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21년 12월 5일 (대림절 두 번째 주일)
장소: 분당성화감리교회
기다림의 기술
(눅 1:68-79, 개정) 『[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본문 요약
오늘 본문은 사가랴의 예언입니다. 사가랴는 세례 요한의 아버지입니다. 세례 요한의 어머니는 엘리사벳이고요.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통해 세례 요한을 세상을 보낼 계획을 하셨고요. 사가랴는 제사장이었는데 그가 성전에 들어가서 분향할 때 천사를 나타났습니다. 그 천사가 사가랴에게 세례 요한이 사가랴와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이미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였기 때문에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나도 늙은 사람이고 나의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 말입니다.” 가브리엘이 사가랴의 대답에 이렇게 대꾸합니다. “보아라, 그때가 되면 다 이루어질 내 말을 네가 믿지 않았으므로, 이 일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너는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사가랴는 그 순간부터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태어나서 팔 일이 되어 할례를 받고 이름을 정할 때 천사가 정해준 대로 요한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면서 사가랴는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한 예언이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주목해서 본 이유는 사가랴가 약 열 달 동안 말을 못 하다가 다시 입이 열렸을 때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말을 못 했으니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겠습니까? 그가 열 달 동안 참아왔던 말을 오늘 본문의 내용대로 쏟아낸 것이었습니다. 이 예언의 내용은 다소 길지만 요점은 다윗의 집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람이 태어날 것인데 이 사람의 탄생은 오래전부터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심지어 이천 년 전 아브라함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맹세하셨다는 사실을 사가랴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약속과 관련하여 사가랴는 세례 요한은 주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하게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가 이런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누가복음 1:78-79)
기다림을 잃어버렸다
사가랴는 기다리는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가브리엘은 사가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통해서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할 자가 태어날 것이라는 소식이었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소식도 기쁜 소식이었지만 더 기쁜 소식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소식이었습니다.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누가복음 1:17) 사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주 앞에 먼저 와서”라는 구절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뛸 듯이 기뻐해야 할 소식이었는데 사가랴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가브리엘이 전하는 소식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가 태어날 것이고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통해서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할 자가 태어날 것이라는 소식이었습니다. 정말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일이 이제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저도 나이가 많고 아내도 나이가 많은데 우리가 아이를 낳는다고요?” 가브리엘은 사가랴의 반응에 실망했을 것입니다. 가브리엘은 인류 역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사가랴에게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전했는데 반응이 영 미적지근했습니다. “네? 저는 나이가 많은데요?”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고 예수가 태어날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사가랴의 아들이 예수님이 오심을 준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요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가랴가 잘 못 알아듣자 가브리엘은 다시 설명해 주지 않고 사가랴의 입을 막아버렸습니다. 매우 감정적인 반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브리엘이 대단히 황당했던 것 같습니다. 입 아프게 다시 말하지 않고 사가랴의 입을 막아버렸습니다. 어떤 의도였을까요? ‘네가 믿지 않아도 이 일은 일어날 테니까,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조용히 잘 생각해 보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사가랴가 기다림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 다윗의 자손 중에 구원이 뿔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은 예로부터 거룩한 선자자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이기도 했습니다. 사가랴는 구세주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가랴는 자신이 말을 할 수 없었던 시간에 그 기다림을 회복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라비안나이트, 어부와 지니 중에서
저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어릴 때 읽었던 아라비안나이트의 한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어부와 지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부는 그물로 고기를 낚다가 바닷속에 처박혀 있던 호리병 하나를 건져냈습니다. 뚜껑이 닫혀 있는 호리병을 그물로 낚아 올렸다면 그다음에 할 행동은 뻔합니다. 뚜껑을 열어보는 것이죠. 어부는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호리병에서 한 요정이 나오더니 화가 난 얼굴로 그 어부를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어부는 황당했죠. 호리병에 갇혀 있던 요정을 풀어주었더니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으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죠. 그래서 어부는 그 요정에게 나에게 왜 이러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그 요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처음에 갇혀 있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어. 그냥 그렇게 백 년이 흘렀어.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누구든지 나를 구해주면 그를 부자로 만들어 줄 거라고 다짐하고 나를 구해줄 사람을 기다렸지. 그런데 아무런 변화 없이 백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 나는 마음을 더 후하게 먹고 누구든지 나를 구해주면 그 사람에게 세상에 보물이 묻혀 있는 곳을 모두 알려 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 그렇게 또 백 년이 흘렀지. 그래서 이번에는 누구든지 나를 구해주면 그 사람의 소원 세 가지를 들어줄 거라고 결심했어. 그리고 또 백 년이 흘렀어. 그런데도 나를 아무도 구해 주지 않았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어. 그래서 나는 굳게 마음먹었지. 이제 누구든지 나를 구해주면 죽여버리겠다고 말이야.”
