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히는 자기 구원의 방법들과 그 실패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서론이 엄청 길었는데 드디어 이제 본론이 나오기 시작하려고 합니다. 조직신학 세 번째 책이 그리스도론인데 이제야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틸리히는 자기 구원의 방법들을 소개하고 그 방법들이 모조리 실패했다고 서술합니다. 첫 번째가 종교입니다. 종교가 자기 구원에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시작하죠.
존재가 행위를 선행한다는 원리는 종교사가 인간의 자기 구원의 시도와 실패의 역사인 한에서 종교사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함축한다. (127)
종교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서 구원을 받으려고 시도하지만, 사실은 존재가 행위를 선행한다는 원리를 잘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들이 종교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이미 구원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행위를 실천한다는 말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신앙을 따라서 종교를 가지는 사람이 아니라면 종교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이미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고 존재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틸리히는 종교가 인간 구원에 실패했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그리스도교도 종교인데 무슨 말이냐라고 물어볼 수 있는데, 틸리히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라고 할 수 있는데, 틸리히는 그와 같은 행위를 그리스도교라는 종교 테두리 안에 가둘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그럼 예수는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틸리히에 따르면, 간단히 말해서 예수는 힘입니다. 이것도 완벽한 설명이 될 수 없기는 한데, 종교라기보다는 힘 (power or force)입니다.
종교는 본질적인 존재와 실존적인 존재 사이의 분열에 맞서서 새로운 존재에 대한 탐구가 나타나는 영역이다. 구원의 물음은 구원이 이미 작용하고 있는 곳에서만 질문할 수 있다. (127)
틸리히는 실존 상태는 소외라고 정확히 꼭 집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 방식이 소외 상태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상태는 바람직한 상태는 아닙니다. 그래서 본질과 실존의 분열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실존하기 위해서 소외 상태로 태어났지만 그 상태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실존 상태를 벗어나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취하는 대표적인 방법 중에 하나가 자기 중심성의 강화입니다. 틸리히가 소외의 표지라고 말하는 불신앙, 자기 높임, 끝없는 욕구는 소외의 표지이기도 하고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합니다. 불신앙은 그 자체가 소외 상태의 부정이라고 할 수 있고요. 자기 높임이나 끝없는 욕구는 소외 상태를 벗어나 주변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과 결합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걸로는 소외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존재'가 필요하다고 자각하게 되면 그 순간에 종교나 그와 비슷한 것을 찾기 시작하게 되죠. 종교는 그 '새로운 존재'에 대한 탐구를 실행하는 곳이라고 틸리히는 말합니다.
종교를 자기 구원의 시도와 동일시하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종교와 계시를 동일시하는 것도 잘못이다. 종교는 모든 생명처럼 모호한 것이다. 계시적인 경험의 토대 위에서 종교는 자기 구원으로 변한다. 종교는 그것이 받아들인 것을 왜곡시키고 이것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한다. 이것이 종교의 비극이다. (128)
종교에 속하거나 종교를 믿으면 계시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도를 하다가 또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가능하고, 아니면 어떤 특별한 상황을 통해서도 계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계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틸리히는 이것을 계시적인 경험의 토대 위에서 종교가 자기 구원으로 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구원을 받아서 완성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틸리히의 견해입니다. 물론 계시는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틸리히는 그것을 구원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즉 기독교라는 종교를 갖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종교는 모호한 것인데 그것으로 자기 구원의 확신을 삼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종교인이 있을 수 있죠.
종교와 자기 구원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면 종교적 행동은 열심히 하는 신실한 종교인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구원과는 거리가 먼 상태이면서 구원을 이미 성취한 것으로 착각하게 되니까 구원을 위한 노력이나 행동을 멈추게 되는 것이죠. 종교 행위나 종교 행사 참여가 구원이 아니라면 구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볼 수 있는데요. 틸리히에게는 대답이 간단하죠. 소외의 극복입니다. 어떤 사람이 종교를 통해서 자기 높임이나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과 같은 자기 중심성을 강화한다면 틸리히의 관점에서 그 사람은 구원과는 거기라 먼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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