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신학

[책] 윌리엄 캐버너/ 신학, 정치를 다시 묻다/ 1장 "국가가 구세주라는 신화"

설왕은31 2021. 9. 18.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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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윌리엄 캐버너는 가톨릭 신학자로 정치 신학과 기독교 윤리, 교회론 분야에서 새롭고 독특한 해석으로 주목받고 있는 사상가입니다. 캐버너는 기독교 윤리학자로 유명한 듀크 대학교의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지도를 받아 「피노체트 치하 칠레에서의 고문과 성찬례」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1996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의 독창적인 박사 학위 논문 제목만 봐도 그가 정치, 윤리, 그리고 기독교 성찬에 관심이 있으며 또한 그러한 주제들을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급진 정통주의 신학 운동을 대표하는 학자로도 알려져 있는 캐버너는 2019년 현재 드폴 대학교 교수로서 신학을 가르치고 있고, 또한 세계 가톨릭 신학 연구소 소장도 맡고 있습니다.


『신학, 정치를 다시 묻다』은 캐버너가 2002년도에 출판한 책입니다. 이 책은 부제가 “근대의 신학-정치적 상상과 성찬의 정치학”입니다. 주제목과 부제목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신학과 정치, 그리고 상상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어 번역본은 ‘상상’이라는 단어가 주제목이 아닌 부제목에 들어가 있지만, 이 책의 원제는 "Theopolitical Imagination: Christian Practices of Space and Time"으로 주제목의 두 단어 중 하나가 ‘상상’입니다. 캐버너는 이 책을 통해 교회와 정치, 혹은 신학과 정치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묻는 이들에게 상상이라는 연결 고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정치는 상상의 실천이다"라는 명제로 시작하고 있는 이 책은 기독교 신학이 “그리스도교 이야기에 뿌리내린 다른 종류의 정치적 상상을 발휘하는 작업”을 통해서 정치에 새로운 상상력을 제공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12)


저는 특별히 오늘 제1장의 내용을 소개하고 제 생각을 나누려고 합니다. 제1장은 “국가가 구세주라는 신화”라는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캐버너는 근대 국가의 탄생 과정에서 시민들은 국가가 구세주라는 신화를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캐버너는 근대 국가가 시민들에게 주는 이미지는 종교가 시민들에게 주는 이미지와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기독교만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종교가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구원입니다. 기독교 신학은 단순화된 원리를 가지고 있는데요. 바로 창조, 타락, 구원입니다. 인류가 종교를 믿어야 할 근거가 되는 공식입니다. 캐버너는 국가도 비슷한 맥락 속에서 탄생을 했다고 지적합니다. “근대 국가는 자연과 인간 본성, 인간 갈등의 기원, 그리고 국가 자체의 구현을 통한 갈등 해결과 같은 특정한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합니다. 국가는 16, 17세기 종교 전쟁에서 시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탄생했다는 신화가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이해하는 인간 vs 국가가 이해하는 인간


캐버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와 “국가 이야기”라는 제목의 소단원를 통해서 기독교의 인간 이해와 국가의 인간 이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캐버너에 따르면, 기독교가 이해하는 인간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에 참여하는 인간이고 국가가 이해하는 인간은 한 개인으로서 인간입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근대 이전에는 아담이 죄를 저지른 것이 왜 우리의 죄가 되는지 힘들여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그냥 우리 중 한 사람이었고 아담은 우리였거든요. 아담의 죄는 아담의 죄, 나의 죄는 나의 죄라는 구분은 근대시대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공동체가 개인으로 분리되는 것을 일종의 죄라고 보았습니다. 인류 최초의 죄라고 할 수 있는 아담의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를 의미하고요. 가인의 죄는 형제간의 분열을 의미하죠.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는 “사탄이 우리를 갈라놓았다”고 주장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의 타락을 도자기 인형이 떨어져 산산이 조각난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30) 캐버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죄의 영향으로 발생한 것은 개인과 집단의 존재론적인 구별을 만들어내는, 개인들의 창조다.” (31)

 

캐버너는 인간은 공동체로 창조되었고 죄로 인해서 공동체가 분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타인과 분열된 개인이 태어난 것이 죄의 영향이라면 교회 혹은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공동체의 회복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몸에 온 인류가 참여함으로써 연합하고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근대 국가가 탄생할 무렵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던 홉스, 루소, 로크는 모두 인간 본연의 상태를 공동체가 아닌 개인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하고 공동체 속에서 ‘우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분리된 개인의 상태로 본 것입니다.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도 인류를 서로에 대항해 싸우는 개인들의 혼란한 존재 상태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본질적으로 한 개인이라는 개념은 이와 같이 중세를 지나 근대에 들어서면서 15세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개념입니다. 이러한 개체성을 전제로 해서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와 주권이 최대한 확보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면서 나의 것과 너의 것을 구별해야 할 필요가 생겼고, 나의 것을 지켜야 했고 그것을 누군가 보장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죠. 그때 나타난 것이 국가입니다. 투쟁을 멈추고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자는 사회 계약에 따라서 국가, 즉 레비아탄이 탄생합니다. 캐버너는 레비아탄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새로운 아담이라고 부릅니다. 


