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 누가복음 9:28-36_그의 말을 들으라

설왕은31 2022. 3. 2.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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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시: 2022년 2월 27일 변화 주일

설교 장소: 분당성화감리교회

 

 

 

본문
(눅 9:28-36, 개정)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라파엘로 "그리스도의 변화"



인사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이 예배에 함께 하는 모든 분에게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온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설교를 할 때마다 어떤 축복의 말을 할까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면 제 대답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거의 일치합니다. 아홉 가지 다 기억하기는 어려운데 앞에 세 가지만 있어도 그 삶은 참 축복받은 삶일 것입니다. 앞에 세 가지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입니다. 사람들이 돈을 참 좋아하는데요. 사실 사람들이 돈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아름답거나 좋은 향기가 난다거나 신기하거나 재밌는 것이 아닙니다. 돈은 수단이죠. 돈으로 뭔가 살 수 있으니까 돈을 좋아하는데 결국 우리가 갖고 싶은 것은 돈 자체가 아니라 사랑, 기쁨, 평화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과 기쁨과 평화는 돈이 없어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하까요? 우리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주일 오전 시간에 설교에 집중하기 쉽지 않으실 텐데요. 듣다 보면 중간에 정신이 혼미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일단 사랑과 기쁨의 평화의 축복을 받으십시오. 다시 한번 축복합니다. 우리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과 저에게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본문 설명
오늘 본문 말씀으로 들어갑니다. 누가복음 9장 28절은 앞에 있는 내용과 이어집니다. 28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이 구절을 빼도 28절은 아무런 이상 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빼고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사.”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28절의 앞에 있는 구절,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라는 구절은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가 일부러 붙여놓은 것입니다. 의도가 있었겠죠? 누가복음의 저자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일어난 사건을 독립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 있는 일과 연결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말씀’이 무엇인지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부분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내용이 있지만 제자들과 누가의 뇌리에 남은 내용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 ‘고난’과 ‘죽음’을 언급하신 것인지 조금 더 앞에 있는 부분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사건이 나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이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신 후에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하신 후 팔일 쯤에 일어난 일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요한 사건은 예수님이 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을 변화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일관성이 없는 사건이 서로 붙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는데 예수님은 갑자기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난과 죽음이 목전에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면 그다음에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 하겠습니까? 아마도 나쁜 사건이 일어나야 일관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일어난 사건을 전혀 그런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고난과 죽음이 예견되는 나쁜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영광스럽고 황홀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는데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하얀색으로 바뀌면서 광채가 났습니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는데 두 사람은 바로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고 추앙하는 인물이 예수님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이 나타난 것이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이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이 적어도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정도의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 대화의 광경은 눈부시게 놀랍고 황홀한 것이었는데 그 대화의 내용은 우울한 것이었습니다. 대화의 주제는 예수님의 죽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장면을 거의 놓칠 뻔했습니다. 32절에 보면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라고 나와 있습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가시면 제자들은 함께 기도하지 않고 자주 잤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은 왜 졸고 있었을까요? 단순하게 피곤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예수님이 매우 자주 기도하러 가자고 했고 제자들이 억지로 따라나섰기 때문에 깊이 졸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특별히 서운해하거나 나무라지는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붙잡히시기 전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는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또 잤습니다. 그때는 좀 서운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한 소리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었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기도하러 가셨는데 제자들은 또 잤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이 날도 깊이 졸고 있었습니다. 이 대단한 광경을 놓칠 뻔했던 것이죠. 