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1:1-14
장소: 분당성화감리교회
일시: 2021년 12월 25일 오전 11시 예배
(요 1:1-14, 개정)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의 특징
오늘 읽은 본문은 요한복음 1장입니다. 요한복음의 첫 부분이기 때문에 서론이면서 도입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요한복음의 전체 내용이 오늘 읽은 부분에 모두 담겨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1장 전반부는 이후에 말할 모든 내용을 축약해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구절 한 구절 살펴보면 참 할 말이 많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매우 다릅니다. 제가 교회에서 배울 때도 그랬고 신학교에서 배울 때도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말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이라고 하고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 아닙니다. 공관복음서라는 말도 너무 생소하고 무슨 뜻인지도 잘 몰라서 그냥 그렇다고 배웠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를 공관복음으로 분류하는 것은 세 복음서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초창기에 쓰인 복음서이고 주로 사실 위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 쓰인 후에 쓰였고 사실을 기반으로 두고 있기는 하지만 해석이 가미되어 있는 복음서입니다. 달리 말하면 요한복음에는 철학이 들어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부분에 그런 경향성이 아주 잘 드러나 있습니다.
로고스란 무엇인가?
요한복음이 철학을 담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단어가 바로 요한복음 1장 1절에 나온 ‘말씀’이라는 단어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첫 번째 문장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입니다. 아마 이 문장을 보면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창세기 1장 1절이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래서 우리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문장을 보면 ‘이 말씀은 하나님을 의미하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문장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아하!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을 의미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넘어갑니다.
그런데 우리말로 말씀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원어로는 ‘로고스’입니다. 우리가 고대 그리스어에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도 로고스라는 단어는 아마 한 번쯤은 다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로고스라는 단어는 ‘말씀’이라는 의미만 가지고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로고스는 정말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말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번역했지만 로고스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의미는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아마도 철학자나 지식인은 더 그랬을 것 같은데요)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반응은 아마도 “그렇지,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원리가 필요하지”라고 했을 것입니다.
로고스에 대하여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로고스론을 처음 제시한 철학자는 헤라클레이토스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훨씬 전에 살았던 철학자입니다. 아주 유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종종 거론하는 그의 명언이 있습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혹시 들어본 적이 있으세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대충 아시겠죠.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강물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강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기 때문에 지금 들어갔다가 나온 후에 5분 있다가 다시 들어가면 그때 들어간 강물은 이전 강물과 같지 않습니다. 이 말이 유명한 말인데 그가 강조한 세상의 원리는 ‘변화’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계속 변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하면서 새로운 것이 나타나기도 하고 있던 것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지구는 매일 하루에 한 바퀴씩 자전을 합니다. 만약에 자전을 안 하면 어떻게 될까요? 한쪽은 지나치게 가열되고 한쪽은 햇빛이 닿지 않아서 땅과 바다가 몽땅 얼어버릴 것입니다. 지구가 갑자기 하루에 열 바퀴씩 자전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지구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동식물이 멸종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 없이 세상이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계속 변하지만 잘 돌아가려면 ‘균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할 때 로고스를 균형의 원리라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특별히 세상에는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 불과 물, 여름과 겨울은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하나 놓고 보면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하늘만 있어서는 안 되고, 땅만 있어서도 안 됩니다. 둘 다 있어야 하고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불이 필요하지만 불만 있어서는 안 되고, 물도 있어야 합니다. 여름도 있어야 하고 겨울도 있어야 합니다. 서로 대립되는 것이 모두 있어야 하고 동시에 균형을 맞추어야 세상이 조화롭게 유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균형의 원리를 로고스라는 용어를 써서 표현한 것이죠. 그런데 이 균형은 양팔저울이 평행을 이루듯 고정된 균형이 아닙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들 사이에 긴장 관계가 변하면서 균형이 깨지고 다시 새로운 구조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고스를 불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로고스는 기존의 구조를 녹이고 깨뜨리는 힘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로고스에 대해서 길게 설명을 했습니다. 