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히는 이 부분에서 삶의 모호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예수가 삶의 모호성에 참여했다고 주장합니다. 말이 어려운데, 삶이라는 것이 불확실하고 모호한 것인데 예수에게도 그랬다는 말입니다. 삶이 불확실하고 모호한 것은 인간의 유한성에만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여러 대상들 자체가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과의 모든 만남은 실천적인, 이론적인 불확실성의 짐을 지고 있다. 이 불확실성은 개인의 유한성에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인간이 만난 것의 모호성에도 원인이 있다. (205)
이 부분이 삶의 모호성과 예수가 그것에 참여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어서 그런지 내용 자체도 좀 모호한 것 같습니다.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고 좀 억지스러운 것 같은 내용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예수와 그의 적대자들 사이의 갈등이 비극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한다면 변화될 수 있다. 이것은 예수가 그의 적대자들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범죄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는 범죄의 비극적인 요소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6)
예수는 분명히 어떤 사람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는데요. 적대적인 관계를 만든 것에 대해서 예수가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적대자들이 범죄하는 데 일조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이 좀 억지스럽습니다. 내가 폭행을 당했다고 가정을 한다면 폭행을 한 사람들이 잘못한 것인데 그들이 나를 폭행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들이 죄를 짓는 것에 내가 일조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주장인 것 같아서 좀 억지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틸리히는 가룟 유다와 예수의 관계를 통해서 예수가 삶의 모호성에 참여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설명합니다. 이 설명이 더 이해가 잘 됩니다.
유단의 배반은 유다가 제자들의 친밀한 집단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게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가 판단의 오류란 유한한 실존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이미 이 점을 암암리에 언급했었다. (207)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가룟 유다가 배반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와 제자들이 그를 자신의 모임에 받아들여 주고 친밀하게 대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일종의 판단의 오류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죠. 예수는 이렇게 잘못된 판단을 함으로써 가룟 유다가 배신하는 죄를 범하는 데 기여한 부분이 있다고 틸리히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게 좀 억지스럽기는 한데 틸리히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삶은 모호한 것이고 예수도 인간이었기에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판단도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오류의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죠. 다시 정리하면 틸리히는 예수도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유한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삶도 불확실하고 모호했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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