종교 전쟁과 근대 국가의 탄생

 

케버너에 따르면, 근대 국가는 일종의 탄생 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근대 국가가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전쟁을 멈추기 위해 탄생했고 결국 그 일을 해냈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인간을 구원해냈다는 신화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캐버너는 종교 전쟁이 단순히 종교 간의 전쟁이었다고 말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실제로 종교 전쟁은 그 자체가 국가의 산고였다. 이 전쟁은 단순히 프로테스탄트주의와 가톨릭주의 사이에 일어난 갈등이 아니었으며 중세 교회 질서의 부패한 잔재들 너머로 신흥 국가들이 자신의 지위 확대를 위해 일으킨 거대한 싸움이었다.” (47)


국가가 교회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종교 개혁 이전에 일어났습니다. 14세기에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는 “세속 당국만이 강제력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루터는 1523년 논문 <세속 권력, 어디까지 복종해야 하는가>에서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하나님은 강제력을 세속 권력에게만 주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강제력의 세속적인 것이며 교회는 사법 기관이 아니라 도덕 기관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교회가 강제력을 갖게 되면 속물이 된다고 생각했으므로 교회는 어떤 강제력도 갖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강제력이 세속의 것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같은 설득하는 권위만 남게 되었습니다. 세속 권력은 몸을 통치하고 교회 권력은 내면을 통치하는 것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종교 간 전쟁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일단락되었습니다. 여기서 영토를 다스리는 자가 종교를 결정한다는 합의에 도달했는데요. 군주가 교회를 지배하면서 공공 역역에서 교회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신앙이 통제받을 정도로 세속 정치인들이 교회를 지배하는 것에 대해 인정했습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프랑스에서 개신교도들인 위그노파가 3만여 명 대량 학살되는 등 프랑스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드 사이의 충돌이 계속되면서 내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캐버너는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이 전쟁들은 단순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결, 화체설과 영적 임재설의 대결이 아니었다. 성 바로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을 촉발한 여왕 카트린은 종교적 열성분자가 아니었고 절대적인 왕권을 향해 왕실의 주장에 대한 귀족들의 도전을 막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철저한 정치파였다.” (58)

 

즉 세속 정치인들은 종교의 분열을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이용했던 것입니다. 

 


종교의 탄생

 

캐버너는 근대 국가가 탄생하기 이전에는 종교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근대 국가가 탄생하면서 국가와 분리된 종교가 창조되었습니다. 국가는 공적인 충성을 요구하고 교회는 단순히 믿음의 공동체로만 존재하게 된 것이죠. 종교가 창조되면서 교회는 믿음의 영역, 인간 내면의 영역에만 관계하는 것으로 공적인 영역에서 쫓겨나 사사화되었습니다. 종교는 인간의 영혼을 다루고 인간의 몸은 국가에게 넘어갔습니다. 

 

토마스 홉스는 노골적으로 종교가 국가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그 목적은 전쟁 종식, 평화 달성입니다. 공포와 안보의 필요성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로크와 루소의 주장도 큰 맥라에서 홉스의 주장과 일치합니다. 


국가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캐버너는 국가가 분쟁으로부터 시민들을 구원하기 위해 탄생했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 국가는 인간을 구원하는 데 실패할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문제는 국가가 자신을 유지하는 고유한 규율이 바로 폭력이라는 데 있습니다. 

 

“레이먼드 윌리엄스와 몇몇 이들이 주장했듯 전쟁은 자유주의 국가에 있어서 사회적 과정의 시뮬라크룸(모조품, 가상, 거짓 그림), 곧 공통된 목적이 없는 사회에서 사회적 통합을 달성하기 위한 주요 작동 원리다. 한마디로 폭력은 국가의 종교, 곧 우리가 서로를 구속하는 고유한 규율이 된다.” (캐버너, 신학 정치를 다시 묻다, 81)

 

캐버너는 시민들의 충성심이 종교에서 국가로 옮겨 갔지만 근대 전쟁의 범위는 오히려 확산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우리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를 통해 국가의 힘이 절대적 권력이 될 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단지 히틀러와 같은 지도자 한 사람의 책임으로 몰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근대 국가가 태어날 때부터 국가는 폭력성이라는 DNA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국가의 힘이 극대화될 때, 혹은 사람들이 국가에 대한 의존 혹은 신앙심이 극대화될 때 언제든지 그러한 폭력성은 드러납니다. 