로고스는 ‘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균형이 될 수도 있고 불이 될 수도 있고 이성이 될 수도 있고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만들고 돌아가게 하는 원리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로고스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제 설명을 듣고 더 헷갈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을 돌아가는 원리를 어떻게 하나만 꼭 집어서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로고스를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로고스를 가지고 싶어 했습니다. 로고스가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원리라면, 이것을 알아야 잘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고스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돌아가는 원리를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로고스를 아는 사람, 또는 로고스를 가진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로고스를 가지고 싶어 했습니다. 로고스를 알아야 또는 가져야 세상을 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로고스를 알려면 또는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철학자를 비롯한 학자들에게 물어보면 당연히 공부해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야 세상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어디까지 공부해야 언제까지 공부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공부한다고 과연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일까요? 로고스를 알아야 삶의 방향을 정하고 여러 가지 문제 앞에서 최선을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 가지 선택의 문제 앞에 서지 않습니까? 좋은 선택, 최선의 선택을 위해서는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운명을 물어보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아야 자신이 나아갈 길을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특별한 사람, 매우 지혜로운 사람, 또는 엄청나게 노력하는 사람만이 로고스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고스 없이 산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 원리에 거스르는 삶을 산다는 것인데 당연히 올바른 삶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로고스를 얻을 수 있습니까? 과연 가질 수 있는 것입니까?
로고스를 가지는 방법
오늘 읽은 요한복음 1장에 로고스를 가지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깨닫고 사람이 사람으로서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1장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의 저자는 대담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거의 약장사가 와서 약 파는 것 같은 허황된 느낌을 주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약을 파는 약장사가 자신이 파는 약을 선전할 때 듣고 있으면 엄청난 확신을 가지고 말을 합니다. 아무리 고치기 어려운 병이라도 그 약 한 번만 먹으로 싹 다 낫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약 한번 잡숴바” 하고 그다음 말들을 막 이어갑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로고스 아시죠?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습니다. 그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로고스 자체가 하나님이었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로고스로 말미암아 세상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로고스 없이 만들어진 것이 없습니다. 로고스는 생명입니다. 로고스는 빛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로고스를 갖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셨습니까. 그러나 로고스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렇죠. 로고스는 그렇게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특별한 몇몇 사람들만이 로고스를 가질 수 있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제 여기저기 헤매고 고생하면서 로고스를 가지려고 노력할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로고스를 가지고 싶으시죠? 이 귀한 로고스를 내 것으로 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를 영접하십시오. 예수를 받아들이고 그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로고스를 가질 수 있습니다. 로고스를 가지는 정도가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가 로고스가 될 수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스스로가 로고스가 될 것이라고 사도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증언합니다. 로고스가 친히 인간의 몸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는데 우리가 그를 보니 그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 있었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 있었다고 요한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와 돈
제가 대학원 다닐 때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제가 대학원도 엄청 길게 다녔습니다. 15년을 다녔으니까요. 제가 항공우주공학으로 석사 과정에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석사 2년 차에 국방과학연구소와 함께 하는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프로젝트 중간발표가 있어서 지도 교수님과 함께 차를 타고 국방과학연구소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매우 불편한 자리였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스물네 살이었습니다. 교수님이 운전하시고 제가 옆에 앉아서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기억에 나는 것은 딱 한 문장입니다. 정말 정확하게 기억이 납니다. 교수님이 충청도 출신이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최곤거잉~”
오늘 본문에 비추어 보면 교수님이 한 말씀은 바로 그분이 생각하는 로고스입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말씀하신 것이죠.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시고 오래 공부하시고 교수가 되셔서 더 공부하시고 세상을 살아보면서 깨달은 로고스는 “돈이 최고다”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니까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저는 그 말씀이 제 뇌리에 딱 박혔습니다. 가끔 제 머릿속에서 메아리처울립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최곤거잉.”