베드로와 제자들이 같이 깊이 졸다가 눈을 딱 떠보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엄청난 내공이 느껴지는 두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을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유명하기는 했지만 얼굴을 제대로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몰랐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과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 동시에 나타나면 우리도 정확하게 얼굴이나 겉모습을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느낌이 팍 올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을 때 알아봤을 수도 있지 않을까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나중에 예수님께 물어보고 확인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는 베드로가 감히 끼어들지 못하다가 두 사람이 떠날 것 같자 예수님께 말을 걸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하나는 선생님을 위해서, 다른 하나는 모세를 위해서 마지막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짓겠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말에 뭐라고 대꾸를 하지 않으셨는데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었습니다. 갑자기 구름이 와서 덮으니 제자들은 무서워했습니다. 그러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소리가 그쳤고 구름도 걷혔습니다. 그러자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고 제자들의 눈에는 예수만 보였습니다. 제자들에게 이 사건은 놀랍고 두려운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지만 제자들은 한 동안 이 사건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기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서 광채가 난 사건이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실 때 그런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29절에 보면 “기도하실 때”라고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성경에는 한 번밖에 없었던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건이 더 일어났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단지 제자들에게 목격된 것이 한 번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때도 모를 뻔했습니다. 제자들이 깊이 졸고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무슨 일 때문인지 갑자기 깨어났는데 그때 예수님의 용모가 변하고 옷이 희어진 것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건이 한 번만 있었는지 아니면 여러 번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런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기도할 때 예수님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기도할 때 일어났던 일은 우리가 기도할 때 바라는 일과는 좀 다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간구하는 바가 응답되기를 원합니다. 만약 우리가 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면 우리는 병이 낫기를 위해서 간구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원하는 변화는 병이 낫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원하는 것이 있고 그 원하는 것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는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을 것에 대해서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고난과 죽음을 벗어나는 것을 말하며 그렇게 되기를 바랐을 텐데 예수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원했던 것은 고난과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도하면서 고난과 죽음이 더 확실해졌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무력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기도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시간을 내서 공부를 하면 지식을 얻을 수 있고, 운동을 하면 근육도 키우고 건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일을 하면 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기도를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고 그 원하는 것을 간구했는데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 기도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 여기서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기도를 해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기도를 함으로써 스스로가 아름답게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하고 얼굴색이 환해지고 덩달아 옷에서도 빛이 났습니다. 이런 일이 단지 예수님에게만 일어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또 다른 사례가 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과 대면하였을 때 얼굴에서 광채가 났던 적이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가끔 그렇게 느끼신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교회에서 한참 동안 기도하고 나왔는데 그 사람을 딱 마주쳤을 때 얼굴이 환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기도하면 아름다워진다, 기도하면 이뻐진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예뻐지려고 기도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뻐지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기도는 나보다 나에게 더 가까이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말을 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말을 걸 때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마치 백열전구를 소켓에 끼울 때와 비슷합니다. 백열전구를 돌려서 소켓에 끼우면 불이 반짝하고 들어오게 됩니다. 백열전구는 그러라고 있는 것입니다. 불을 켜기 위해 있는 것이지만 소켓에서 전기를 공급받지 못하면 그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빛이 났던 것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기도할 때 확실하게 자신의 모습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자신이 겪어야 할 고통과 죽음을 향해서 예수님은 뚜벅뚜벅 걸어 나가셨습니다. 그럴 때 그의 용모는 아름답게 변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기도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자신의 모습을 찾아갑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과 대화할 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보다 나에게 더 가까이 계신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차분히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들어라, 쫌!
오늘 우리가 본문 말씀을 통해서 기억해야 할 두 번째 가르침은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 33절에 보면 성경에서 보기 드문 말이 나옵니다. 제가 알기로는 성경에 이런 표현은 여기밖에 없습니다. 베드로가 무슨 말을 했는데 자기가 하는 말을 알지 못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베드로의 말은 이런 말이었습니다. 


