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신학

[책] 조르조 아감벤 | 얼굴 없는 인간 | 더 근본적인 거대한 변화가 필요하다

설왕은31 2021. 9. 1.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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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아감벤은 1942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난 우리 시대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호모 사케르"라는 책으로 유명해졌고 그 외에도 여러 책과 글을 통해서 이슈를 던지기도 하고 참신한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얼굴 없는 인간"은 코로나19 시대를 살면서 아감벤이 느끼고 생각한 바를 짧게 서술한 글을 모아 놓은 책입니다. 이 책이 여러 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고 하는데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해서 기뻤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거의 전 세계적으로 국가는 강력한 통제를 통해서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아서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통제가 이루어졌고 사람들은 그 통제에 따라야 했고 그 통제에 따르지 않은 사람은 처벌을 받거나 벌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했습니다. 대부분은 사람은 이와 같은 자유 침해는 일시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고 참았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코로나19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거나 또는 그와 같은 바이러스가 또다시 나타난다면 국가는 다시 이와 같은 강력한 통제를 실시할 것입니다. 학자들은 지구의 기후 변화나 생태계의 변화 때문에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가 조만간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고 우리는 코로나 이전과 같은 세상에서 살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통제를 더 강화할 수 있고 이것은 일시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통제에 순수히 따라야 하는 것일까요?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생명'과 '가치 있는 생명'을 구분합니다. 이 구분을 기반으로 이 책은 지어진 것입니다. 그리스어로 '생명'은 '조에'이고 '가치 있는 생명'은 '비오스'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 둘을 구분했다고 말합니다. '호모 사케르' 즉 '벌거벗은 인간'은 비오스의 생명을 가지지 못하고 조에라는 생명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생명만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일 뿐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 못하는 사람을 호모 사케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아감벤은 코로나19로 인한 국가의 통제는 모든 사람을 호모 사케르로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다고 경고합니다. 가치 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목숨만 붙어 있는 생명을 누리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망자들, '우리의 희생자들'은 장례를 치를 자격이 없어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 또한 어떻게 처리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우리의 이웃은 지워졌다. 그런데도 교회에서 이러한 상황에 침묵하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얼마나 지속할지 모른 채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져만 가는 나라에서 앞으로 인간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생존 외에 다른 인류의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란 어떤 것일까? (47)

 

 

아감벤이 교회는 왜 가만있냐고 질타하는 이유는 기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의 생존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살아 있기 때문에 존엄한 것이 아닌데 마치 삶 자체가 최고의 존엄인 것처럼 그 목적을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은 허용될 수 있다는 식의 태도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이 글에서 나는 개인이 가져야 할 책임을 비판적으로 언급했기에 인간의 존엄성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의 심각한 책임 회피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교회를 지적하고 싶다. 오늘날 교회는 과학의 시녀를 자처하면서 가장 근본적인 원칙들을 부정하였다. 프란체스코 성인의 이름을 딴 현재 교황 아래 있는 가톨릭 교회는 프란체스코가 나병 환자들을 받아들였던 역사를 잊었다. 선의를 베푸는 행동 가운데 하나가 병문안이라는 사실을, 믿음보다는 생명을 위해 기꺼이 희생해야 하며 이웃을 포기한다는 것은 믿음을 버리는 행위라는 순교자들의 가르침을 잊었다. (65-67)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이렇게 말을 하기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말을 한다면 당장에 "그렇다면 지금 바이러스 확산을 무릅쓰고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이냐"라는 질타를 받을 것이 뻔합니다. 아감벤이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과연 생명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 지켜질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생명 유지가 가치 있는 삶을 위한 최고의 목표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교회는 생명 유지를 위한 국가의 통제에 아무 말 없이 협조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칼 슈미트는 "정치신학"에서 "주권자는 예외 상태에서 결정하는 자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헌법과 법률 체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예외 상태가 2년 동안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예외 상태를 새로운 정상 상태은 '뉴노멀'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예외 상태에서 누가 결정하는 자였습니까? 중국과 같은 공산당 일당 독재 국가에서는 국가의 강력한 통제가 이루어진 것은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유민주주의를 실시하고 있는 선진국에서조차 중국 공산당과 같은 독재적 통제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통해서 국민이 주권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자는 국민이 아니라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나 총리라는 사실입니다. 예외 상태가 강력해질수록 또는 오래 지속될수록 독재적 지배 체제가 지지를 받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독재는 폭력성이 더 강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나타낼 수 있는 모든 행동이 금지되고 생명만 유지시켜 놓겠다고 공언하는 정치 세력이 집권할 가능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명 유지가 최고의 목표라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더라도 폭력성을 가지고 있는 독재적 정치 세력이 집권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폐지되었다

사랑이 폐지되었다,
보건의 명분으로.
그리고 보건이 폐지될 것이다.

자유가 폐지되었다,
의학의 명분으로.
그리고 의학이 폐지될 것이다. 

신이 폐지되었다,
이성의 명분으로.
그리고 이성도 폐지될 것이다.

인류가 폐지되었다,
생명의 명분으로.
그리고 생명이 폐지될 것이다. (151)

 

아감벤이 지은 시입니다. 네 번째 연에서 아감벤은 인류가 폐지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생명을 지키기 위한 명분으로 인류는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낼 수 있는 생명을 잃고 호모 사케르가 되어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인간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바이러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비대면 비접촉의 삶에 적응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조에'로서 사는 것입니다. 그냥 목숨만 붙어서 사는 것입니다. 생명의 명분으로 인류가 폐지된 것입니다. 결국 그런 생명은 인간의 생명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적응할 것이 아니라 '비오스' 즉 '가치 있는 삶' 또는 '인간의 존엄성이 드러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거대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아야 하고 서로의 손을 잡아야 하고 이웃과 가깝게 지내야 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부둥켜안고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공동체 안에서 상호 소통을 통해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구원이 존재할 수 없다. 타인과 함께하기에 구원이 있다. 그렇기에 구원은 도덕적인 사유가 아니다. 타인에게 선을 기대하고 행동해야 하기에, 그저 내가 혼자가 아니므로 구원이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다른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나 홀로는 진정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이는 고독하고 특별한 진리다. 구원은 혼자가 아니라 다수에 속하기 때문에 열리는 차원이다. 성육신한 하느님은 '유일함'을 넘어 많은 존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는 역사에 얽매여 마지막까지 운명론적 세계관을 따라야만 했다. (140)

 

코로나19 시대 또는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국가의 강력한 통제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를 비롯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야 하는 곳에서도 침묵하고, 권력의 남용이나 폭력성을 경계하고 경고해야 하는 조직에서도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위험 신호라고 생각합니다. 코로나19는 비대면, 비접촉, 강력한 국가의 통제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거대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감벤의 "얼굴 없는 인간"을 읽으면서 저는 코로나19 시대에 제 생각과 비슷한 친구 한 사람을 발견한 것 같아서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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