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 서기관, 과부, 그리고 제자들 (과부의 두 렙돈)_마가복음 12:38-44

설왕은31 2021. 11. 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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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2:38-44, 개정)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껄끄러운 이야기 그리고 두 렙돈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서기관, 과부, 그리고 제자들입니다. 아주 친숙한 본문이고 보통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과부에게 주목했습니다. 여기에 나온 과부는 우리에게 열등감을 안겨주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헌금함에 넣은 이 과부의 이야기를 볼 때마다 우리는 신앙의 열등감을 느끼고 도전을 받게 됩니다. 이 과부의 믿음에 견주어 보면 나의 믿음은 얼마나 작은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나의 가진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바칠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거의 대다수는 그에 대해서 긍정의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아주 은혜로운 이야기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멀리 하게 되고 껄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그대 앞에만 서면 작아지기 때문이죠.


오늘은 본문 말씀을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과부는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두 렙돈에 대한 설명이 본문 안에도 있습니다. 한 고드란트라고 설명을 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는 설명이죠. 두 렙돈은 큰돈이 아닙니다. 저도 이번에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은 64 고드란트입니다. 그리고 1 고드란트는 두 렙돈이고요. 하루 품삯을 렙돈을 환산하면 128 렙돈입니다. 최저시급 정도로 계산하면 한 데나리온은 8만 원 정도이고 두 렙돈이면 대략 1,000원 정도의 금액입니다. 과부는 5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헌금함에 넣은 것이죠.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 정도 헌금을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 정도의 헌금은 매우 적은 편에 속했던 것 같습니다. 헌금을 자랑하듯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분명히 그냥 손에 쥐고 있다가 살짝 내려놓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얼마를 냈는지 잘 몰랐겠지만 아마도 가벼운 동전 두 개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소리 때문에 과부는 당혹스럽고 창피했을지도 모릅니다. 부자가 헌금을 내는 소리와 비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지폐가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의 다 동전으로 헌금을 내었을 텐데 한 데니리온의 무게와 한 렙돈의 무게는 차이가 났습니다. 떨어지는 소리도 달랐을 것입니다. 부자가 헌금을 낼 때는 묵직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났겠지만 과부가 헌금을 낼 때는 가볍고 초라한 소리가 났을 것입니다. 


과부는 남들보다 적은 헌금을 냈습니다. 왜 그렇게 적은 헌금을 냈습니까? 둘 중에 하나입니다. 돈이 많은데 일부러 적은 돈을 냈거나 아니면 진짜 돈이 적었기 때문에 적은 돈을 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알려 주셨기 때문이죠. 이 과부는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예수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과부는 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헌금을 많이 낼 수 없었습니다. 과부는 돈이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과부라고 모두 다 돈이 별로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남편이 부자였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남편이 일찍 죽었다고 하더라도 남편이 돈이 많았다면 과부도 어느 정도 재산을 소유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전부 1,000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심한 빈곤입니다. 과부가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면 뭔가 대단히 잘못되어 있거나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단서가 될 만한 것이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서기관을 조심하라

 

놀랍게도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서기관이었습니다. 40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켰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필사하고 보존하고 해석하고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으로 하면 신학자나 목회자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고 이들에게 성경은 종교의 경전일 뿐만 아니라 법률이었습니다. 서기관은 신학자, 목회자이면서 동시에 판사나 검사와 같은 법률가였습니다. 종교지도자이면서 권력을 가진 계층이었습니다. 성경에서 계속 강조하는 메시지 중에 하나가 고아와 객과 과부를 돌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은 앞장서서 그 명령을 실천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과부는 사회 취약 계층으로 여러 가지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서기관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기관들은 당연히 좋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앞장섰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과부의 가산을 삼켰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남편의 유산 상속 과정에 개입해서 중간에 그 재산의 일부를 가로챘을 수도 있고, 법률에 대한 조언이나 상담을 하면서 지나친 수수료를 챙겼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간에 이들은 사회에서 보호하고 돌봐야 하는 취약 계층 중에 하나인 과부들의 재산을 취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이 일반 법률가이면 그래도 좀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법률가이면서 동시에 종교지도자였고 기도도 길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탄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이 유식해 보이고 경건해 보이고 품위 있어 보이지만 이들을 경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8절부터 40절까지 서기관들에 대해서 예수님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잘 살펴보면 그다지 문제가 될 만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긴 옷을 입는 것이야 허세를 부리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취향일 수도 있습니다. 옷 입는 것이야 큰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시장에 문안받는 것도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저도 인사받는 것 좋아합니다. 인사받는 것 싫어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회당에서 높은 자리 앉으면 좋고 잔치에서 상석에 앉으면 맛있는 것 많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서기관을 상석에 앉힌다면 굳이 그 자리를 마다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지적하는 서기관의 악행은 한 가지입니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행동입니다. 과부는 고아나 객과는 다릅니다. 고아나 이방인은 가진 재산이 별로 없을 가능성이 높지만 과부는 남편이 죽으면서 그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과부는 취약 계층임에 분명했습니다. 과부가 밖에서 일을 해서 돈을 벌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남편의 재산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대단히 불안정한 삶을 살게 되는 상황에 몰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장에 재산이 있다는 이유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의 행위는 악행임에 분명합니다. 사실 서기관이 길게 기도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길게 기도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긴 기도가 나쁜 기도가 되고 외식이 되는 것은 바로 앞에 있는 내용 때문입니다. 그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켰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는 역겹고 모양만 갖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은 과부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과 별다른 관계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의 편집 과정에서 우연히 과부의 재산을 취하는 서기관과 자신이 가진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은 과부의 이야기가 연달아 나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내용이 누가복음 21장 1절에서부터 또 나옵니다.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또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가도 그렇게 썼고 누가도 이 내용을 서로 이어서 썼다면 글을 편집할 때 우연히 두 이야기가 연속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상관관계가 있다고 짐작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판단일 것입니다. 