“와, 예수님 여기가 너무 좋습니다. 우리 여기서 삽시다. 제가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하나는 예수님 것, 하나는 모세의 것, 하나는 엘리야의 것으로 하면 되겠습니다. 우리는 초막이 없어도 좋으니 우리 여기에 삽시다.”


베드로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베드로가 경험한 일은 베드로의 삶에서 최고의 기적으로 기분이 진짜 좋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황홀경에 빠진 것이죠. 그러니까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을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탄성을 지를 때가 있습니다. “헐, 대박”과 같이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게 말이 새어 나올 때가 있습니다. 또는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너무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 자기도 모르게 욕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평소에 욕을 자주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일은 더 쉽게 일어나겠죠. 그런데 그런 욕에는 특별히 아주 나쁜 뜻은 없습니다. 그냥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 채 나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한 말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길게 말을 하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는 하지만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얼마나 많은 기적을 보고 경험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경험 중에서도 이 경험이 단연코 최고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막을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여기에 머물자고 한 말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서 고난을 받고 죽을 것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한 말의 의도가 불순하다고 의심할 수 있는데 그런 것은 아니라고 누가복음의 저자가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한 말에 대해서 예수님은 대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구름이 제자들을 둘러싸고 앞뒤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렇게 해라, 그러지 말아라 하는 식의 대답을 하지는 않으시고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있어도 좋다, 또는 안 된다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예수의 말을 잘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듣다는 말은 순종하라 또는 따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문자 그대로 잘 들으라는 말입니다. 그리스어 원어로는 ‘아쿠오’라는 말입니다. 어쿠스틱 기타와 같은 말에 나오는 어쿠스틱의 어원이 되는 말이 이 ‘아쿠오’라는 말입니다. ‘아쿠오’라는 말은 순종, 복종의 의미가 아닌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거나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돕는 것은 일단 그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들은 다음에 나올 수 있는 행동입니다. 먼저 필요한 것은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제대로 듣는 것이 먼저 필요한 행동입니다.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말했지만 제자들은 아예 그 말 자체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 말 자체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이고 흘려들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그 말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은 한참 잘 나가고 계셨거든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예수님은 아름답게 변하고 옷에서 광채가 나는 신기한 일을 경험하는 와중에 고난과 죽음에 대한 말이 그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안 따르고는 부차적인 문제이고 일단은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제대로 듣는 것이 먼저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맨날 같이 돌아다니고 같이 먹고 자고 같이 기도하고 수많은 기적을 보고 맨날 예수님 말씀을 들으니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은 그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말하자 그들은 귀를 닫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구름 속에서 예수님의 말을 잘 들으라는 음성이 들려왔던 것입니다. 

적용
사랑하는 성화 교회 가족 여러분, 오늘 말씀을 잘 기억하십시오. 오늘 제가 두 가지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첫째 기도하면 예뻐진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으라입니다. 사실, 제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떠올랐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만 덧붙이고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어느 집사님 부부가 있었는데, 예배 설교 시간마다 남자 집사님이 계속 조는 겁니다. 사실 설교를 하는 목사님이 볼 때는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습니다. 가끔 조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번번이 설교 시간에 눈을 감고 있는 성도를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목사님이 참다 참다못해서 어느 날은 드디어 여자 집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 집사님, 옆에 앉은 남편 집사님 좀 깨우세요. 예배당은 잠자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자 김 집사님이 이렇게 말하셨답니다.
“재운 사람이 깨우십시오!”

우스갯소리인데, 이 안에는 날 선 공방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과연 잘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자고 있는 남자 집사님, 아니면 안 깨운 여자 집사님, 아니면 남자 집사님을 재운 목사님, 과연 누가 잘못하고 있을까요? 목사님은 자고 있는 남자 집사님과 안 깨운 여자 집사님을 동시에 나무라고 있고, 여자 집사님은 남편을 재운 목사님이 잘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남자 집사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교회에서 와서 예배 시간마다 잘 거면 뭐하러 교회에 오냐고 그냥 집에서 편하게 자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베드로에게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 속 목사님이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까? 아닐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무려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는 데도 참 열심히 졸았습니다. 맨날 자는 남편을 데리고 오는 여자 집사님이 문제였을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에게도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 기도할 때 베드로 데려가지 마세요. 베드로는 맨날 잡니다.” 베드로는 교회 와서 늘 졸고 있는 남자 집사님과 비슷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예수님의 훌륭한 수제자라고 생각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을 같이 지냈는데도 이렇게 어설펐습니다. 기도회 때 맨날 졸았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막 말했고,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안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이 자든 말든 열심히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이렇게 한심했던 베드로는 어느 날 뜻밖에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화된 모습을 목격했고 나중에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을 이해했고 결국 예수님의 뜻에 온전하게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해피 엔딩이죠.)


그러니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 자리가 참 소중합니다. 졸리거나 지루하거나 아무 느낌이 없더라도 꼭 이 자리를 지키십시오. 나의 배우자가, 우리 자녀들이, 친한 이웃이 교회에 와서 늘 깊이 졸더라도 데리고 오십시오. 베드로가 보았던 영광스러운 광경이 임할 수도 있고, 언젠가 때가 되면 우리에게도 그들에게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리고 저도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기도로 영혼에 불을 켜서 세상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설교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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