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히는 구원을 위해 실천하는 금욕주의의 방법들에 대해서 비판합니다. 금욕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지적하는 것이죠. 틸리히는 금욕에 대해서는 긍정의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나친 금욕, 달리 말하면 금욕주의가 문제인 것이죠. 틸리히가 말하는 소외의 세 가지 표지는 불신앙, 자기 높임, 그리고 지나친 욕구입니다. 금욕은 욕구를 억제하는 것인데요. 인간이 가지는 무한대의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큰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따라서 적절한 금욕은 당연히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틸리히의 생각은 다음 두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과정들의 한 요소로서의 금욕주의는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자기 구원의 시도로서의 금욕주의는 위험한 왜곡이며 실패이다. (131)
인간의 실존 상태인 소외를 금욕을 통해서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틸리히는 율법주의와 신비주의 사이에 금욕주의가 있다가 밝히고 있는데 제가 볼 떄는 금욕주의는 일종의 신비주의인 것 같습니다. 신비 체험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금욕을 통해서 신비 체험을 하신 분들의 이야기는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처럼 40일 금식 이후에 신비 체험을 하신 분들 이야기는 저도 몇 번 전해들었습니다. 금욕 자체를 통해서 뭔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금욕을 통해서 무한자와 결합하려고 하는 것이죠.
자기 구원의 금욕적인 방법들은 이 방법들이 자기 부정의 의식적인 행위들에 의해서 무한자와의 재결합을 강제로 시도하는 한 실패한다... 이들은 여전히 억압의 형태 속에서 현재한다... 중세의 예술과 문학에 따르면 악마는 중세의 금욕가들 속에서 가장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확실히 금욕주의는 일종의 되치기를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시도입니다. 욕구를 억제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정말 필요한 일입니다. 특별히 육체의 욕구를 억제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식욕을 억제하지 못하면 과도하게 살이 찔 수 있고 성욕을 조절하지 못하면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미각의 만족을 위해서 지나치게 맛있는 것을 탐하는 것도 문제가 되고 정신적인 쾌락을 추구하면 마약에 손을 댈 수도 있죠. 당연히 욕구는 조절하고 억제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틸리히가 지적한 것과 같이 욕구를 억제하는 것을 통해서 무한자와 결합하려는 시도는 위험한 시도입니다. 자신의 육체적인 욕구를 극도로 억제함으로써 신과 결합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그 생각은 인간의 육체가 악한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도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하나님이 사람을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악한 것을 주신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겠죠.
존재론적인 금욕주의라고 불리우는 금욕주의의 주요 형태는 유한한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인 평가절하에 근거한다...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유한한 실재에 대한 완전한 부정을 통해서만, 즉 맞부딪친 세계의 다양한 내용들을 지닌 자신의 자아를 텅비움으로써만 도달된다. (131)
금욕주의의 문제는 금욕을 통해서 소외를 극복하려는 허황된 시도를 하는 것인데, 틸리히는 이것이 유한한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인 평가절하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달리 말하면 유한성을 지닌 인간의 육체에 대한 천대인 것이죠. 육체를 천대한다고 해서 재결합을 통한 소외 극복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즉 구원은 금욕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틸리히는 주장합니다. 금욕을 통해서 무한자와 결합이 일어나도 문제이고 일어나지 않아도 문제입니다. 만약 금욕을 통해 무한자와 결합한다면 인간은 수시로 금욕을 실천해야 할 텐데 그렇다면 육체를 천대하게 되겠죠. 그래도 이 경우는 욕구를 억제한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해소될 수는 있습니다.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신비 체험을 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금욕을 했는데도 무한자와 결합하는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억제된 욕구는 사라지지 않고 스트레스는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억제된 욕구는 괴물이 되어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틸리히가 악마는 중세의 금욕가들 속에서 가장 확실하게 나타났다고 말하는데 생각해보면 그럴 것도 같습니다. 지나친 금욕 또는 금욕을 통한 구원 시도는 위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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