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히는 그리스도라고 불린 예수는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인지해야 하는 주제이면서 동시에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주제라고 설명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는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또한 믿어야 하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역사 속 사실로만 받아들여도 안 되고, 사건에 대한 이해 없이 믿기만 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예수 자신이 새로운 존재로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나라를 여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가 가지는 왕이라는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죠. 틸리히가 강조하는 내용은 예수는 소외라는 인간의 실존 상태를 완전히 극복한 새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가 새로운 존재가 아니었다면 인간은 여전히 소외의 완전한 극복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계속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실존적인 소외를 극복한 인격적인 삶이 없었다면 새로운 존재는 여전히 탐구와 기대에 불과했을 것이고 시간과 공간 속의 한 현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오직 실존이 한 점에서, 즉 실존 전체를 대표하는 인격적인 삶 속에서 극복될 때만, 실존은 원리적으로 말하자면 '시작과 힘의 의미에 있어서' 극복된다. (155)
이런 의미에서 예수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기이한 행적들로 인해서 예수가 그저 평범한 사람일 리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를 사람이 아닌 '신'이라고 여긴 사람들이 예수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인했죠. 그런데 예수는 분명히 인간 같았거든요.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은 예수가 진짜 인간이 아니었고 그냥 인간으로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을 가현설이라고 부릅니다. 예수가 인간으로 보였던 것은 가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가현설에 대항해서 열렬히 싸웠습니다. 만약 예수가 진짜 사람이 아니었다면 소외라는 실존 상태를 완전히 극복한 유일한 사례는 사라지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가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인지한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습니다.
만일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그다음의 모든 세대들에게 그리스도로서 깊은 인상을 주지 않았다면, 나사렛의 예수로 불린 사람은 아마도 역사적인, 종교적인 중요한 인물로서만 기억되고 말았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새로운 존재의 예언자적인 선취일 수는 있었겠지만 새로운 존재의 궁극적인 현현 자체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156)
예수가 자칭 그리스도였다면 그리스도일 수 없었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자기를 왕으로 부를 수 있죠. 하지만 그가 진짜 왕으로 남으려면 그를 왕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를 왕으로 부르고 그를 따르는 몇몇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인정한다고 해서 그가 왕으로 남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무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가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렇게 인정하는 사람들이 세대를 이어가면 존재해야 합니다. 짧게 말하면 예수가 신앙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이상 예수가 그리스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두 가지 자세가 상호의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인간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과 그를 믿음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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