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소외 상태에 놓여 있고 이러한 상태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본능적으로 인간은 소외를 극복하려고 시도합니다. 인간의 곤경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극복의 노력도 보편적으로 나타난다고 틸리히는 말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존재에 대한 탐구입니다. 틸리히는 탐구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비역사적인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인 유형입니다. 달리 말하면 첫 번째 유형은 새로운 존재는 역사 속에서 절대 발생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유형이고 두 번째 유형은 새로운 존재가 역사 속에서 발생했거나 혹은 발생할 것이라고 믿는 유형입니다. 틸리히는 동양에서는 주로 비역사적인 유형으로, 서양에서는 주로 역사적인 유형으로 새로운 존재를 탐구했다고 설명합니다.
새로운 존재란 유한성의 한계 내에서 인간의 곤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많은 방식으로 나타나는 신적인 힘을 의미한다. (138)
틸리히는 다신론 종교, 브라만, 불교에서는 비역사적인 유형으로 새로운 존재를 탐구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종교에서는 새로운 존재는 역사 속에서 발생하지 않고 역사 바깥에서 신의 현현으로 나타나거나 특정한 개인의 영적 고양으로 인한 신비 체험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존재는 늘 역사의 바깥에 있고 몇몇 사람이 그 존재와 접촉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신적인 현현이 집단에게는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와 접촉하고 그로 인해 영향을 받는 존재는 개인으로 국한됩니다. 이러한 주장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의 실존 상태는 새로운 존재에 의해서 부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에서는 소외라는 실존 상태는 절대로 극복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존재를 위해서 지불하는 대가가 존재를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부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138)
이와는 반대로 새로운 존재가 역사 속에서 발생했거나 혹은 발생할 것이라고 믿는 종교가 있습니다.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가 그에 해당하는 종교입니다. 새로운 존재가 역사 속에서 발생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곧 현실을 선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존재는 수직적인 방향보다는 압도적으로 수평적인 방향에서 기대된다. 현실 전체는 본질적으로 선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긍정된다. 현실의 본질적인 선은 그의 실존적인 소외에 의해서 무효화되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존재의 기대는 변형된 현실에 대한 기대이다. (139)
역사 속에서 새로운 존재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 자체에 대한 긍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존재의 비역사적인 탐구 유형과는 다르게 역사적 탐구 종교는 새로운 존재에 대한 담지자가 개인이 아닌 집단입니다. 개인이 새로운 존재와 관계를 맺는 것은 집단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틸리히는 지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매우 모호한 말이지만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존재로서 예수를 지목합니다. 예수는 역사 속에서 태어나고 살다가 죽은, 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새로운 존재로 받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존재로서 교회 공동체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새로운 존재의 담지자이고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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