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20:24-29, 개정)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인사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예배하러 오신 모든 분에게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온전히 임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요새 마스크를 제외한 코로나 방역 조치가 완전히 해제되어서 오래간만에 거리와 상점에 활기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가 처음 발생했을 때는 이제 앞으로는 코로나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고 겁을 주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런 말을 들으면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금방 일상을 회복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참 길었습니다. 2년이 넘게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QR코드를 찍고 손소독제를 수시로 바르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못 만나고 같이 밥 먹고 싶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면서 조금만 더 참자고 말하며 버텨왔습니다. 이제는 거의 끝에 도달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실외 마스크까지 해제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다음 달에는 코로나에 걸린 사람도 격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소중한 일상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본문 설명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주일이 부활절이었고 오늘은 부활절 후 첫 번째 주일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본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날이 바로 부활절이었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목격한 이후에 당연히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멀리서라도 본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을 맞고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힌 상태로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쏟고 옆구리에 창을 맞아서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제자들에게 전했고 제자들은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일요일 저녁에 함께 모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한 이후였기 때문에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중범죄자와 같이 어울려 다녔다는 것만으로도 해코지를 당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녁에 모여서 모인 곳의 문들을 꼭 닫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을 전하시면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과 3년을 동고동락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몰라볼 리 없었겠지만 십자가에 못박혔던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에 십자가 처형의 흔적을 보여 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도마는 없었습니다.
주중에 제자들과 도마가 만났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말했죠.
“우리가 예수님을 보았소.”
도마는 그 말을 당연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유별나게 의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부활절 주일 저녁 예수님이 나타난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도마를 “의심 많은 도마”라고 부르는 것은 그에게는 억울한 일입니다.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믿을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았다는 제자들의 말에 도마가 말합니다.
“내가 그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소.”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또 일요일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또 모였습니다.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문을 꽁꽁 닫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평강을 전하시면서 도마에게 말을 거셨습니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보고 손을 내밀어서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래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러자 도마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었다. 나를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은 복되도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상처까지 내어주는 예수
우리에게 도마라는 이름은 좀 특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의 집에 도마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하나 보통은 두 개 이상의 도마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도마를 꺼낼 때 마음속으로 이렇게 이렇게 말하면서 도마에게 핀잔을 줍니다. ‘으이구, 의심 많은 도마’ 그리고 좀 혼내 주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그런 기분이 들 때면 열심히 칼질을 하죠. 아프게.
항상 도마의 이름 앞에는 ‘의심 많은’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고는 합니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찬찬히 상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단, 도마에게 ‘의심 많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났을 때 도마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마에게 왜 거기에 없었느냐고 따져 물을 수는 있겠지만 도마에게 ‘의심 많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고 한다면 의심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른 제자 누구라도 도마처럼 부활절에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면 의심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고 도마를 변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도마가 한 말을 곰곰이 잘 생각해보면 좀 섬뜩합니다. 다시 한번 도마가 한 말을 살펴봅시다. (감정을 넣어서)
“내가 그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소.”
저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직접 봤다고 했을 때 도마가 그 말을 듣자마자 즉흥적으로 이 말을 했는지 아니면 시간을 두고 생각을 해서 이 말을 했는지 궁금했습니다. 왜냐하면 도마의 말이 대단히 구체적이고 상당히 날이 서 있는 ‘계획’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도마의 상황이었다면 아마 “내가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전에는 너희들 말을 못 믿겠어”라고, 이 정도로 말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목격했다는 제자들의 말을 도마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받아칩니다.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은 아마 손가락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마가 손가락을 넣어 보겠다고 말하고 있고요. 창으로 찔린 옆구리는 구멍이 더 커서 아마 손이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마가 자신의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겠다고 말한 것이겠죠. 이 문장을 읽으며 상상을 해 보면 흠칫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이 당한 상처를 만져봐야 하겠다고 다가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백이면 백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칠 것입니다. 누군가가 의도치 않게 나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건드린다면 자연스럽게 비명이나 욕이 나오고 원망의 눈초리로 상대방을 쏘아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나의 상처를 건드린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요? 아마도 그 사람은 나를 죽이려는 원수나 적군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우리는 상처를 당한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 상처는 건드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한다고 가르칠 필요도 없습니다. 상식이고 인지상정입니다. 도마가 자신이 사랑하고 3년 간 함께 생활했던 예수의 상처를 만져보겠다고 한 발언은 사실 정상적인 발언이 아닙니다. 이 말을 통해서 도마의 마음과 정신이 매우 피폐한 상태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죽고 그로 인해서 함께 생활했던 공동체가 흩어지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신념이 완전히 무너지고 자신의 생명마저 위협을 받는 상황 속에서 제정신을 차리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도마는 예수님의 상처를 직접 만져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죠. 그런 도마에게 예수님은 다가서셨습니다.