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틸리히는 그리스도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구원의 의미를 다룹니다. 구원은 참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대별로 또한 종파별로 구원에 대해서 다르게 이해합니다. 예를 들어 구원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 교회에서 구원은 죽음과 오류로부터의 구원이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구원은 죄책으로부터의 그리고 이생과 저생에서의 그의 결과로부터의 구원이었다. 개신교 정통주의에서 구원은 율법으로부터의 그리고 율법의 불안을 생산하는 힘과 저주하는 힘으로부터의 구원이었다. 경건주의와 신앙부흥운동에서 구원은 회개를 통한 불신 상태의 극복과 회개한 사람들의 변화였다. 금욕적이며 자유주의적인 개신교에서 구원은 특별한 죄들의 극복과 도덕적 완전을 향한 진보였다. (틸리히 조직신학 III, 254)
구원이라는 말 자체는 좋지 않은 상황이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 또는 벗어나도록 도움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다양한 이해가 각각 다르더라도 그 의미상 크게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구원이란 "궁극적인 부정성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한다고 정리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현재 상태나 처한 상황이 어떤지 그 이해에 따라서 구원의 의미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원래 이렇게 단어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을 때에는 성서에 나온 구원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원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은 salvus에서 나온 말로 '고침을 받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었다고 틸리히는 지적합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구원을 치유로 해석하자고 제안합니다.
이런 점에서 치유는 소외된 것과 재결합하는 것, 분열된 것에 중심을 주는 것,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그의 세계, 인간과 그 자신 사이의 분열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의 이런 해석에서 새로운 존재의 개념이 생겨났다. 구원은 옛 존재로부터의 회개와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이다. (틸리히 조직신학 III, 254)
틸리히는 치유의 개념을 소외라는 인간 실존 상태에 적용합니다. 소외를 벗어나는 것이 바로 치유이고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완전한 구원을 기대한다거나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에게는 완전한 소외 극복이 일어나기 어렵고 완전한 소외 극복이 가능하더라도 그 상태로 계속 지속될 수 없습니다. 구원은 계속 추구해야 하는 것이고 완성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틸리히는 구원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놓습니다. 예수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틸리히는 독특하게 계시는 정보가 아니라 힘이라고 주장합니다.
계시는 신적인 사물들에 대한 정보가 아니다. 계시는 사건들, 인격들, 사물들에 존재의 근거가 탈아적으로 나타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나타남은 뒤흔들고 변화시키고 치유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인류의 생명은 항상 이러한 치유의 힘들에 항상 의존한다. 이 힘들은 실존의 자기 파괴적인 구조들이 인류를 완전한 멸절로 빠뜨리지 못하도록 막아준다. (틸리히 조직신학 III, 255)
예수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로서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힘을 행사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치유하는 힘에 참여하게 되고 이런 식으로 구원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구원은 믿는 사람들이 예수와 관계 맺음을 통해서 그로부터 힘을 받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구원의 완성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는 관계를 통한 소외를 극복하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틸리히는 비성서적인 교회론적 구원관을 비판합니다.
비성서적인 교회론적인 구원관은, 구원은 전적으로 존재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라는 신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틸리히 조직신학 III, 256)
구원을 받았든지 그렇지 않았든지 둘 중의 하나로 생각하는 이분법적 구원관은 비성서적인 구원관이라고 틸리히는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이런 의미입니다. 교회에서는 성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날마다 성서를 읽으라고 권하고 예배 때마다 성서의 내용을 설교로 듣는데 비성서적인 구원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모순인 것 같은데 이것이 현실이죠. 왜 그러는 걸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구원을 너무 쉽고 단순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심각하게 생각하고 묵상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구원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질문을 그냥 쉽게 답하고 넘어가 버리죠. 구원을 도움이라고 이해한다면 내가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정교한 대답이 필요합니다. 일단 나의 상태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상태를 알아야 그다음에 구원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정의를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일괄 적용할 수 없는데 교회에서는 그렇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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