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히는 예수가 받은 유혹은 아주 진지하고 심각한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만약에 예수가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 즉 신이기만 했다면 그가 받은 유혹은 심각한 것이 될 수 없죠. 그래서 전통적으로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실재적인 유혹의 가능성이 없었다면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본질적인 통일성(신-인간성)을 대표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8)
틸리히는 욕구와 욕망을 구별합니다. 사실 욕구와 욕망은 구별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거의 비슷한 뜻이죠. 틸리히가 썼던 단어를 보면 좀 더 구별하기가 좋습니다. 욕구는 actual desire 그리고 욕망은 concupiscence 라는 단어를 씁니다. 욕구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살려는 욕구,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싶은 욕구, 지식이나 명예를 얻으려는 욕구 같은 것은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없죠. 그런데 욕구가 욕망이 되면 문제가 발생한다고 틸리히는 말합니다. 욕망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욕망은 지나친 자기 중심성을 가지고 결합의 대상이 되는 존재를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이용한다는 데 있습니다. 틸리히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모든 것과 재결합하고자 하는 욕구를 포함하고 있는 천부적인 자기 초월과 어떤 것과도 재결합하고자 하지 않고 힘과 쾌락을 통해서 모든 것을 이용하려는 왜곡된 욕망 사이의 차이는 유혹의 상태 속에 있는 욕구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200)
사람이 욕구가 있기 때문에 유혹이 생기고 유혹으로 인해서 욕구가 욕망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욕구가 욕망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요. 그래서 금지, 또는 정당한 조건들이 필요하다고 틸리히는 지적합니다. 틸리히는 하나님 없이 욕구의 대상을 갖는 것은 항상 문제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즉 인간의 욕구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해소되어야만, 올바른 성취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에덴동산의 이야기에 대해서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담은 하나님 없이 영원성을 가져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가 하나님 없이 지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유비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200)
이 말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를 지키는 그룹들과 불칼을 둔 것에 대한 해설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허락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없이 영원성을 가지면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고요. 선악과도 마찬가지였다고 유추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없이 지식을 가져서도 안 된다는 것이죠. 왜냐면 생명에 대한 욕구, 지식에 대한 욕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없이 그것을 취할 때 그 욕구는 욕망이 되어버린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틸리히는 욕구와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했지만 사실 이 부분에서 틸리히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예수가 받은 유혹은 진지하고 심각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운명 속에서 유한한 자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결단은 인간의 결단과 유사한 것이죠.
유혹에 대한 굴복에 맞서는 그리스도의 결단은 그의 유한한 자유의 행위이며, 그 자체는 유한한 자유를 지니고 있는 모든 존재, 즉 모든 인간의 결단과 유사한 것이다. (201)
틸리히는 "운명 없는 자유는 단순한 우연성 contingency 이며, 자유 없는 운명은 단순한 필연성 necessity"이라고 말합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예수가 유혹을 받았지만 그 유혹을 거절한 것은 운명 속에서 유한한 자유를 가지고 결단한 것으로 필연성이 아닙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가 한 일은 쉽거나 당연한 일이 아니었으며, 예수도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욕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유혹을 받았고 자신의 유한한 자유를 가지고 욕구가 욕망이 되는 것을 막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창조성은 인간의 경우 그의 자유를 통해서 작용한다.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의 창조성에 '의해서'by 결정되지만 인간의 자기 결정, 즉 그의 유한한 자유를 '통해서' through 결정된다. (202)
틸리히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by 믿음을 통해 through 일어난다고 지적하는데, 이 말과 위의 말이 매우 비슷합니다. 창조성의 환경은 조성되어 있지만 완전히 확정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성이 완전히 확정되는 것은 인간의 유한한 자유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죠. 예수가 보여준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인간의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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