음대로 선택하는 능력이 있지만 소외 상태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의지의 노예는 그의 소외를 돌파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을 의미한다. (126)
그런데 사실 이것만 돌파하면 인간에는 소외 극복을 실천할 수 있는 자유의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문제는 시작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시작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시작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이 없다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요.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이 매우 무기력하게 들리고 인간의 능력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지 않으면 인간은 자유롭지 않으냐라고 물어볼 수 있는데, '네, 아니요'로 대답하면 '네'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지 않으면 인간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누구에게 임할까요? 일부 선택된 사람들에게 임할까요,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임할까요? 여기서 학자들이나 교단 별로 의견이 갈립니다. 감리교에서는 후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은총이 임한다고 주장하죠. 존 웨슬리는 이것은 선재 은총, 먼저 오는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면 결국 인간이 소외 상태에서 죄에 빠지는 것은 스스로의 책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논리를 따라가면 그렇게 가는 게 맞을 것 같은데 그리스도교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에라스무스나 펠라기우스의 이론을 배척합니다.
제가 볼 때 그 이유는 자유와 책임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자유롭게 선택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람이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라면 사람의 죄가 온전히 자신의 자유로 인한 책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교는 그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는 것이죠. 아우구스티누스나 루터의 이론은 인간의 죄에 대하여 공동 책임을 지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표명하는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행할 수 없다. 그는 행하기 위해서는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존재가 새로운 행위에 선행한다. (126)
이 말은 또 매우 애매하고 어려운 말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지 않으면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말인데요. 그러면 인간이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또 온전히 하나님 책임이라고 뒤집어 씌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에게는 운명 밖에 없는 것이죠. 단순하게 말하면 그리스도교 정통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죄에 하나님도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제 생각에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죄에 하나님이 반드시 공동 책임을 지고 싶어 하신다로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풀어놓고 보니까 이 문제는 여전히 어렵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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