 

국가가 시민을 구원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캐버너는 한 가지 더 중요한 점을 짚어 줍니다. 국가는 인간의 어떠한 사회화 과정도 배제하고 개인과 공동체의 구분 없이 모두를 한 명 한 명의 개인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개인은 개인으로 존재할 수도 있지만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하나의 공동체처럼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개인 간의 충돌은 사사로운 일로 간주하고 강제로 통제할 수 있지만 조직된 공동체의 움직임은 공공의 이익, 혹은 공공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쉽게 무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국가는 개인과 집단을 평화롭게 통합할 능력이 부족합니다. 개인들은 서로 공유하는 목적이 없기 때문에 국가의 강제력을 기반으로 그 계약에 따라서 국가와 연결되어 있는 형태입니다. 개인이 개인으로 존재할 때 국가는 개인을 통제할 수 있지만 개인이 집단을 이루게 되면 서로의 권리를 방해하지 않도록 조정하는 것도 어렵고 그것을 실행할 때 내세우는 논리도 부실할 수 있습니다. 국가는 통일성을 유지하고 질서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동원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집니다. 

 

그래서 캐버너는 국가의 폭력성과 예견된 구원의 실패와 전쟁의 위협을 막기 위해 신앙이 정치적 성격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국가가 없는 세상

 

국가의 공통된 목적이 없다는 말은 국가의 영혼이 없다는 말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국가의 영혼이 없다는 말은 국가에게는 사명, 혹은 사명적 이념이 없다는 말과도 통할 것 같고요. 그런 상황에서 국가 안에서 개인들, 혹은 집단들 간에 분열이 일어나면 국가는 폭력을 사용하게 되고 결국 전쟁이라는 최후 수단까지 쓸 수 있다는 것은 소설이나 기우가 아닙니다. 세계 대전이 그런 식으로 일어나게 되었고 미국은 여전히 전쟁을 사회 통합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종교의 역할, 신앙의 역할을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국가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이죠. 존재 자체가 최고의 목적이 되어버리는 국가는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영혼을 불어넣어야 하는지는 함께 생각해 볼 문제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신념을 모아 우리가 함께 추구해야 할 공동의 목적을 만드는 일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또 생각해 볼 문제는 국가가 국민의 분열을 조장하거나 혹은 분열된 상태를 악용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국민이 분열되면 국가는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바빠질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국가의 권력이 더 강화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국가의 공권력이 더 강화될 것입니다. 국민이 분열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국가에게는 자신의 힘을 키울 수 있는 기회입니다. 공권력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국론 통합을 외치면서 언론을 장악하고 저항의 목소리를 묵살하려는 시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권위주의적 정부에서 항상 나왔던 말입니다. 법과 질서, 국론 통합과 같은 주제는 권위주의적 정부에서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내세웠던 공공선입니다. 이들이 내세우는 모토 자체는 선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동의하기 쉽습니다.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이고 전쟁을 하면 서로가 다친다는 것을 아는데 우리가 거기에 찬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철학자인 하이데거도 나치에 찬동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는 금방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돌이키기는 했지만 수많은 개인들과 집단이 하나로 묶여 있는 국가의 정치 행위는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국가는 인간이 분리된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전제에 탄생했기 때문에, 국가는 개인을 다루는 데 능숙합니다. 개인 한 사람이 저항할 때 국가는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집단적으로 대항하는 것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집단적 저항을 통제할 수도 있지만 개인을 통제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국가가 생각하는 인간은 개인이니까요. 근대 국가의 근본 철학이 그렇기 때문에 조직된 단체의 저항에 대해서는 국가는 통제할 근거나 힘이 부족합니다. 공동체가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국가에게 말을 걸고 대항하면 국가는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일이 발생할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정확한 기준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개인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면 그냥 금지하면 되는데요. 한 무리가 나서서 국가에 대해서 어떤 요구를 하거나 공동체가 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애매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한 말은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근대국가의 형성 과정을 볼 때 이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캐버너의 설명에 근거해서 국가의 폭력성을 줄이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개인 간, 혹은 집단 간의 투쟁이 심해지면 국가는 폭력성이 강해집니다. 개인 간, 혹은 집단 간의 투쟁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국가는 더 큰 힘을 가져야 하는 당위성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분리된 개인이 사라지고 공동의 번영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등장하고 공동체 간에 투쟁이 아니라 상호협력을 통한 공생과 번영을 추구한다면 국가는 폭력을 강화할 명분이 사라집니다. 사회화를 통해서 인간이 평화로운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 공동체가 점점 확대된다면 어쩌면 국가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국가가 사라진다는 것은 곧 군대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국가가 사라져도 경찰은 존재하겠지만 군대는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국가가 사라진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군대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에게 취해질 수 있는 폭력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노예제도가 있을 당시에는 노예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노예가 없으면 농사는 누가 짓고 청소나 설거지는 누가 할 것인지 대답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100여 년 전에 고등학교 교사로 일했는데 그 당시에는 체벌이 의무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체벌 없이 교육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하지만 세상은 변했습니다. 국가나 국가의 공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의 공권력 없이 질서 유지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폭력 없이 인간은, 인류는 질서를 유지할 수 없고 결국 멸망할까요? 국가는 거대한 바다 괴물 레비아탄처럼 살아남기 위해서 계속 공포심을 조장할지도 모릅니다. 국가가 없다면 세계는 멸망할 것이라고 말이죠. 그러나 국가의 고유한 규율이 폭력이고,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비폭력을 지향한다면 국가가 없는 세상을 꿈꿀 수 있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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