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히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불확실성이나 불안을 제거하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불확실성과 불안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할 수만 있다면 없애고 싶어하죠. 사람들은 확실하고 안정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불확실성이나 불안을 제거하면 그런 존재를 더 이상 사람이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사람은 다른 어떤 존재보다도 불확실성을 많이 가지고 살아갑니다. 돌멩이를 생각해 볼까요. 돌멩이가 돌멩이로 태어나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요? 원하지 않는 장소가 가게 될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 정도가 가장 큰 일이 될 것입니다.돌멩이는 어디를 가더라도 돌멩이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이 태어나서 그가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만큼 인간은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불안하기도 한 것입니다. 불안의 원인이 그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예수는 특별했기 때문에 불확실이나 불안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하지만 틸리히는 그렇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의 존재인 새로운 존재 안에서의 실존적인 소외의 극복은 유한성과 불안, 모호성과 비극을 제거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극복은 실존의 부정성들을 하나님과 깨어지지 않는 통일성 안으로 받아들이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은 제거되지 않는다.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 곧 그의 이끄시는 창조성에 대한 참여 안으로 받아들여진다. (208)
예수의 유한성, 그리고 그로 인한 불확실성과 불안은 제거되지 않습니다. 예수의 일생을 보면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심해지죠. 불안과 불확실성은 점점 더 커지다가 결국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일이 점점 커지다가 파국에 이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는 불안과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창조성 안으로 불안과 불확실성을 끌고 들어오죠.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꼭 붙잡아서 불안하고 불확실한 삶을 살아갑니다. 틸리히는 진리 안으로 의심을 끌어들일 수 없는 사람은 의심을 억누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합니다. 그런 사람은 광신도가 된다고 말하죠. 광신도는 의심을 하지 않죠.
하지만 성서의 모습에는 어떠한 광신의 흔적도 없다.예수는 유한한 확신에 대해 절대적인 확실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제자들의 광신적인 태도를 배격한다. (209)
그러니까 예수는 유한성과 부정성이라는 인간의 실존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그것을 극복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는 늘 하나님과 하나가 된 통일성을 늘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 된 상태를 유지한 채 불안과 불확실성을 받아들였다는 것이죠.
이 모습은 심각한 유혹도 없고, 현실적인 갈등도 없으며, 삶의 모호성에 대한 비극적인 관여도 없는 신-인 자동기계(divine-human automaton)의 모습이 아니다. 그 대신에 이것은 실존적인 소외의 모든 결과들에 종속되어 있는 한 인격적인 삶의 모습이다. 물론, 그의 모습 속에는 소외가 그 안에서 극복되어 있고 하나님과의 영구적인 통일성이 유지되고 있다.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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