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히는 자기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래서 종교, 율법주의, 금욕에 이어서 이번에는 신비주의와 구원에 대해서 다룹니다. 틸리히는 종교, 율법, 금욕, 신비주의에 대해서 모두 기본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종교가 모호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존재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좋고, 율법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설명이자 요구라는 점에서 선한 것이며, 금욕도 지나친 탐욕보다는 훨씬 더 바람직한 것입니다. 신비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비주의는 신의 현존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경험이고 황홀한 경험입니다. 하나님을 느낀다는 것은 신을 믿는 사람이 가장 원하는 체험이기도 합니다. 신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을 부인하는 종교라면 도덕 체계에 불과할 뿐이죠. 그런 것을 종교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종교에는 신비주의 요소가 꼭 들어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틸리히는 신의 현존을 느끼는 것과 자기 구원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신비주의, 즉 하나님의 현존의 느낌은 종교의 본질에 있어서 본질적인 범주이며 자기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132)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틸리히는 소외의 극복이 구원이라고 말하는데요. 소외의 극복은 곧 무한한 궁극자와 재결합함으로써 가능한 일입니다. 신의 현존을 느낀다는 것은 곧 궁극적인 무한자와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틸리히는 어떤 문제를 지적하고 싶은 것일까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신의 현존을 느끼는 것과 신과 재결합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불에 가까이 있으면 불의 현존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이 불과 결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신의 현존을 느끼는 것과 신과 재결합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의 현존을 느끼는 것이 신과 재결합하는 것과 다른 것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신과 재결합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구별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틸리히가 여기서 비판하고 있는 것은 신비주의는 인간의 유한성을 초월해서 신의 현존을 느끼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니까 신의 현존을 느끼는 것 자체보다는 인간의 유한성을 벗어나서 신을 느끼려는 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의 신비주의는 전부는 아니지만 대개 자기 구원의 시도, 즉 유한한 존재를 무한자와 결합시키기 위해서 유한한 존재의 모든 영역들을 초월하려고 애쓰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자기 구원의 다른 시도들처럼 실패한다. 신비주의자와 하나님 사이의 참된 연합은 결코 도달되지 않는다. 설령 도달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상적인 실존의 소외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황홀경의 순간 뒤에는 오랫동안 '영혼의 목마름'이 계속된다.
인간의 유한성을 벗어나서 하나님을 느끼려는 시도는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일상에서 발생하는 소외라는 실존을 극복하는 데 실패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영혼의 목마름을 느끼게 되겠죠. 즉 확실하게 유한성 안에서 하나님과 재결합을 시도해야지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느끼려는 시도를 한다면 신비 체험으로 인해서 오히려 실존적 삶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오히려 소외를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신비주의는 황홀경의 마지막 단계에서 자기 구원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모든 준비에도 불구하고 궁극자와의 황홀한 재결합은 이 마지막 단계에서는 강제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이것은 주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132-133)
틸리히가 계속 말하는 것 중에 하나가 구원은 자기 힘으로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나온 말로 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죠. 하나님을 느끼려고 하는 신비 체험 시도는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성공했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실패했다고 낙심할 것도 없는 것이 이것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이 정말 묘한 지점이기는 합니다. 그러면 신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냥 가만있어야 할까요? 이것은 정적주의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죠.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을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면 그래도 도움이 좀 될까요? 감리교는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비주의는 매력이 있습니다. 신비 체험은 신기하고 황홀한 경험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런 경험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비 체험이 자기 구원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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