 


과부는 왜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다 헌금했을까요?

 

과부는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가 너무 뻔한 질문을 했습니까? 그 과부는 믿음이 좋아서 자신이 가진 돈 전부를 넣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군가의 믿음을 칭찬하실 때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과부의 헌금이나 믿음에 대해서 직접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치 판단을 하지 않으시고 사실만을 말씀하셨습니다. 과부는 부자보다도 그리고 거기에 있었던 어떤 사람보다도 더 많은 돈을 넣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 과부는 겨우 두 렙돈만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준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 기준은 자신이 가진 전체 소유였습니다. 그 기준으로 보았을 대 과부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헌금을 낸 것이라고 왜냐하면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과부는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모두가 나가서 헌금을 내야 하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도 뭐라도 내야 했고 가진 것이라고는 두 렙돈밖에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헌금을 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그 여인의 선한 행위를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들어야 하는지 제대로 분간하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헌금함에 모두 의무적으로 나간다거나 또는 헌금함을 돌리면 아무래도 헌금을 내야 하는 부담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물론 그냥 내는 척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기를 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지폐가 있으면 소리가 안 나겠지만 동전을 헌금해야 한다면 거의 반드시 소리가 날 것입니다. 그러니 내는 척하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처럼 헌금 바구니를 돌리지 않고 예배당에 들어오면서 헌금을 하는 것은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과부가 얼마나 헌금을 하는지 관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과부라면 사회 취약 계층으로서 대체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 테니 당연히 헌금을 많이 못 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헌금을 할 때면 돈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릴 테니 들을 만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부의 헌금 내는 모습을 보는 것은, 헌금 내는 과부도 민망하고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도 민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과부가 헌금을 내는 것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과부가 헌금을 너무 적게 냈다고 무시하거나 멸시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사실 과부가 헌금을 많이 낸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과부는 5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냈고 짧은 짤랑 소리를 내고 그 동전은 헌금함에 떨어졌겠죠. 그것을 눈여겨본 사람이 있다면 그 모습이 낯설어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부가 동전 두 개 넣는 게 뭐가 그렇게 대수로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냥 늘 있는 일이었겠죠.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서 그 헌금이 과부에게는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알려줍니다. 늘 있는 과부의 미약한 헌금이었는데 예수님의 말을 통해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몽땅 헌금함에 넣은 한 사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을 들은 제자들은 분명히 놀랐을 것입니다. 

 


칭찬이 아니라 탄식

 

예수님은 과부의 헌금이나 믿음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과부의 헌금이나 믿음을 칭찬하기 원했다면 아마 그 과부를 불러서 칭찬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과부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과부를 부른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과부는 자신이 가진 생활비 전부를 다 헌금했다고 제자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과부의 믿음을 본받아서 너희들도 가진 돈 전부를 다 헌금하라고 권하는 의도였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재산과 가족을 뒤로하고 예수님과 동고동락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있던 모든 제자들이 그렇지는 않았을지라도 핵심 멤버들은 이미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과부보다 믿음이 더 좋았으면 좋았지 과부의 헌금 앞에서 작아질 만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서 과부가 자신이 가진 모든 생활비를 다 헌금했다고 가르쳐 준 이유는 아마도 과부가 이제는 빈털터리라고 알려주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과부는 당장에 다음 끼니를 준비할 돈도 없었습니다. 가진 돈을 다 헌금할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이 이제 저 과부를 먹이시겠지라고 생각하고 그 과부로부터 돌아서는 것이 옳습니까? 