어렸을 때 이 글을 읽고 저는 이해가 갈듯 말 듯했습니다. 자기를 구해준 사람을 죽이려고 하다니 이상하기도 했지만 그 요정의 감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도 같았습니다. 기다림이라는 것은 참 힘든 것이죠. 특별히 그 기다림이 간절한 기다림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 정도까지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 기다림, 또는 희망으로 인해서 더 살기 힘들기 때문에 기다림을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면 오히려 살기가 더 수월해집니다.
기다림을 잃어버렸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여러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의 말씀을 전하셨는데 많은 사람이 기다림을 잃어버렸던 이유는 그들이 기다림에 지쳤기 때문입니다. 지칠 만도 합니다. 적어도 몇 백 년을 기다려왔습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생각하면 이천 년을 기다려 온 것입니다. 이 정도면 포기할 만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해 낼 다윗의 자손이 태어날 것이라고 선지자들이 예언했습니다. 구원이 뿔이 일어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세상을 구원할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을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결국 그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자가 태어난다고 예언했을 때 수많은 사람이 희망에 부풀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곧 구원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죽을 때까지 구세주를 목도하지 못했다면 선지자의 죽음과 함께 사람들은 기대를 접었을 것입니다.
사가랴는 제사장으로서 이스라엘의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기다림을 잃어버렸습니다. 그가 구세주에 대한 기다리는 마음을 잃었다면 평범한 유대인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점에서는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성경에 쓰여 있고 선지자들이 계속 예언했는데 왜 사가랴는 그리고 또 많은 유대인들은 그 약속을 이루실 분이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기다리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은 아마 일부러 기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면 기다리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릴수록 그 기다림은 더 힘들어집니다. 특별히 불확실한 것을 기다리는 경우에,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그 기다림이 물거품이 된다면 살아간 기운조차 잃어버릴 정도로 맥이 확 풀려 버리기도 합니다. 차라리 기다리지 않았다면 실망할 일도 없을 텐데 기다림 때문에 오히려 절망에 이르기도 합니다. 기다렸던 사건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그 기다림은 실망을 넘어 절망이 되기도 합니다. 그 순간 살 소망이 없어지기도 합니다.
간절히 기다렸는데 그 기다린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 절망에 빠지기도 하고 불 같이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절망에 이르거나 불 같이 일어나는 화를 막기 위해서는 오히려 기다림을 멈추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은 일부러 기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희망 없이 사는 것이 오히려 고통을 더 줄이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사가랴도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세주가 태어난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았습니다. 사가랴가 그리고 유대인들이 기다림을 잃어버리는 것은 옳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기다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될 아브라함의 자손이 탄생하게 되는 이 놀라운 사건은 그들도 그리고 하나님도 진심으로 바라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언제 오실지 어떻게 오실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금방 다시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세상의 종말이 이를 것이라고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렸습니다. 사실 초대 교회 사람들이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줄 수 있었던 것은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었기 때문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지 벌써 이천 년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려왔다면 이제 지칠 만도 하고 화날 만도 하고 포기할 만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단순히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저는 예수님이 보고 싶기는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세상은 예수님이 시작하신 구원의 역사가 완성이 되는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꿈꾸고 바라는 세상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세상은 하나님의 긍휼이 가득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78절에 보면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긍휼이라고만 나왔지만 원어에는 부드러운 긍휼이라고 나옵니다. 영어로는 tender mercy라고 나와 있는데 우리말로 더 잘 풀어내면 ‘애끓는 사랑’입니다. 영어로 부드러운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우리 몸속에 있는 내장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중에서도 주로 윗부분에 있는 내장, 즉 심장, 간, 허파를 의미합니다. 우리말인 ‘애’도 그런 의미입니다. 애를 태우다 애간장을 녹이다도 그런 의미로 쓰는 말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바로 그런 세상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애끓는 사랑이 임하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원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는 세상이 우리가 진심으로 바라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다면 우리가 앉아 있는 곳에 하나님의 빛이 임한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돋는 해는 아래로부터 임하는 것입니다. 해는 아래에서 위로 뜹니다. 하지만 여기서 돋는 해가 위로부터 임한다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빛이 임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자가 아니더라도 이 소식은 기쁜 소식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누군가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불행한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누군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있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가 그들과 상관없이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불행한 이웃들이 있다면 우리는 완전한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평화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우리의 원수가 없는 세상,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원하는 세상입니다. 이는 우리의 원수나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이 죽어서 없어지는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나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과 화해하여서 더 이상 증오나 혐오가 없는 세상을 말합니다. 이런 세상이 바로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이유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우리가 정말 바라는 세상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의 기술
그런데 정말 그런 세상이 오겠습니까?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되어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렇게 세상이 평평해지겠습니까? 평등한 세상, 정의로운 세상이 되겠습니까?
