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히는 종교, 금욕, 신비 체험, 율법을 통해서 자기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례전, 교리, 감정을 통해서도 자기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먼저 성례전부터 살펴봅시다. 로마 가톨릭이 성례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교파별로 성례전의 종류가 다른데 로마 가톨릭은 성례전으로 부르는 것이 일곱 개가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세례와 성찬식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고해성사도 일종의 성례전입니다. 성례전에 참여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널리 퍼져 있습니다. 특별히 세례가 그렇습니다. 죽기 전에 꼭 세례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성례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톨릭에서 성례전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개신교에서도 성례전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성례전 자체보다는 성경 말씀에 대한 순종을 더 강조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자기 구원의 펠라기우스적인 요소가 제거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모두에 있어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 전통적인 정통주의는 일종의 "순수한 교리의 성례전주의"를 확립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복종"이라는 이름 하에 성서의 문자에 대한 복종이 요구되었다. (134)
개신교에서는 성례전을 통해서 구원이 불가능하다고 인지하고, 성례전을 통해서 구원을 베풀려는 시도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에 교리를 지킴으로써 구원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틸리히는 성례전이나 교리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실행해야만 하는 것을 실행했는지 안 했는지 또한 우리가 올바른 형식의 태도로 실행했는지의 불안한 의문은 성례전적인 행위의 신적인 근원과의 재결합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례전적인 자기 구원은 고도의 변증법적인 개념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불가능성이기도 하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과의 재결합을 가져올 수 없다. (135)
아무래도 성례전은 형식에 집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형식에 집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도 분명히 있지만 여기서 생기는 불안한 의문은 신과 제대로 재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틸리히는 지적합니다. 형식을 통해서 신과 재결합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완벽한 형식을 갖추어서 성례전을 참여함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사람의 마음이 몸과 행동에 의해서 완전히 조정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물론 구원은 마음뿐만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고려해야 하니까 더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종교 행위는 더 지키기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더 많은 성례전이 필요합니다.
루터파 개신교에서는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표현이 교리가 자기 구원의 도구로 왜곡된 것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 궁극자에 의해서 사로잡혀 있는 상태로서의 믿음이 왜곡되어 교리를 믿는 신앙이 되었다. (135)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이것 역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면 구원의 주체가 마치 자기 자신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올바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틀리면서도 나쁜 이해는 교리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매우 흔합니다. 그 교리를 알고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교리를 믿어야 한다고 강요할 때도 많습니다. 이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틸리히는 종교의 핵심이 하나님과 만남으로써 재결합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구원이죠.
마지막으로 틸리히가 지적하는 자기 구원의 잘못된 방법 중 하나가 감정을 통한 구원입니다. 경건주의와 신앙 부흥운동에서 흔히 하는 시도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거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구원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경건주의와 신앙 부흥운동은 마음을 데우기 위한 시도를 하죠. 감동적이거나 잔인한 비유나 예화,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강조 등은 감정을 자극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부흥회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설교입니다. 부흥회에서 경험하는 구원의 감정은 금방 사그라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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