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폴 틸리히: 그리스도론

[틸리히조직신학3_112-115] 27. 소외, 고난과 고독

설왕은31 2021. 10. 12.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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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히는 인간 소외의 결과인 고난과 고독에 대해서 말합니다. 고난과 고독은 문제죠. 영어로는 suffering과 aloneness인데 우리말로 고난과 고독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고난과 고독은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둘 다 나쁜 것 같은데 틸리히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고난과 고독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고난과 고독은 필요악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필요악이라고 하면 근본적으로 악한 것인데요. 틸리히에 따르면 고난과 고독은 필요악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며 악한 것도 아닙니다. 

 

고난은 죽음처럼 유한성의 한 요소이다. 고난은 몽상적인 순진무구의 상태 속에서는 제거되지 않고 축복으로 바뀐다. (112)

 

틸리히는 고난은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상태에서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인데 문제는 인간은 본질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죠. 고난을 보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난을 본질적인 유한성의 한 요소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난을 실존적인 소외의 요소로 보는 것입니다. 두 가지 관점이 겹치는 부분이 있는데 구분을 하자면, 전자는 고난을 유한성의 한 요소로 보고 제거해 버리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고 후자는 고난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려는 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틸리히는 전자는 불교의 태도이며 후자는 기독교의 태도라고 말하면서 두 종교를 견주어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불교와 기독교를 뭉뚱그려서 말하는 것은 좀 위험합니다. 불교와 기독교 모두 아주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 의해서 형성된 종교이기 때문에 정말 다양한 주장이 그 안에 있습니다. 대체로 그렇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유한성의 한 요소인 고난을 궁극적인 용기를 가지고 받아들임으로써 실존적인 소외에 의존하고 있는 그 고난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된다. (113)

 

틸리히에 따르면, 불교는 고난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반면 기독교는 고난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렇다면 고난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요? 틸리히는 고난의 주요 원인은 인간의 고독과 적대감이라고 말합니다. 

 

의미 없는 고난의 원인들 중 하나는 고난을 다른 존재자들과의 연합에 의해서 극복하고자 갈망하는 개개인의 존재의 고독과 이 갈망의 거절로부터 오는 적대감이다. (114)

 

이 문장은 번역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의미 없는 고난의 원인 중 하나는 개개인의 존재의 고독, 타인과 연합해서 고독을 극복하려는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의 거절로부터 오는 적대감이다."

 

고난의 근본적인 원인은 고독, 다른 말로 하면 외로움이라는 말입니다. 틸리히는 이것에 대해서 특별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저도 이것에 대해서 구체적인 설명을 못 하겠습니다. 외로움이 고난의 주요 원인이라는 데에는 동의하고 저도 그렇게 주장하는데 인간이 왜 외로움을 느끼는지에 대해서는 딱히 설명할 말이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났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인간은 외로움을 극복하려는 마음에서 타인과 연합하려고 하는데 이 시도는 항상 실패한다고 틸리히는 주장합니다. 인간은 그 누구와도 완벽하게 연합해서 외로움을 이겨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 욕망은 항상 실패하고 완벽한 연합의 시도는 항상 거절된다는 것이죠. 타인과 연합해서 외로움을 떨쳐내려는 시도가 항상 실패하는 이유는 인간은 궁극적인 존재와 연합을 통해서만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죠.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사귐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홀로 있음 속에 있는 인간은 외로운 사람들 사이의 사귐의 참된 토대인 궁극적인 것의 차원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114)

 

외로움과 홀로 있음은 다른 것입니다. 외로움은 지양하고 싶은 것이지만, 홀로 있음은 지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외로움은 영어로는 aloneness이고 홀로 있음은 solitude입니다.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과 참된 사귐을 가질 수 있다고 틸리히는 주장합니다. 

 

다시 정리하면 고난의 원인은 외로움인데요. 외로움의 극복은 타인과의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홀로 있음을 통해서 외로움은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외로움을 극복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과 참된 사귐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홀로 있음 없이 타인과의 연합을 통해 외로움을 극복하려고 하면 오히려 고난이 증폭됩니다. 외로운 사람들끼리 모여봐야 서로 외로움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서로에게 더 상처가 될 뿐입니다. 따라서 섣부르게 다른 사람과 사귀다가 생기는 고난을 줄이려면 오히려 타인을 멀리 해야 합니다. 마치 머리 깎고 속세를 떠나는 스님들처럼 말이죠. 우리는 스님들 보면서 저렇게 속세를 떠나서 산속 깊은 곳에 있는 절에 살면 얼마나 힘들까 하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분들은 고난을 줄이기 위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홀로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웃게 만들 수 있다."

 

외로움을 극복하면 고난도 극복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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