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 누가복음 4:14-21_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설왕은31 2022. 1. 23.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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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시: 2022년 1월 23일 오전 11시 

장소: 분당성화감리교회

 

성경 본문
(눅 4:14-21, 개정) 『[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인사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이 예배에 함께 하시는 모든 분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은혜가 넘치도록 임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022년이 시작된 지 이제 벌써 한 달이 되어 갑니다. 2022년에는 어떤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해마다 무슨 새로운 계획을 세울 것이 있겠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목표를 세우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삶이 참 바쁩니다. 시간이 막 휙휙 흘러갑니다. 목표가 없으면 해야 하는 일을 처리하는 데 온통 시간을 다 써버리게 됩니다. 목표가 없으면 해야 하는 일만 하게 됩니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다를 때가 많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삶이 더 풍성해집니다. 신앙적인 계획도 좋고 아닌 것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올해는 유화로 멋진 풍경화 한 점을 그려보겠다고 계획을 세워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림은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감상문 같은 것이죠. 제 생각에는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시고 목표를 세우고 실천에 옮겨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본문 설명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4장 14절부터입니다.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돌아가셨고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 가셨다가 돌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디 가셔서 한 일이 꽤나 굉장했던 일이었나 봅니다.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고 나와 있는 걸 보면 그렇습니다. 그 소문이 무엇이었는지 본문의 앞부분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금식을 하시고 사탄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은 사건이었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사람들이 놀랄 만한 금식을 하고 그 이후에 사탄에게 시험을 받고 그것을 물리친 것만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범한 사람으로 대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5절에 나온 것과 같이, 예수님이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그 내용이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살던 동네인 나사렛으로 돌아갑니다. 나사렛에서도 예수님은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성경을 읽으려고 섰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 두루마리가 예수님께 건네졌습니다. 그 당시 성경은 우리가 보는 성경과는 당연히 달랐습니다. 우리도 요새는 성경책을 잘 안 들고 다니죠. 요새는 화면으로 성경 본문이 나오니까 성경책을 펼쳐서 조그만 글씨로 보려고 하질 않습니다. 예수님이 살던 당시에도 성경책을 들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성경책이 너무 귀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회당에 가면 성경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책이 아니라 특수 처리된 동물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두루마리였습니다.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둘둘 말려 있었습니다. 이사야처럼 긴 책은 하나의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고 소선지서와 같이 짧은 책들은 여러 개를 모아서 하나의 두루마리로 만들었습니다. 회당에 간다고 아무나 또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허락된 사람만이 성경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랍비의 칭호를 가진 사람들은 회당에서 성경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특권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성경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와 같은 구절이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셔서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고, 그때 이사야서를 기록한 두루마리를 건네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두루마리를 펴서 읽으려는 부분을 찾으셨을 것입니다. 이사야서가 66장까지 있는데 예수님이 읽으신 구절은 61장 1절과 2절 말씀입니다. 아마 원하는 구절을 찾는 데도 시간이 좀 걸렸을 것입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은 4장 18절과 19절에 나온 말씀이 바로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제가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읽으시고 성경을 다시 말아서 관리하는 사람에게 넘겨주고 앉으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주목해서 본 이유는 이미 예수님의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실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누가복음에 나온 것에 따르면 예수님은 단 하나의 문장만을 말씀하셨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번역이 좀 부자연스럽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번역했는데 좀 더 자연스러운 말로 바꿔보면 이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들은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멋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감탄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오, 예수님 멋있다.’ ‘오, 예수님 카리스마’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이 매우 짧으면서도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을 것임에 분명하고, 동시에 부인할 수 없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일종의 설교를 하신 것입니다. 성경의 한 부분을 읽고 자리에 앉으셨을 때 사람들이 주목하여 본 것은 이 시간은 단지 성경을 읽는 시간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랍비의 설명이나 해석을 듣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랍비들이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설명하는 시간이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지금도 교회마다 설교 시간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 같습니다. 어떤 랍비는 길게 설명하고 어떤 랍비는 짧게 설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짧아도 너무 짧았습니다. 진짜 한 문장을 말씀하셨는지 아니면 조금 더 길게 말씀하셨는데 성경에 한 문장으로 기록이 된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앞뒤 문맥이나 상황을 보면 아주 짧게 말씀하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더 긴 말씀이 필요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한 말씀인 “오늘 여러분이 들은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라는 말은 “오늘 들은 이 말씀이 저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의 표현을 빌리자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주의 은혜의 해 또는 구원의 날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선언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포로가 풀려나고 눈먼 자가 다시 보게 되고 눌린 자가 자유롭게 되는 날은 곧 구원의 날입니다. 사람들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들으면서 과연 이 예언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지 궁금해하고 또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예언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시니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이 더 이상 예언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설마’라고 생각했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벌써 ‘그 소문’, 예수님이 금식하고 사탄을 물리친 사건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다른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을 들은 사람들이 내린 예수님에 대한 극찬의 평가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상상을 합니다. 예수님처럼 설교를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말씀을 한 구절 읽고 나서 “여러분이 오늘 들은 이 말씀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하고 설교를 끝내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끝냈는데 듣는 분들이 ‘뭐지?’라고 의문을 품으시면 그 설교는 실패이고, ‘맞아’라고 생각하며 감동을 받으시면 그 설교는 성공일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말씀이 저를 통해 육신이 되었고 그리고 저의 삶이 말씀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을 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전도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 어떤 분에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말을 하고 그것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설명해야 한다면 아마 전도가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말을 했을 뿐인데 듣는 사람이 그 말에 긍정하고 감동을 받는다면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그 말이, 말하는 사람을 통해서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하는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말을 길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길게 설득할 필요도 없이 말하는 사람의 삶이,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한 가지만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의 일부를 읽으셨는데, 그 예언을 보면 성령이 예수님께 임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왜 성령이 예수님께 임했을까요? 사람들이 예수님께 성령이 임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소문’이 퍼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소문은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로 가셔서 사십 일을 금식하고 사탄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고 사탄을 물리치신 사건에 대한 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님께 임한 것은 예수님에게 사탄을 물리치게 하려는 목적이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정말 의외로 예수님께 성령이 임한 것은 소소한 이유에서였습니다. 첫 번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가 첫 번째 이유입니다. 이사야서 61장 1절을 보면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좋은 소식 또는 아름다운 소식은 무엇일까요? 가난한 사람들이 어떤 소식을 들으면 그것이 좋은 소식 또는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생각할까요? 제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소식이 가장 좋은 소식이 될 것 같은지 생각해 보세요. 

