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폴 틸리히: 그리스도론

[틸리히조직신학3_123-124] 31. '저주'라는 상징

설왕은31 2021. 10. 20.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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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저주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말을 하기도 합니다. 저주는 사람한테 받을 수도 있지만 절망에 상태에 빠져서 자신이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신의 저주'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영원한 저주'에 대해서 말합니다. 영원한 저주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신의 저주이겠지요. 하지만 틸리히는 영원한 저주라는 말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말이라고 지적합니다. 영원과 저주는 서로 반대말이라는 것이지요. 

 

인간의 시간은 그 자신과 함께 끝난다. 따라서 우리는 '영원한 저주'라는 용어를 신학적인 어휘에서 삭제해야만 한다. 그 대신에 우리는 저주를 영원으로부터의 배제의 의미로 말해야 한다.  (124)

 

영원은 신에게 속한 단어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영원하지 않습니다. 틸리히는 인간이 유한성을 받아들여야 소외를 심화시키지 않게 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합니다. 인간이 신의 무한성과 연결될 수는 있지만 인간 자체는 유한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인간의 유한한 시간과 육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틸리히는 그것을 용기라고 말하고 있고요. 저주는 영원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영원한 저주라는 말은 일단 영원히 존재해야 받을 수 있는 것인데 영원히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저주가 아닌 것입니다. 틸리히는 어렵게 말을 하고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영원한 저주는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저주를 내리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됩니다. 

 

시간에 있어서나, 영원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이 심지어 분리의 상태 속에서도 우리 가운데서 창조적으로 활동하고 계신다고 말해야만 한다. 심지어 그의 창조성이 파괴의 방식을 취할지라도 인간은 결코 존재의 근거로부터 단절되어 있지 않다. 심지어 저주의 상태 속에서도 인간은 존재의 근거로부터 단절되어 있지 않다. (124)

 

어떤 사람은 저주를 받아 마땅한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나쁜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나쁜 세상에서는 나쁜 사람이 나타나기 쉽습니다. 악한 구조 속에서 선한 사람이 나타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사회 구조가 매우 선하다면 악한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요? 틸리히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단 완벽하게 선한 사회 구조를 만들기도 어렵지만, 완전히 선한 사회 구조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서 그 선한 구조를 이용해서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다 흐려놓듯이 선한 사회 구조 자체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악한 인간도 존재의 근거로부터 단절되어 있지 않다고 틸리히는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영원한 저주--영원한 저주보다는 신의 끝없는 저주라는 말이 좀 더 적당하겠네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지도 않으시고 끝없는 저주를 내리지도 않는다면 사람들이 타락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사람들이 막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을까, 하고 두려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물론 벌이나 심판이 없다면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도와주는 것이 벌이나 심판을 피하기 위한 행동입니까? 저는 이러한 편견이 사람에 대한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심어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가지려고 하는 일부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벌 받을 것이 무서워서 선을 행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일부 있을 수도 있지만 사람이 그런 존재라고 일반화시키는 것은 매우 심한 편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틸리히도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저주라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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