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폴 틸리히: 그리스도론

[틸리히조직신학3_225-232] 61. 현대 그리스도론의 과제

설왕은31 2022. 3. 18.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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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히가 말하는 현대 그리스도론의 과제는 예수에 대한 이론인 두 본성론을 제거하고 새로운 이론을 세우는 것입니다. 틸리히가 과제라고 말한 이유는 아직 자신도 풀지 못한 숙제이고 해야할 일이기는 하나 과연 이 작업이 가능할 것인지 의문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예수의 두 본성론, 즉 예수는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이론은 칼케돈 공의회(451) 이후 적어도 1500년 정도 지속되어 온 이론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루 아침에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주 정교하고 그럴 듯한 이론을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1000년 이상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던 것을 빼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의 두 본성 이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어제오늘일은 아닙니다. 개신교 신학에서도 이 부분을 인식했지만 16-17세기에 형성된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은 별다른 개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좀 불합리한 부분이 있지만 그대로 놔둔 것이죠. 이것을 바꾸는 것은 큰 작업인데 그런 큰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낼 힘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픈 부위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수술을 할 능력이 없어서 그냥 참기로 한 거죠. 그런데 18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용감하게도 수술을 하기로 마음먹고 칼을 댔습니다. 일단 그 용기는 인정해 주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자유주의 신학은 수술을 잘못했습니다. 수술을 한 이후에 더 아프게 되었습니다. 

 

기독론의 문제를 두 본성 이론의 견지에서 해결하려는 모든 시도는 불가피하게 모순과 부조리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자유주의 신학이 역사 비판적 탐구를 통해서 보여준 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공로였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 자체는 조직신학적인 면에서 볼 때 기독론에 많은 공헌을 하지 않았다.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는 예수에 의해서 선포된 복음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 그리스도 예수 사건 속에서 그리스도성을 제거해 버렸다. (틸리히 조직신학III, 225)

 

예수의 두 본성 이론에서 예수의 신성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그리스도론을 합리적으로 만들기는 했는데 오히려 예수에 대한 오해를 가중시켰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 이후로 다시 정통주의 신학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예수를 보통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틸리히는 예수를 새로운 존재로 이해하기 때문에 이러한 자유주의의 그리스도론은 예수에 대한 잘못된 이론이라고 비판합니다. 예수가 새로운 존재가 아닌 다른 인간과 똑같은 인간이라면 소외라는 인간의 실존 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고 틸리히는 주장합니다. 그래서 현대 그리스도론은 예수에 대한 두 본성 이론을 제거하고 그것을 대체할 만한 다른 이론을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틸리히가 예수의 두 본성 이론을 거부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인성과 신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인성이란 말은 모호하고 신성은 알아낼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틸리히가 내세우는 인간의 본성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유한한 자유, 둘째, 존재가능의 존재라는 것, 셋째, 삶에는 비극적인 모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인성'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마땅히 폐지하고 이것을 그의 생명의 역동성에 대한 기술로 대체해야만 한다. (틸리히 조직신학III, 227)

 

그래서 틸리히는 인성이라는 말을 제거하고 그 대신에 '삶의 역동성'이라는 말을 쓰자고 합니다. 제가 볼 때는 '인성'이나 '삶의 역동성'이라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기는 합니다. 여하튼 틸리히 주장의 요점은 인성이라는 단어가 너무 모호하니 좀 더 구체적인 용어를 쓰자는 것인데 저는 이 주장에는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신성이라는 단어는 어떨까요? 그것은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단어라고 틸리히는 주장합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본성은 본질을 의미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실존으로부터 분리된 어떠한 본질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본질과 실존을 초월해 계신다... 하나님이 모든 본질을 초월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틸리히 조직신학III, 228)

 

틸리히의 말은 하나님은 본질이 없다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 과연 신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 자체가 무리한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사과를 생각해 봅시다. 사과의 본성은 무엇일까요? 모호합니다. 사과의 본성이 무엇인지 파악하기란 쉽지 않고 파악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마다 주장이 다를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먹는 사과에 대해서도 그 본질을 집어내는 것이 어려운데 신의 본성을 이해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하게 거창한 꿈입니다. 그렇다면 신성 대신에 어떤 단어를 써야 할까요? 틸리히는 신성 대신에 '영원한 신-인 통일성'eternal God-man unity이라는 말을 쓰자고 주장합니다. 신성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예수를 통해 신과 인간이 통일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가 신성과 인성의 인격적인 통일이라는 주장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영원한 통일이 역사적인 실재가 되었다는 주장에 의해서 대체되어야만 한다... 두 개의 나무토막처럼 서로 나란히 놓여 있어서 그들의 통일성이 결코 이해될 수 없었던 '두 본성'의 개념을 제거함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의 역동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관계적인 개념들에 접근할 수 있다. (틸리히 조직신학III, 228-229)

 

정리하면 틸리히는 예수의 두 본성 이론을 대체하는 것이 현대 그리스도론의 과제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두 본성 이론을 없애버리자고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성은 '생명의 역동성'이라는 말로, '신성'은 예수가 보여준 '영원한 신-인 통일성'으로 바꾸자고 제안합니다. 결국 두 본성 이론을 없애고 대신에 예수가 경험하고 드러낸 신과 인간의 완전한 연합에 주목하자는 말입니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신학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그럴 듯하게 서술하지 말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놔두고 아는 것을 좀 더 정확하게 진술하자고 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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