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폴 틸리히: 그리스도론

[틸리히 조직신학III_122-123] 30. '하나님의 진노'라는 상징

설왕은31 2021. 10. 18.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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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롬 1:18, 개정)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대표 구절입니다. 진노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검색해 보면 신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성경은 로마서와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진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을 상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틸리히는 하나님의 진노는 '상징'이라고 말을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소외 상태에 있는 인간이 경험하는 절망을 '하나님의 진노'라는 상징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이 경험하는 절망을 표현하는 상징입니다. 

 

'신들의 분노'라는 개념은 그의 감정이 다른 유한한 존재들에 의해서 분출되는 유한한 신이라는 우상숭배적인 사상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상기시켜 준다... 따라서 신들의 분노라는 개념은 기독교 사상에 있어서는 재해석되든지 아니면 완전히 폐기되어야만 한다. (122)

 

그리스 로마 신화나 우리나라에서 전래되어 오는 설화 속에 등장하는 신은 인간처럼 화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그 신을 달래기 위해서 주로 사람을 잡아다가 희생제물로 바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그 신은 사람의 죽음을 통해 노여움을 가라앉히게 되죠. 굉장히 흔한 이야기이고 논리적으로도 들어맞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해하기 쉽죠.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이야기인데 거기서 신을 하나님을 바꾸고 희생제물을 예수로 바꾸면 되니까요. 그런데 틸리히는 이런 구조를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를 이해하는 것은 우상숭배 사상이라고 비판합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무한한 하나님이 유한한 존재자들에 의해서 불같이 화를 내는 일은 그리스도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의 진노'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화를 잘 내는 분이신지 아니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신지 헷갈리게 됩니다. 둘 중에 하나만 맞는 말입니다. 전자가 맞다면 후자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고, 후자가 맞다면 하나님은 진노하시지 않겠죠. 틸리히는 후자가 맞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을 대적하는 모든 것들을 대적하시며, 그것들을 자기 파괴 속에 맡겨버림으로써 파괴된 자들을 구원하신다... 오직 용서의 받아들임만이 진노하시는 하나님 이미지를 궁극적으로 타당한 사랑의 하나님의 이미지로 바꿀 수 있다. (123)

 

틸리히는 인간 소외의 표지가 주로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주장합니다. 불신앙, 지나친 자기 높임, 끝없는 욕구,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통해서 인간은 소외 상태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소외가 더욱 심해지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만약 이 세 가지를 모두 열심히 실천할 수 있는 상황에 있는 사람이라면 소외 상태를 스스로 더 심화시키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신앙, 지나친 자기 높임, 끝없는 욕구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이죠. 특별히 끝없는 욕구를 추구하는 데 돈이 도움이 되죠. 자본주의 사회는 자유를 존중하고 돈만 있다면 자유롭게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게 오히려 소외를 심화시키는데, 그 마지막은 절망입니다. 돈이 이렇게 위험한 것입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절망에 이른 사람의 경험은 '하나님의 진노'라는 표현으로 상징될 수 있다는 말이며, 실제로 하나님이 진노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을 믿는 만큼 당신은 하나님을 소유한다"고 말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해서 실존적인 방법을 제시했던 루터를 참조할 수 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궁극적인 파괴의 위협이 된다. (122-123)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사람,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파괴의 위협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분노하고 있고 결국 자신을 파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소외 상태에 있는 사람이 절망에 이를 때 화난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치게 되는데, 그 얼굴은 진짜 하나님의 얼굴이 아닙니다. 

 

틸리히 신학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가 나 있지 않습니다. 저도 완전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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