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분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존재가 표현에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예수의 말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든 것이냐, 아니면 예수가 새로운 존재였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이 독특했느냐 둘 중에 후자가 맞다는 주장입니다. 예수가 좋은 말씀을 전해서 그리스도가 된 것이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좋은 말씀을 전했다는 것이죠.
그를 그리스도로 만든 것은 그의 존재이다.... 이로부터 뒤따르는 결론은 그의 말도, 그의 행위도, 그의 고난도, 그의 내적인 삶도 그를 그리스도로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189)
틸리히는 예수의 말과 행동과 고난이 그가 새로운 존재라는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지 그 표현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든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좋은 도덕 선생님으로 여겨야 한다는 주장은 많이들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존재 자체보다는 또는 그에 대한 신앙을 가지기보다는 그의 말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는 했습니다. 틸리히는 이에 대해 비판하고 이와는 완전히 반대로 주장합니다. 그의 말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이죠.
예수의 말들이 새로운 존재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로서의 예수가 말씀'이기' 때문이다. (190)
예수의 말이 힘이 있는 이유는 그 말 자체가 좋은 말이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로서 예수 그 자체가 말씀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의 말이 말씀이 아니라 예수 자체가 말씀이라는 것인데요. 예수 스스로가 새로운 존재이지 그의 말을 통해서 그가 새로운 존재가 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누군가가 예수와 똑같은 가르침을 전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새로운 존재가 될 수는 없는 것이죠.
행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가 특정한 행동을 통해서 새로운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그가 새로운 존재였기 때문에 특별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고 틸리히는 말합니다. 이 내용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행동을 모방함으로써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틸리히는 이를 반박합니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그 안에 현존하는 새로운 존재에 완전히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새로운 율법이고, 그와 같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함축적으로 요구된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그리스도를 모방하라는 명령으로 해석된다면 잘못된 결과들을 피할 수 없게 된다. (191)
우리는 예수를 새로운 존재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존재에 참여하고 예수와 같이 되어야 하는데, 그의 행위를 모방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틸리히는 주장합니다. 모방이 존재를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이죠. 아무리 예수와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새로운 존재가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가 했던 것처럼 40일 금식을 한다고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한 모방이죠. 그렇다면 모방과 참여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 차이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은 단순히 예수의 행동을 따라 함으로써 새로운 존재가 되려는 시도는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틸리히는 예수와 고난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틸리히는 예수에게 고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가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된 것이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고난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죄가 없었기 때문에 고난과 죽음을 당할 필요가 없었고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구세주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틸리히는 비판합니다.
그의 고난은 그의 폭력적인 죽음을 포함하며, 이 고난은 실존적인 소외의 세력들과 실존을 극복하는 새로운 존재의 담지자 사이의 불가피한 충돌의 결과이다. 고난과 죽음을 자신이 감당함으로써만 예수는 그리스도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는 실존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었고,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통일성을 파괴하려는 소외의 모든 세력을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2)
예수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고난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와 고난을 당하지 않는 그리스도. 틸리히의 관점에서 고난을 당하지 않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소외라는 실존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또는 소외의 세력에 저항하기 위해서 고난은 필수불가결적인 요소입니다.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이와 같은 고찰을 염두에 두고서, 우리는 예수의 말을 그의 존재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합리주의적 분리와 그의 행위를 그 자신의 존재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경건주의적 분리와 그의 고난을 그 존재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정통주의적 분리를 평가해야만 한다. 우리는 예수의 존재를 새로운 존재로 이해해야만 하며, 그의 표현들을 그리스도로서의 나타남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193)
틸리히의 그리스도론을 살펴보면서 계속 가지게 되는 질문은 새로운 존재란 과연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입니다. 존재라는 단어가 가지는 모호성 때문에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됩니다. 존재라는 단어 자체가 정의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존재란 무엇인가?"는 질문은 하이데거가 심각하게 답변했던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틸리히도 이 새로운 존재와 어떻게 그 존재에 참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구체적인 답변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그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존재라는 용어는 이것이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에게 적용된다면 실존적인 소외를 극복하는 그 안에 있는 힘을 지시하며,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소외의 세력들에 저항하는 힘을 지시한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를 경험한다는 것은 그 자신 안에 있는 실존적인 소외를 극복했던 힘을 경험한다는 것과 또한 그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 안에 있는 힘을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95)
새로운 존재는 힘이라고 틸리히는 언급하고 있고요. 새로운 존재를 경험한다는 것은 힘을 경험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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