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 부분의 제목은 "신앙과 역사적 회의주의"입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는 예수를 얼마나 알 수 있을까?"로 제목을 붙였습니다. 틸리히가 붙여 놓은 제목을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제가 볼 때는 이 부분이 이 책에서 제일 중요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틸리히의 그리스도론을 공부하면서 제가 궁금했던 질문은 "어떻게 해야 우리가 예수와 같은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였습니다. 예수가 위대한 존재라는 것은 너무 잘 알고 있고 인정하고, 틸리히가 말한 것처럼 예수가 새로운 존재라는 사실도 저는 믿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나도 예수와 같은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틸리히의 조직신학은 그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아서 좀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어느 정도 그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질문에 한번 답변을 해 보죠. 우리는 예수를 얼마나 알 수 있을까요? 틸리히에 따르면 이에 대한 대답은 "아주 많이"입니다. 우리가 예수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예수의 이름이 예수였다는 사실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 것은 그의 힘입니다. 새로운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변형시키는 힘transforming power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 신앙을 위해서는 하나님은 AD. 1-30년에 그의 아들을 보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과장해서 말했다. 새로운 존재의 구체성이 없다면 그의 새로움은 공허한 것이다....새로운 존재는 그의 모습 속에서 나타났다. 이 모습의 특별한 어떤 특징도 확실하게 증명될 수 없다. 하지만 새로운 존재가 이 모습을 통해서 그것에 의해서 변형된 사람들을 변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명확하게 주장될 수 있다. (179)
틸리히는 키에르케고르가 과장해서 한 말을 인용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위해서 예수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캐내야 할 필요가 없다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하고 있고 틸리히도 이에 대해 동의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를 전할 때도 그는 예수에 대한 여러 가지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강조했습니다. 믿어야 하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죠. 역사적인 사실은 그냥 인지해야 하는 것이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믿어야만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그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존재의 힘입니다. 예수에 대한 여러 가지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확증할 수 없지만 그가 틸리히가 말한 대로 소외라는 인간의 실존을 극복한 새로운 존재였다는 사실은 성서에 남아 있는 그에 대한 증언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사소한 역사적 오류가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가 새로운 존재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 역시 그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어 가고 그러한 존재로 살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 부분의 번역이 매끄럽지 않은데 아무래도 원문 자체가 쉽께 쓰여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틸리히도 이 내용을 언급하면서 쉽게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입니다.
신앙은 엄밀하게 말해서 무엇을 보증할 수 있는가? 여기서 불가피한 대답은 신앙이란 자신의 토대만을, 즉 신앙을 창조한 실재의 출현appearance만을 보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실재는 실존적인 소외를 극복하고 이로써 신앙을 가능하게 만든 새로운 존재이다. 신앙이 보증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신앙 그 자체가 실존의 여러 조건들 안과 그 아래에서 나타난 새로운 존재에 대한 직접적인 증명이다... 어떠한 역사비평도 신앙의 상태로 들어간 사람들의 직접적인 의식을 의문시할 수 없다. (178)
틸리히의 말을 토대로 하여 신앙이 보증할 수 있는 것을 제 나름대로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신앙이 보증할 수 있는 것은 첫째 새로운 존재의 출현입니다. 예수가 바로 그 존재이죠. 두 번째로 신앙이 보증할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출현으로 인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이것 역시 충분한 증거가 있는 내용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를 믿음으로 새로운 존재의 변형시키는 힘을 통해 예수를 알게 된 우리의 직접적인 의식입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의해서 어떠한 놀라운 발견이 나타난다고 하더라고 예수를 통해 새로운 존재의 힘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의 직접적인 의식에 돌을 던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역사적인 논증이 아니라 참여가 기독교가 근거하고 있는 사건의 실재성을 보증한다고 말해야만 한다. 참여가 한 인격적 삶 속에서 새로운 존재가 옛 존재를 극복했다는 것을 보증한다. (178)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했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 정확하게 증명받은 후에 그를 믿겠다고 말한다면 이는 잘못된 자세입니다. 예수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그의 힘입니다. 그를 믿을 때 새로운 존재의 힘을 알게 되고 그 힘을 얻게 되는데 이것 자체가 보증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에 대한 신앙을 무너뜨릴 만한 역사적 증거가 나올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올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의 참여를 통해서 사건의 실재성을 이미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참여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틸리히는 믿음을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정의합니다. 관심은 넓은 의미이죠. 여러 가지 행동으로 우리는 예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 있고 이것이 바로 믿음의 참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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