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가 가진 가장 큰 난제는 예수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데 부족함이 있습니다. 예수는 깔끔하게 설명이 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틸리히는 예수의 그리스도성과 예수의 예수성이 서로 역설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신성과 예수의 인성이 충돌하는 것 같은데 어느 한쪽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한쪽을 포기하면 좋은데 한쪽을 포기하면 예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그리스도성과 예수의 예수성을 모두 다 살려 놓으면 모순이 되는 것 같습니다. 무조건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리스도교는 주로 신성을 살리는 것을 택했습니다. 틸리히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충돌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론은 항상 깊이 갈라진 두 골짜기 사이의 능선 위를 걸어가야만 한다. 그리고 기독론은, 이것은 그의 나타남 속에서도 여전히 신비인 하나님의 신비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완전히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220)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타나시우스가 주도한 니케아 공의회(325)에서 만들어 낸 단어가 바로 동일본질(homo-ousios)입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는 본질이 같다는 말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 본질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완전히 같은 존재도 아니고 완전히 다른 존재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본질은 같다는 말인데 이 설명도 완전히 수긍할 수 있는 설명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완전히 같은 존재라면 시벨리우스의 이단에 빠지게 되고 예수님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다고 한다면 아리우스의 이단에 빠지게 됩니다. 아리우스는 동일 본질이라는 단어를 거부하면서 유사 본질(homoiousios)이라는 말로 예수를 설명하는 데 이단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삼위일체론은 형이상학적 이론인 것 같지만 사실은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이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담아내기 위한 교리인데 논리적으로는 깔끔하게 풀어낼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 상징들이란 만일 그들이 두 가지 경험적인 뿌리들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경험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존재의 경험으로부터 분리된다면 공허하게 된다는 것이다. (222)
삼위일체 이론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서 모두 긍정해야 하는데 그것을 잘 풀어낼 말이 없어서 말로 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말을 안 할 수도 없어서 만들어 낸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죠?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에 있어서 세 개의 위격들 사이의 구별이 아무런 내용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과 이것들은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침묵한 채로 있지 않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터도 삼위일체와 같은 말은 생소하고도 거의 우스꽝스러운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이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222)
니케아 공의회는 예수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 다르게 말하면 신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반신적인 존재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그리스도교를 구해냈습니다.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의 이런 결정은 예수를 신으로만 인식하는 단성론적인 이해로 기울 수 있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예수성을 상실할 수 있는 여지가 발생한 것이죠. 이에 대해서 보완을 한 것이 바로 칼케돈 공의회(451)입니다.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예수가 완전한 신성과 더불어 완전한 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못 박아서 발표했습니다.
칼케돈 신조의 권위는 너무나도 확고하게 확립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칼케돈의 정신은 너무도 많이 서방 교회의 경건의 기본적인 경향과 일치했기 때문에 더 이상 흔들릴 수 없었다. (224)
이렇게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 주장은 모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라는 것은 서로 충돌합니다. 이와 같은 설명은 예수에 대한 제자들과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담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완전한 논리적 정합성을 제시하는 데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언어가 가진 한계이기도 할 것입니다. 예수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서 세상에 나타났지만 인간이 그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죠. 그래서 삼위일체론이나 양성론과 같은 단어로 예수를 설명하지만 예수의 그리스도성과 예수성을 동시에 담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도 이런 말이 없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에 부족한 단어이지만 이 단어들로 설명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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