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신학

[책] 칼 슈미트 / 정치신학 / 3장 "정치신학"

설왕은31 2021. 8. 27.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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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 "정치신학"의 3장 제목이 바로 "정치신학"입니다. 1장의 첫 번째 문장 "주권자는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라는 문장이 유명하지만 제목이 "정치신학"인 것을 보면 3장 "정치신학"이 중요한 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3장의 첫 번째 문장도 마음에 듭니다. 마음에 든다기보다는 주장이 훅 들어온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도 같고요. 

 

현대 국가론의 중요 개념은 모두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다. (54)

 

현대는 신학이 중요하지 않은 세상입니다. 신학이 무시당하는 세상이고 시대입니다. 그런데 현대 국가론의 중요 개념은 모두 신학 개념이라고 슈미트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와 국가의 기능이 겹쳐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교회도 국가도 그 구성원에게 "내가 당신을 구원할 수 있어"라고 말하죠. 현대에 신학과 교회가 무시당하는 이유는 구원의 능력을 국가에게 완전히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교회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지만 국가는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죠. 국가가 교회와 신학에게서 그것을 배웠습니다. 전에는 교회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그 일을 국가가 할 수 있다고 나서게 되었고 꽤나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칼 슈미트는 이 책에서 객관적 국가론과 계속 싸우고 있습니다. 객관적 국가론은 법이 최고라는 관점입니다. 여기에 반대해서 슈미트는 주권자가 최고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객관적 국가론이 발전하게 된 계기는 자연과학의 발전도 한 몫을 했고요. 슈미트는 이신론이 대두된 것도 큰 역할을 했다고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현대 법치국가의 이념은 이신론으로 지탱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때 이신론이란 하나의 신학이자 형이상학인데, 이는 기적을 세계로부터 추방하고 기적 개념 속에 내포된 자연법칙의 중단, 기적의 직접 개입을 통해 예외 상태를 설정하는 중단을 거부하는 것이며, 따라서 현행 법질서에 대한 주권의 직접 개입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54)

 

다시 정치신학의 첫 번째 문장을 봅시다. 

 

"주권자는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현대 법치국가의 이념은 이신론을 기반으로 예외 상태를 제거한 상태로 형성된 것입니다. 예외 상태가 있는 것이냐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슈미트의 반대편에 서 있는 현대 법치국가의 이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외 상태란 없는 것이라고 전제를 세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신론의 관점이기도 합니다. 기적은 없는 것이라는 관점입니다. 세상은 기계처럼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죠. 아무런 예외 상태도 존재하지 않고요. 

 

이신론은 18세기 이후를 주도했던 신론이기도 했고 또한 형이상학이기도 했습니다. 이신론의 형성과 함께 과학은 급격하게 발전했습니다. 이신론 때문에 과학이 발전한 것이라기보다는 과학이 발전하면서 이신론이 형성된 것이고 이신론이라는 형이상학적 이해 때문에 과학의 발전이 가속화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국가와 법질서에 대한 그의 법치국가적 동일시에는 자연법칙과 규범법칙을 동일시하는 형이상학이 가로놓여 있으니 말이다. 이 형이상학은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으로부터 비롯되어 모든 '자의'를 폐기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영역으로부터 모든 예외를 배제하고자 한다. (60)

 

슈미트는 민주주의가 발전한 것이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에 기대어 있다고 말합니다. 

 

켈젠 자신이 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지 밝힌 대목을 보면, 그에게는 수학적-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이 몸에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고방식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정치적 상대주의를 표현하는 것이며, 기적과 도그마로부터 해방된 인간 오성 및 비판적 회의에 토대를 둔 과학성을 표현하는 것에 다름 아닌 셈이다. (61)

 

칼 슈미트는 독재를 옹호하는 이론을 세웠다는 이유로 비판받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가 글이 아닌 강의나 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에서 독재를 옹호하는 주장을 펼쳤을 수도 있는데 "정치신학"에서는 독재를 옹호하는 주장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학자의 이론적인 고찰이라고 볼 수 있어서 독재를 두둔하고 편든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러저러한 상황으로 인해서 예외 상태를 처리하는 것은 독재가 유리할 수 있다 정도의 주장을 하고 있죠.

 

슈미트가 기대고 있는 철학자는 데카르트이고, 그는 홉스의 이론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국왕 또는 군주의 지배를 두둔합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만든 작품이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든 작품보다 완전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손이 만들어 낸 작품은 단 한 사람이 만든 작품보다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단 한 사람의 건축가"가 집이나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며, 또한 최선의 헌법은 단 한 사람의 현명한 입법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품, 즉 "단 한 사람에 의해 창출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유일한 신이 세계를 통치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언젠가 메르센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썼듯이 "이 자연법을 정한 것이 신이었음과 마찬가지로 왕국의 법을 정하는 것은 국왕이다." (67)

 

Image by klimkin from Pixabay  

 

슈미트가 볼 때 민주주의는 이신론과 자연 과학의 발전에 기대어 있는데 민주주의가 만들어 내는 통일성에는 결단주의적 성격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국민이 연출하는 통일성에는 이런 결단주의적 성격이 없다. 그것은 하나의 유기체적 통일성이며, 국민의식에 의해 유기체적 통일국가라는 표상이 태어난다. (69)

 

말이 좀 어렵습니다. 결단주의적 인격주의적 성격을 잃는 것이 왜 문제일까요? 그것이 문제인 것처럼 슈미트는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단주의적 인격주의적 성격을 잃으면 예외 상태를 조화롭고 통일성 있게 처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외 상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만약에 발생한다면 그것을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데요. 슈미트는 국민이 민주주의 방식으로 예외 상태를 처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예외 상태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현명한 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는 것이죠. 

 

그 결과 코르테스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 즉 독재밖에 없었다. 수학적 상대주의가 섞여들어 있기는 하지만, 홉스의 학설이 결단주의적 사고를 밀고 나간 끝에 도달한 결론도 마찬가지였다. 즉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을 만든다는 것이다.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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