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폴 틸리히: 그리스도론

[틸리히조직신학3_159-168] 45. 역사적 예수 연구와 그 실패

설왕은31 2021. 12. 8.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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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는 말 자체가 하나의 연구 주제가 되었습니다. 한동안 굉장히 뜨거운 이슈였습니다. 예수면 예수이지 왜 역사적 예수라고 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는 역사책에 나오는 인물과는 다릅니다. 성경에서 묘사하고 설명하고 있는 예수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보거나, 듣거나 또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경험한 예수입니다. 신앙의 대상으로서 받아들인 예수라는 말입니다. 틸리히가 이 앞부분에 계속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두 가지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예수에 대한 사실과 신앙이 서로 상호 의존하는 방식으로 단단하게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사실과 신앙은 50대 50이 아니라 신앙 쪽이 훨씬 더 비중이 높습니다. 누군가는 신앙의 비중이 더 높지 않더라도 신앙은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는 사실과 신앙에서 신앙을 떼어 버리고 사실로만 예수를 설명하려는 시도입니다. 이것을 틸리히는 이렇게 말합니다. 

 

'역사적 예수'라는 용어는 또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사건이 사실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168)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역사적 예수라는 연구 주제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18세기부터 시작된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 연구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그리스도교 최고의 관심 인물인 예수에 대하여 철저한 역사 비평을 시도한 것입니다.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역사 비평 연구가 그러하듯이 이 연구로 인해서 기록된 내용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밝혀 냈거든요. 성경의 내용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는 주장 자체가 성서의 권위에 도전하고 신앙을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성경에 나온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 사실이 아닌 내용을 믿기는 어렵죠. 그리고 일부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 다른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은 어떻게 또 증명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워낙 오래된 일이라 정확한 일이었는지 확인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역사 비평의 관점에서 보면 성서의 권위가 흔들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도 틸리히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의도에 대해서는 칭찬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실재성을 발견하려는 강렬한 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소위 '역사적 예수'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연구의 동기는 종교적인 것이었으며 동시에 학문적인 것이었다. 이 시도들은 많은 점에서 용기 있는 것이었고, 고귀한 것이었고, 극히 의미 깊은 것이었다. 이 시도의 신학적인 결과들은 무수히 많았고 또한 중요한 것이었다. (160)

 

하지만 틸리히는 역사적 예수 연구은 실패했다고 딱 잘라서 말합니다. 신앙을 벗겨내고 사실로만 예수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죠. 역사적 예수 연구는 많은 성과를 거두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성과를 거두는 것이 역사적 예수를 밝혀내는 데 더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더 후퇴하게 된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개연성이 높은 역사적 사실을 주장할 수는 있지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개연성이 높을 뿐이지,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는 것이죠. 개연성이 높은 사실을 받아들이냐 아니면 배척하느냐는 또다시 믿음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개연성이 높다고 반드시 사실인 것도 아니고 개연성이 낮다고 해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거든요. 그리고 모든 학문적 연구가 그렇지만 역사적 예수 연구도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이상, 계속 의심하고 비판하는 것이 연구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흔들리지 않는 역사적 사실로서 드러난 예수를 밝혀내고자 시도한 것이었는데 그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적 연구는 예수에 대한 보다 높거나 보다 낮은 정도의 개연성들만을 제공해 주었다. 이런 개연성들의 토대 위에서 역사적 연구는 '예수전'을 구상했다. 그러나 예수전은 전기보다는 소설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예수전은 확실히 기독교 신앙에 안전한 토대를 제공할 수 없었다. 기독교의 토대는 역사적 소설의 수용이 아니다. 기독교의 토대는 메시아의 전기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진 예수의 메시아적 성격에 대한 증언이었다. (165)

 

개연성이 높은 사실들을 죽 열거해서 예수에 대한 전기를 완성했다면 그것을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이죠. 그냥 그것은 개연성이 있는 소설일 뿐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역사적 예수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 연구는 실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 연구는 커다란 후퇴를 했습니다. '예수의 말'에 집중했습니다. 예수가 성서에 기록된 대로 말을 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연구하는 쪽으로 범위를 더 제한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틸리히는 이에 대해 비판합니다. 

 

역사적 연구가 '예수의 교훈'으로 후퇴한 것은 예수를 구약성서의 수준으로 환원시키고 구약성서의 맥락을 극복했다는 예수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된다. (166)

 

역사적 예수를 '예수의 말'로 후퇴시킨 것은 예수의 존재를 부정하는 방식이라는 것이죠. 예수는 구약의 예언자와는 달랐습니다. 예언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의 말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그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도록 결단을 요구했고 실제로 많은 이가 그렇게 결단하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러한 힘이 어디서 나왔느냐고 중요하죠.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새로운 실재로부터, 즉 기독교 메시지에 따르면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요구의 상징이기보다는 선물의 상징이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받아들여진다면 그리스도의 존재로부터 그의 말들로 후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67)

 

여기서 예수의 존재가 부각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말로 후퇴하면 안 된다고 틸리히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실패했습니다. 나름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고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개연성 있는 사실들에 대한 열거에 불과했습니다. 어떤 사실에 대해서 개연성이 더 높아지거나 낮아진다고 해서 그것이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지거나 낮아진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개연성이 높은 사실들로만 예수에 대한 전기를 다시 구성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소설일 뿐 흔들리지 않는 객관적 자료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에 대한 내용뿐만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사실성을 백 퍼센트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신앙은 그리스도였던 그에 대해서 심지어 '예수'라는 이름조차 보증할 수 없다. 신앙은 이것을 우리의 역사적 지식의 불확실성에 맡겨야만 한다. 그러나 신앙은, 신약성서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모습 속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의 인격적인 생애 속에 나타나 있는 실재의 사실적인 변형을 보증할 수 있다.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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