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히는 이 부분의 제목을 "한 인격적 삶 속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라고 했지만 좀 어려워서 제목을 새로 달았습니다. "예수가 새로운 존재이다"라는 제목이 틸리히가 이 부분에서 말하려는 내용은 간단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아니 우주의 역사에서 소외라는 실존의 상태를 완전하게 극복한 한 존재가 나타났는데 그 존재가 바로 예수라는 것입니다. 틸리히는 첫 문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새로운 존재는 한 인격적 삶 a personal life 속에 나타났다. (187)
한 인격적 삶이라는 말도 좀 어렵습니다. 그냥 '한 인간의 삶'이라고 번역을 하면 이해하기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존재는 한 인간의 삶에서 나타났는데 그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새로운 존재가 인간의 삶 속에서 나타났을까요? 틸리히가 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유를 내놓습니다.
우리의 경험의 한계 내에서는 오직 인격만이 완전히 발달한 자아이며,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에 마주하고 있는 존재이다. (187-188)
새로운 존재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를 통해 나타나는 것도 상상해 볼 수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간에게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고 틸리히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간이 가장 발달한 자아이며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기를 객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다른 이유도 들었는데, 눈여겨볼 만한 내용은 자유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만이 자유를 가지고 있고 그 자유 때문에 인간만이 운명을 가지고 있는데 새로운 존재는 이러한 실존 상태를 극복할 수 있어야 했다고 틸리히는 주장합니다.
인간에게서 새로운 존재가 나타났기 때문에 인간만이 실존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느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제외한 우주는 인간이 실존 상태를 극복하는 것에 관심이 없거나 혹은 인류에게서 새로운 존재가 나타난 것이 우주에게 의미가 없을까요? 틸리히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발생한 것은 생명의 다른 모든 영역에도 간접적으로 발생한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는 존재의 모든 수준들이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리학적인, 생물학적인, 심리학적인 영역들에 속하며, 또한 그들의 다양한 등급들과 그들 사이의 무수한 관계들에 예속되어 있다. 이로 인해서 르네상스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소우주'라고 불렀다. (188)
정리하면, 새로운 존재는 인류에게서 나타났고 한 인간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예수이고요. 한 사람을 통해서 새로운 존재가 나타났지만 이것은 인류뿐만이 아니라 전 우주에게도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고 틸리히는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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