빛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여러분, 세상살이가 좀 어떠십니까? 살기가 참 어렵습니다. 살기가 어려운 것도 어려운 건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판단이 잘 안 설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고 의미 있고 좋은 삶일까요?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깨달아서 그 이치대로 살면 될 텐데요. 다행하고 신기하게도 이 세상의 이치가 친히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로고스 그 자체이십니다. 세상을 사는 지혜입니다. 그분을 따라서 살면 세상을 바르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이시고 생명이십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참 빛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어졌는데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자기 땅에 왔는데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이 로고스에 따라서 지어졌고,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고 어떻게 부활했는지 그 사실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를 영접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을 빛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천 년 전과 지금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빛을 깨닫지 못하는 어두움에 속한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또는 불쌍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기독교인 또는 세상 사람들만이 그 빛을 못 알아차리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 제 아내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신학 왜 했어?” 그러면 제가 뭐라고 대답하는지 아십니까? 짐작하시겠습니까? 아마 지금도 그 질문을 받으면 비슷하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게.” 제가 신학을 시작한 지 이제 20년 가까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받아야 하는 질문은 아닌데, 그 의도는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됩니다. 아내의 질문은 저에게 일종의 돌직구 같은 것이죠. 돌직구라기보다는 그냥 돌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질문에 제가 튼튼하고 멋있는 방패를 들어서 딱 막아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아내가 한 것처럼 저도 돌멩이를 들어서 저에게 던집니다. “그러게”라고 말하면서 말이죠. “신학 왜 했어?”라는 질문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 선택이 잘못된 것 아니야? 당신이 틀린 것 아니야? 다른 사람들처럼 살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 삶은 왜 이렇게 초라하지? 더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제가 받은 느낌은 이런 것입니다. 그런 느낌에 저도 동조하면서 “그러게”라고 대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고 목회자가 되어 있는 저도 예수가 참 빛이 아닌 것 같다는 의심을 아직도 종종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이제 다시 나가시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문득문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예수님이 참된 빛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그 빛에 따라 살고 있습니까?
예수를 바라보라
사랑하는 성화 교회 가족 여러분, 오늘 2021년 성탄절에 예수님을 다시 바라봅시다.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세상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번쩍이는 것들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 봅시다. 잘 들여다봅시다. 사도 요한의 고백을 다시 들어봅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의 삶이 얼마나 초라했습니까? 그 끝은 또한 얼마나 비참했습니까? 예수님이 인스타그램을 했다면 팔로워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맛있는 음식을 먹기를 했습니까, 고급차를 타기를 했습니까, 멋진 옷을 입기를 했습니까, 풍경이 좋은 크고 높은 집에서 살기를 했습니까? 하지만 그의 삶에 그 자신에게 가득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사랑이 가득 차서 넘쳐흘렀습니다. 그에게는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셨습니다. 이 사실은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14절에 나온 ‘거하다’라는 동사는 텐트를 친다는 단어와 비슷한 단어입니다. 사도 요한이 일부러 이 단어를 썼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광야에서 머물 때 그리고 이스라엘이 정착을 한 이후에도 한참 동안 하나님은 어디에 임재해서 그의 백성들을 만났습니까? 바로 성막입니다. 성막은 일종의 텐트입니다. 이 우주를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더 좋은 곳에 거하셔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은 허름한 천막에 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집 치고는 너무 초라하고 보잘것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마치는 말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로고스가 우리를 삼키려고 다가오고 압박하고 말을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최곤거잉.”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있지만 그것은 로고스가 아닙니다. 생명도 아니고 빛도 아닙니다. 어두움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삶, 그것이 은혜이고 진리이고 영광입니다. 예수님이 참된 빛이고 로고스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삶을 살더라도 때때로 ‘아,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그럴 때 다시 예수님을 똑바로 응시하십시오. 사람들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아닌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경험해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가 발견하는 사랑과 진리가 참된 빛이 아닙니까? 그분이 세상의 이치가 아닙니까? 그분이 로고스가 아닙니까?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정말 사람답게,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신 그 원리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당신은 로고스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마 우리 중 한 사람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우리도 가끔 아닌 것 같지만, 예수를 바라볼 때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2021년 성탄절에 다시 예수를 바라봅시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 자신도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짙게 깔려 있는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상의 빛이 되어서 하루하루 환하게 살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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