그런 세상을 꿈꾸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희망과 기다림과 기대가 커질 때 그것과 더불어 위험도 더 커집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그 세상이 오지 않을 때 우리는 절망에 빠지면서 살 소망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기다림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 기술은 기다림의 강도를 줄이는 것입니다. 간절한 기다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끈질긴 기다림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삶의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간절함이 우리를 힘들게 해서 기다림을 포기하게 될 수 있다면 기다림의 강도를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너무 간절히 기다리지 마십시오. 하나님만이 그때를 아십니다. 두 번째 기다림의 기술은 기다리면서 할 만할 일을 찾아서 하는 것입니다. 놀이공원 가셔서 놀이기구 타려고 기다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인기가 많은 놀이기구는 두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기다리기만 하면 힘듭니다. 친구들과 얘기도 하고 게임도 하고 아이스크림도 사다 먹으면 설령 어떤 이유로 결국 놀이기구를 못 타게 된다고 하더라도 기다림의 시간 자체가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했던 일을 우리도 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것과 같이 예수님은 애끓는 사랑으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자에게 찾아가셨고 모든 이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시고 직접 평화의 길을 걸으셨고 사람들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골짜기가 돋우어질 수 있도록 산이 낮아질 수 있도록 산에 있는 흙을 한 번씩 골짜기에 뿌려보는 것이죠. 물론 우리가 그런다고 해서 산이 막 낮아지고 골짜기가 기적적으로 돋우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노력과는 반대로 산은 점점 높아지고 골짜기는 더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행위는 우리가 어떤 세상을 바라고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또한 하나님에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이 낮아지고 골짜기가 돋우어지는 놀라운 구원의 완성은 예수님의 오심으로 완성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할 뿐입니다. 우리가 기다림의 결실을 맺지 못하더라도 준비하는 것에 이미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마치는 말
사랑하는 성화 공동체 가족 여러분, 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교회 달력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이 한 해의 첫 번째 주일입니다. 교회력으로 마지막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2주 전에 우리는 교회달력으로는 마지막 주일을 보냈습니다. 우리 교회 올해 주제가 ‘순례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교회’입니다. 순례는 공간의 순례도 있지만 시간의 순례도 있습니다. 특정한 시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에 우리가 해야 할 일, 우리가 갖추어야 할 예는 감사입니다. 한 해 동안 함께 해 주시고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셨던 하나님께 그리고 우리 옆에서 우리와 함께 해 주었던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감사하는 것이 마지막에 해야 하는 도리 있는 행동입니다. 감사로 2021년을 이미 보낸 우리는 벌써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시작의 절기에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격식과 도리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천 년 전에 이미 오셨고 또다시 오실 것입니다. 기다림은 힘든 일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잃어버리셨다면 이 시간 그 마음을 다시 가지시기 바랍니다. 간절히 안 기다리셔도 됩니다. 조금이라도 그 마음을 계속 품고 있으십시오. 어둠 속에 들어오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작은 희망을 가지고 계십시오. 그래서 삶 속에서 늘 예수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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