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내어 놓으시며 만져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 보았을까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나중에 화가들이 예수의 손과 옆구리에 손을 내밀거나 예수님의 상처를 만지는 도마를 주인공으로 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중세 시대에 성경의 내용을 주제로 하는 많은 그림이 그려졌는데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에 손을 대려고 하거나 대는 장면을 그린 그림을 그들은 실제로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 보았다고 추측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도마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았는지에 대한 사실 여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도마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허락하셨으니까 과감하게 만져 보시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에 손을 대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그의 말씀을 들었을 때 도마는 정신을 차렸을 것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의 상처에 손을 대보겠다는 것이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기괴한 발상인지 깨닫고 감히 예수님의 상처에 손을 뻗는 시도를 감행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광기 어린 도발에 뒷걸음질치지 않으시고 자신의 상처를 열어 보이시며 다가서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자신의 상처까지 내어주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사실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상처를 보호합니다. 건드리면 아프니까요. 예수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금방 상처가 아물어서 만져도 아프지 않게 되었을까요?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손의 못 자국과 그의 옆구리의 창 자국은 아직 제대로 아물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상처는 몸의 상처일 뿐만이 아니라 가룟 유다에게 배신당하고 제자들에게 버림받고 사람들에게 외면받은 마음의 상처와도 연결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보통은 몸의 상처를 건드리면 마음의 상처에서도 피가 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아픔을 감수하시고 도마를 위해서 자신의 상처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어느 누가 예수님처럼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사랑은 파헤치고 파헤쳐도 그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반드시 믿는 자가 되십시오
예수님이 자신의 상처까지 내어주는 사랑을 하면서 도마에게 원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믿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몰론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으니까 믿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꼭 믿는 사람이 될 필요 없이 믿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도 괜찮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사이의 관계는 빨간색을 좋아하는 사람과 파란색을 좋아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와 같지 않습니다. 빨간색을 좋아하는 사람과 파란색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빨간색을 좋아하지 말고 파란색을 좋아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냥 취향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경우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사람보다는 믿는 사람이 더 낫고 따라서 믿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지금 모습이 제일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고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사랑할 때도 비슷합니다. 우리의 자녀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재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귀하고 사랑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자녀들에게 원하는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상처까지 내어주면서 도마에게 원하셨던 바는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보다 믿는 사람이 훨씬 더 좋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세상에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낫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 구분을 하십니다. 믿는 사람 안에도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보고 믿는 사람 그리고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 이렇게 두 부류로 구별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 어떻게 보면,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이 보고 믿는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예수님을 보고 믿는 것과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는 것 사이에 선택할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저라면 예수님을 보고 믿는 것을 선택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셨지만 보고 믿는 사람은 복되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더 복된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도마가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강조하고 싶으신 것은 믿음입니다. 보고 믿는 것과 보지 않고 믿는 것 사이에 어느 쪽이 더 위대한 것인지 그 우열을 가르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든 믿는 사람이 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설사 보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믿는 사람이 되라고 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더라도 눈에 보이는 확증을 얻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믿는 사람이 되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앞으로 자신을 보지 못하고 믿게 될 수없이 많은 사람을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마치는 말
오늘 설교 제목이 “상처와 믿음”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예수님의 사역은 마지막까지 참 어려웠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보통은 기승전결이 있습니다. 그래서 갈등이 심화되고 일이 점점 커지더라도 결말 부근에 이르면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일이 정리되면서 즐겁고 차분하게 끝이 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도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갈등과 긴장이 최고조에 다다르지만 예수님이 부활하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해피엔딩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도마의 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지만 제자들의 마음에 상처가 깊이 났습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에 손을 넣어 보겠다고 하는 것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져보고 확실하게 확인하겠다는 의도로 한 말이 아니라 그의 마음에 난 상처에서 피가 철철 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보통 심하게 상처받은 두 사람이 만나면 ‘상처대결’이라는 것을 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상처가 더 아픈 상처라고 상대방에게 호소하면서 자신의 고통에 공감하고 자신의 상처를 돌봐 달라고 요청합니다. 상대방의 상처도 만만치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그래 네 상처가 내 상처보다 더 아플 수 있겠구나” 하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상처대결을 하면 승부가 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이 대결에서는 물러섬이 없습니다. 사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내 상처는 내가 고통을 느끼지만 남의 상처는 짐작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손에 박힌 못보다 내 새끼손가락에 박힌 작은 가시가 더 아픈 법입니다. 도마도 그랬습니다. 도마와 예수님 중 누가 더 큰 상처를 받았을까요? 예수님일 것입니다. 그러나 도마는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서라도 자신의 상처를 치유받고 싶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상처대결에 나서고 다른 제자들이 판정을 해 주었다면 예수님이 충분히 이길 만했습니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네가 나한테 왜 이러는지 알겠어. 하지만 내가 더 아팠거든. 십자가에서 죽음의 고통을 당한 나에게 네가 이럴 수 있어? 네가 내 상처를 만지겠다고? 지금까지 내가 받은 고통이 부족했던 것 같니?”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뜻밖이었습니다. “그래 만져라. 네가 많이 아팠구나. 너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면 내가 조금 더 아플게.”
사랑하는 성화 교회 가족 여러분, 세상 어디에서 이런 사랑을 보거나 들은 적이 있습니까? 우리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면 세상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상처가 있다면 그 상처를 가지고 소리를 지르면서라도 예수님께 오십시오. 또는 여러분 중 어떤 분은 도마처럼 예수님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도마도 예수님을 쫓아다니지 않았다면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이상한 불안 증세를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느끼는 분들도 예수님께 오십시오. 오셔서 예수님의 상처에 붙으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조금 더 아프기로 마음먹으셨습니다. 대신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마시고 반드시 믿는 자가 되십시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절망감에 휩싸여 두려움에 벌벌 떠는 부활절의 제자들처럼 숨지 마시고, 세상에 나가서 담대하게 믿음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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