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비평은 그리스도교에 위험 요소이기도 했지만 신학에 기여한 바도 많이 있습니다. 틸리히도 비슷하게 지적을 했지만, 제가 볼 때 역사비평의 큰 공헌 중 하나는 현대신학이 탄생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현대신학의 아버지는 슐라이어마허입니다. 슐라이어마허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상징으로 가득 찬 이야기로 이해했습니다. 그런 구분의 토대 위에서 현대신학이 시작되었습니다. 역사비평이 없었다면 이러한 구분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변화가 가져온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학이 성서 이야기 속에서 경험적인 요소와 전설적인 요소와 신화적인 요소 사이를 구별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169)
이 말은 전에는 성서에 나온 모든 이야기를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고 간주했는데 역사비평 이후로는 경험과 전설과 신화를 구분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구분이 없었으면 현대신학은 태어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 작업은 번거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내용 중 어떤 것은 경험이고, 어떤 것은 전설이고, 어떤 것은 신화거든요. 이런 구분 없이 성서의 모든 기록을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18세기 이전의 신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틸리히는 역사비평이 공헌한 바를 몇 가지 언급합니다. 첫째로 역사비평으로 인해서 그리스도교가 일반 역사 의식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고요. 둘째로 성서 속의 역사가 아니라 일반 역사를 언급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고립될 위험을 피했다고 말합니다. 셋째로 역사비평은 그리스도교의 기록이 역사적 기록과 심각하게 어긋나는 내용이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정직한 기록이었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지적합니다.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신앙의 확실성은 역사적 연구의 물음들에 대한 확실성을 뜻하지 않는다. 이 통찰은 오늘날 폭넓게 널리 퍼져 있으며, 조직신학에 대한 역사적 연구의 최고의 공헌이다. (170)
신앙의 확실성과 역사적 확실성은 동의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서의 기록이 틀림없는 역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신앙의 확실성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 확실성을 증명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증명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흔들림 없는 신앙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죠. 우리는 역사를 믿지는 않습니다. 역사는 단순히 일어난 일일 뿐입니다.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죠. 이런 것을 밝혀 낸 것이 조직신학에 대한 역사비평의 가장 큰 공헌이라고 틸리히는 주장합니다.
틸리히는 역사비평의 또 다른 공헌에 대해서 말합니다. 바로 그리스도론 상징들의 발달 과정에 대한 통찰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상징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상징들은 항상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상징의 의미가 바뀌었습니다. 틸리히는 이를 네 단계로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상징이 그들의 종교적 문화와 언어 속에서 발생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상징을 통해서 자신들의 곤경을 표현하거나 그 곤경을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에 의해서 상징이 사용되었고, 세 번째는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관점에 의해서 상징의 의미가 변한 경우가 있고, 네 번째는 상징이 문자주의나 초자연주의의 관점에 의해서 왜곡되기도 했다는 것을 틸리히는 지적합니다.
틸리히는 '인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로고스'와 같은 상징이 어떻게 그 의미가 변화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단어들은 쓰는 사람이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아야 하고 또한 듣는 사람도 상대방이 무슨 의미로 그 상징을 쓰고 있는지 이해해야 서로 의미 전달이 가능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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