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폴 틸리히: 그리스도론

[틸리히조직신학3_260-265] 68. 속죄론의 유형들

설왕은31 2022. 5. 18.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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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는 영어 atonement를 번역한 말입니다. 물론 atone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자신이 잘못한 일에 대해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속죄'의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atone이라는 단어를 잘 보면 이 단어는 at one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atone은 하나가 되다, 화해하다, 또는 조화를 이루다의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속죄'는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거나 그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돌이키는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속죄는 돈으로 할 수도 있고, 노동으로 할 수도 있고, 선한 일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속죄라고 하죠. 그런 의미에서 atonement를 속죄라고 번역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atonement는 화해나 하나 되기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한 의미입니다. 

 

속죄론은 예수와 관련된 이론입니다. 속죄가 예수와 관련을 맺을 때 속죄라는 단어가 이미 예수의 죽음을 죄로 인한 결과로 암시하고 있다는 데서 이 '속죄론'이라는 단어는 되도록 삼가야 하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서 죄는 예수의 죄가 아니라 인류의 죄, 또는 다른 인간들의 죄를 의미합니다. 예수의 죽음이 인류가 죄를 지어서 그에 대한 형벌로 발생한 것이라는 이론도 하나의 주장입니다. 속죄론이라는 단어 때문에 너무 한쪽으로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속죄론이라는 번역은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틸리히는 속죄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속죄론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가 소외의 상태 속에서 새 존재에 의해서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끼친 효과에 대한 기술이다. (틸리히, 조직신학 III, 260)

 

말이 어려운데 속죄론은 예수가 그리스도인에게 끼친 효과에 대한 이론이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속죄론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그리스도인에게 미치는 효과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론입니다. 속죄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객관적 속죄론이고 다른 하나는 주관적 속죄론입니다. 틸리히는 항상 두 가지가 같이 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속죄는 항상 신적인 행위인 동시에 인간적인 응답"이라고 말합니다. 

 

객관적 속죄론의 대표는 오리게네스가 주장한 속죄론입니다. 인간은 죄를 짓고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었고,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죄로 인해서 사탄에게 넘겨졌는데,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과 사탄과 예수 사이에 일어난 거래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가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죽은 것이고 그로 인해서 인간이 사탄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객관적 속죄론은 인간의 반응과 상관이 없습니다. 어차피 이 거래는 하나님과 사탄과 예수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고 인간은 단지 지켜보거나 또는 그 사실에 대해서 듣거나 하는 것이지 이 거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개입 없이 거래가 종료된 것입니다. 나중에 아울렌이 '승리자 그리스도'라는 표제 아래서 오리게네스의 주장과 비슷한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틸리히는 객관적 속죄론은 중요한 측면을 놓치고 있다고 주장하죠. 

 

기독교의 메시지는 이런 악마의 공포로부터의 해방의 메시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속죄의 과정은 해방의 과정이다. 그러나 파괴적이며 형벌적인 힘의 공포로부터의 해방은 어떤 것이 객관적으로 뿐만 아니라 주관적으로도 발생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틸리히, 조직신학 III, 262-263)

 

객관적 속죄론이 있다면 그 반대로 주관적 속죄론이 있습니다. 대표로 들 수 있는 예가 아벨라르의 속죄론입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아벨라르는 그것이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자기 포기적인 사랑의 인상"을 준다고 주장합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반응을 이끌어낸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어떤 형벌이었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그 고통을 짐작해 본 사람이라면 덤덤하게 그 사건을 접할 수 없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런 일을 당했다고 해도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라고 생각할 텐데, 예수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게다가 나를 포함한 인류를 위해 그런 고통을 당했다고 한다면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인간의 죄로 인해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더 크게 각성하게 됩니다. 

 

객관적 속죄론과 주관론 속죄론 중 어느 하나만 강조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틸리히는 두 가지 측면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요. 그러면서 안셀무스의 속죄론을 언급합니다. 안셀무스의 속죄론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속죄론이었습니다. 틸리히는 안셀무스의 속죄론이 객관적 속죄론에 속하지만 주관적 속죄론의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중간 형태의 속죄론이라고 평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분노와 하나님의 사랑 사이의 긴장에서 출발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정의의 요구를 침해하는 것 없이 자비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무한한 가치는 하나님에게 만족을 주었고, 그의 죄의 무한한 무게 때문에 인간을 처벌하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틸리히, 조직신학 III, 263-264)

 

안셀무스의 속죄론을 만족설이라고도 합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안셀무스의 만족설은 자신이 받아들여질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만족시켰기 때문에 자신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자신의 죄에 대한 무거운 책임과 예수의 대리적인 고난과 죽음이라는 사실을 모두 받아들이는 효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틸리히는 객관적 속죄론과 주관적 속죄론 둘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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