1.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원을 대폭 늘리기로 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가난하게 살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밥 굶을 걱정은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
2. 당신은 100억짜리 복권에 당첨되었어요. 이제 당신은 부자입니다.
3. 당신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4. 당신은 지금은 가난하지만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어떤 소식이 가장 좋은 소식이 될 수 있을까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 또는 이제 당신은 부자라는 소식이 아마도 가난한 사람에게는 좋은 소식 또는 아름다운 소식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하신 좋은 소식은 세 번째 예였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개정)

그런데 사실 이게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4장 18절에 나온 구원의 날에 일어날 다른 사건들을 보십시오. 포로 된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포로 된 자는 풀려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눈먼 자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면 좋을까요? 당연합니다. 물어보나 마나입니다. 눈먼 자가 다시 보게 된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눌린 자는 그만 눌리면 좋은 일입니다. 다른 것은 다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가 되는데, 가난한 자에 대해서는 우리가 기대하는 말이 없습니다.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된다는 말이 없습니다. 

 

가난하면, 살기 힘들고 하루하루가 고생스럽고 불편한 일도 많지만, 사실은 가난한 것이 복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가난한 자에게 전달되는 좋은 소식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이라는 것이 실제로 가난한 것이 아니라 비유의 표현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해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산상수훈의 시작이면서 팔복의 시작인 마태복음 5장 3절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개정)

이 구절은 예수님이 실제로 이렇게 말씀했을 수도 있지만 저자의 해석이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그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마태가 심령, 즉 마음이라는 말을 집어넣어서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을 첨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가난’이라는 말이 비유적인 표현이냐 아니면 문자 그대로의 의미냐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가난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마음은 가난하더라도 몸은 부유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천국도 소유하고 싶고 세상에서도 부자로 떵떵거리고 살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양손에 떡을 쥐고 싶은 것입니다. 세상의 돈도 갖고 하늘의 축복도 갖겠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동시에 둘 다 가질 수만 있다면 좋을 것 같기는 합니다. 마음만 가난하면 되지, 몸까지 가난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난’이라는 것은 실제로 가난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가난 또는 마음의 가난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주장은 제가 볼 때는 눈 가리고 아웅이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주장입니다. 

