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슈미트의 정치신학 제4장 "반혁명 국가철학에 대하여"입니다. 앞에 있는 내용들도 다 쉽지 않았는데 4장도 쉽지 않았습니다. 슈미트가 자기 의견을 정확하게 밝히면 좋은데 다른 학자들의 의견을 내세우면서 자기 의견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이게 슈미트의 주장인지 아니면 단순하게 몇몇 학자들의 이론을 소개하려고 하는 것인지 좀 헷갈립니다. 많은 학자들은 슈미트가 드 메스트로, 보날드, 도노소 코르테스의 이론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제가 볼 때도 그렇습니다. 비겁한 면이 있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다른 학자의 입을 통해서 하고 있으니까요.
슈미트가 주장하려고 하는 요점은 반혁명 국가철학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학자들의 이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혁명은 옳지 않다는 것이고요. 혁명을 일으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표적으로 무정부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슈미트는 부르주아의 태도도 비판합니다. 물론 그에 대한 논리를 제시하는데요. 찬찬히 잘 읽어봤는데도 논리를 따라가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어려워서 그런 것도 있는데 논리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얼버무려서 파악하기 어렵기도 합니다.
일단 부르주아 무정부주의자들의 문제는 그들은 예외 상태를 처리할 수도 없고 국가 질서를 유지할 수도 없고 악을 제거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좀 더 간단하게 말하면 그들은 모순 덩어리라고 슈미트는 비판합니다.
일단 무정부주의자들의 모순을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물론 이 과격한 반대 명제가 그 자체로 결단에 반대하도록 결정하라고 무정부주의자에게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무정부주의자인 바쿠인은 다음과 같은 기묘한 역설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그가 이론적으로는 반신학적 신학자이며, 실천적으로는 반독재적 독재자일 수밖에 없었다는 역설이다. (90)
주권자란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자라고 슈미트는 주장합니다. 예외 상태란 무질서 상태이고 악이 발생한 것인데 이 상태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 슈미트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무정부주의자는 누군가의 결정을 내리는 국가 구조를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무정부주의자의 관점에서는 악한 것입니다. 선이란 그러한 결정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한다고 말하는데 슈미트는 이 주장이 모순이라고 지적합니다. 결정에 반대하도록 결정하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 역시도 결정이라는 것이죠. 일리가 있는 지적입니다.
슈미트는 부르주아도 모순 덩어리고 영원한 대화를 통해서 결정을 지연하는 세력인데 이들의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왕정 및 귀족정에 대한 증오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를 왼쪽으로 내몰았으며, 과격한 민주정이나 사회주의의 위협으로 생겨난 자기 재산에 대한 불안이 다시 그들을 오른쪽으로, 즉 군대의 보호를 가능케 하는 강력한 왕정으로 내몰았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는 쌍방의 적 사이를 오고 가면서 양쪽 모두를 기만하려 한다는 것이다. (84)
부르주아는 왕을 없애야 한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모순적인 존재들이라고 슈미트는 비판합니다. 슈미트가 볼 때 부르주아는 예외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해결을 끝없이 지연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목표는 예외 상태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부르주아는 예외 상태가 해결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에게 이득만 되면 문제 될 것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라고 슈미트는 지적합니다. 슈미트는 빈정거림으로 4장을 시작합니다.
독일 낭만주의자들에게 고유한 본원적 관념이 있다. 바로 '영원한 대화'가 그것이다. (74)
빨리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인데 왜 대화만 계속하고 있느냐고 비꼬고 있습니다. 이건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판타지라는 것이죠.
칼 슈미트는 "정치신학"에서 독재를 옹호하고 있다고 비판을 받았습니다. 3장까지 봤을 때는 그런 느낌을 많이 받지는 않았는데 4장에서 꽤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4장에서도 교묘하게 주장하고 있기는 합니다. 자신의 주장이 아니라 드 메스트로, 보날드, 도노소 코르테스의 의견을 가지고 와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두둔하고 있는 것인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그런데 확실히 독재를 지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슈미트는 이런 식으로 묻고 스스로 답하고 있는 것이죠.
"독재가 아니라면 누가 예외 상태를 해결하고 평화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부르주아가?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대화만 하고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사람인데? 무정부주의자가? 그들은 어떤 결정에도 반대하는 결정을 내리는 사람인데 그들이 예외 상태를 해결하고 평화를 만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왕정이나 군주제로 돌아갈 수도 없는데? 결론은 독재다."
시민 사회가 역량이 부족해서 다수의 사람들이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역할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 확실히 문제이기는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독일의 나치가 예외 상태를 해결하고 평화를 만들었는가라고 묻는다면 거기에도 그다지 긍정의 답변을 내릴 수 없습니다. 독일 자체의 질서를 확립하는 데는 공헌을 한 부분이 있지만 나치로 인해서 세계는 더 큰 혼란, 더 심각한 예외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죠. 차라리 독일이라는 나라는 좀 더 헤매는 시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슈미트가 주권자로서 다수의 사람들을 믿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정치이념은 인간 '본성'에 관해 어떤 식으로든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며, 성선설이나 성악설을 전제로 한다. (78)
슈미트가 전제로 두고 있는 인간 이해는 성악설입니다. 물론 자신이 그렇다고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습니다. 대신 코르테스의 관점을 설명합니다.
코르테스는 원죄의 교리를 인간 본성의 절대적 유죄성 및 극악성이라는 교리로까지 논리적으로 정예화한다. (79)
기독교의 원죄 교리에 기반을 둔 인간 이해로 인해서 코르테스, 그리고 슈미트는 사람을 믿지 못합니다. 인간은 본래 악하고 죄성이 있다고 본다면 사람들에게 예외 상태를 해결을 맡기기는 어렵죠. 이런 관점에서 정치를 하면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기 어렵습니다. 자유를 주면 반드시 타락할 것이기 때문이죠. 사실 코르테스나 슈미트의 원죄 이해는 일차원적이라서 수정될 필요가 있기는 한데 여하튼 이들에게는 인간은 악한 존재로서 좋은 것을 가질 자격이 별로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제가 정치신학을 읽으면서 내린 결론 중 하나는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한 나라의 정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여러 가지 생각할 만한 것이 있는데 일단 이 정도로 하죠.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 4장 "반혁명 국가철학에 관하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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