 

‘가난’이 비유의 표현인지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지 아는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이렇게 질문하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부자로 사셨습니까, 아니면 가난하게 사셨습니까? 몹시도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런데 가난이 정말 나쁜 것이라면 왜 예수님이 가난하게 사셨겠습니까? 예수님은 가장 좋은 것을 취해서 사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로 살려고 마음먹었다면 충분히 그렇게 사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병이어 식당’ 같은 것 차리셨으면 어땠을까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는데 오병이어 식당 차리셔서 장사를 하셨다면 금방 부자가 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진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힘이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것이라는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눈먼 자의 눈을 정말 뜨게 해 주고 말 못 하는 자의 입을 열어 주고 죽은 자를 살려주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한센병을 앓는 자를 깨끗하게 해 주는 일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가난한 자를 부자로 만들어 주는 기적을 베푼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부자가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하면 칭찬하시고 때로는 부유한 자에게 가진 것을 모두 다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권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전에 이런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대학교 별로 학생의 특징을 다룬 우스갯소리였습니다. 연애할 때 여자 친구가 춥다고 말하면 학교 별로 남자 친구의 반응이 다르다고 합니다. “자기야, 나 너무 추워”라고 여자 친구가 말하면, 연세대 다니는 남자 친구는 “우리 자기 너무 춥지” 하면서 자기 옷을 벗어서 여자 친구에게 입혀 준다고 합니다. 육사 다니는 남자 친구는 여자 친구가 춥다고 하면 “추워? 그러면 뛰자”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서울대 다니는 남자 친구는 여자 친구가 춥다고 하면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나도 추워”라고 한다고 합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들은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가난해서 힘들 때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제가 너무 가난해서 힘들어요. 저 좀 도와주세요.” 아마도 예수님의 반응이 서울대에 다니는 남자 친구의 반응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가난해. 난 너보다 훨씬 더 가난해.” 아마 여기에서 이렇게 한마디 덧붙일 수도 있습니다. “근데, 가난 그거 나쁜 거 아니야. 좋은 거야.” 농담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못되게 말씀하실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돈이 없어서 가난해서 힘들다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라고 저도 믿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할 것은 성령이 예수님께 임했기 때문에 그가 해낸 것은 가난하게 잘 사는 삶,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사랑하는 성화 공동체 가족 여러분. 돈이 없다고 슬퍼하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하거나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가난해도 하나님 나라에서 살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저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가난해야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까워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식적으로 하신 첫 번째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첫 번째 설교입니다. 주의 성령이 예수님께 임하셨는데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일어난 일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전파된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훨씬 더 잘 받아들인다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잘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예수는 ‘가난한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알라딘을 왕자로 만들어줄 수 있는 램프의 요정 지니도 아니고 돌을 금으로 바꿀 수 있는 방망이를 가지고 있는 도깨비와 같은 분도 아닙니다. 죽은 후에 여러분을 부자로 만들어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실 때는 가난하게 사셨지만 지금은 천국에서 황금 의자에 앉아 계실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가난하게 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삶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인간다운 삶을 이룰 수 있는 삶이라는 것을 친히 보여주신 분입니다. ‘에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이어서 들으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들은 이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지금 이 예배에 함께 하시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가난했던 예수님은 분명히 잘 사셨고 행복하셨고 가장 인간답게 사셨습니다. 확실하게, 예수님 자신이 가난한 자에게 좋은 소식이 되셨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오늘 말씀을 듣고 가난해져야겠다고 결심하지는 마십시오. 그런 결심이 필요한 사람이 간혹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섣불리 결심하고 실천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삶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두렵지만 감히 축원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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