서기관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과부를 돌봤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과부의 가산을 삼켰고 과부는 자신의 재산이 거의 다 떨어졌고 이제 두 렙돈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돈마저도 헌금함에 넣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자들이 해야 할 행동은 그 과부를 돌보는 것입니다. 당장에 끼니를 준비할 돈도 없는 과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실제로 그 당시에는 생활고로 인해서 자신의 몸을 파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과부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유명한 성서학자는 여기서 예수님은 칭찬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탄식을 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성경에서는 사회 취약 계층을 보호하라고 수도 없이 외치고 있었습니다. 몇백 년 몇천 년 동안 그 메시지는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과부의 500원짜리 동전 두 개가 그가 가진 소유 전부가 되어버린 이 상황, 그리고 앞장서서 과부를 도와야 할 서기관이 과부의 가산을 삼킨 장본인이 되어 버린 이 상황에 대한 탄식이었습니다. 


과부는 약자이면서 또한 피해자였습니다. 그런 과부가 자신이 가진 생활비 전부를 헌금을 했다는 것에 손뼉을 칠 일이 아닙니다. 제가 다시 한번 현대식으로 바꾸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직장도 없고 취직하기 곤란한 상황에 놓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는 부모가 물려준 재산이 있어서 그 재산이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그 재산을 가지고 적당히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보이스피싱으로 사기를 당해서 가지고 있던 돈을 거의 다 빼앗기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어느 날 그에게는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만 남았습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고 막막한 마음에 교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헌금 순서가 되어서 헌금 바구니가 돌았고 뭐라도 내야 할 것 같아서 주머니 속에 있는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잡고서 만지작거렸습니다. 그 돈이면 점심에 편의점에서 작은 컵라면 하나를 사서 끼니를 때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헌금을 해야 하니 오백 원짜리 하나만 낼까 하다가 어차피 오백 원만 있으면 컵라면도 사 먹을 수 없어서 잠깐 또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헌금 바구니가 자기에게 오자 만지작거리던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모두 다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 사람의 행동에 손뼉을 치고 칭찬을 하는 것이 올바른 반응입니까?

 


아직도 서기관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려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 과부의 헌금은 자신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였다고 말한 것은 칭찬이 아니라 탄식이라는 해석은 저만의 새로운 해석이 아닙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유명한 신학자가 한 이야기이고 목회자들이 가장 많이 보는 WBC 주석서에 떡 하니 적혀 있는 해석입니다. 그리고 그 주석서는 몇십 년 전에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제껏 그 과부의 헌금을 과부의 믿음에 대한 칭찬으로만 이해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이천 년 전에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데 앞장섰던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도 그 당시의 서기관과 같은 자들이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데 관심을 두지 않고 약자와 피해자의 재산을 취해서 자신과 교회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여전히 이 불쌍한 과부를 이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는 말

 

사랑하는 성화 공동체 여러분, 여러분이 과부의 손을 잡아주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과부의 사정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과부는 당장에 다음 끼니를 준비할 돈이 없었습니다. 당장에 어디 가서 돈을 구하지 못한다면 다음 끼니부터 원치 않게 굶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과부의 사정을 전해 들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우리도 그 과부처럼 우리의 가진 모든 소유를 헌금함에 넣어야 합니까? 그래서 과부와 함께 굶어야 할까요?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이 과부처럼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가 그의 모든 소유가 되어버린 과부와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여러분이 과부의 손을 잡아주십시오. 그런 과부와 같은 사람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일거리를 찾아줄 수 있다면 찾아주고 기초 생활 수급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것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것이 안 된다면 적어도 밥을 굶지 않도록 식비를 마련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이 과부처럼 되라가 아니고 이 과부와 같은 사람을 생기지 않도록 행동하고 만약 이 과부와 같은 사람이 생긴다면 너희가 돌봐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실천해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서기관을 조심하십시오. 두 가지 측면에서 서기관을 조심해야 합니다. 첫째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과 같은 사람에게 피해를 입지 않도록 그런 사람들을 삼가십시오. 진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인지 그런 척만 하는 사람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과부와 같이 소외된 자를 돌보는 사람인지 살펴보십시오. 그렇지 않고 기도만 오래 하고 경건한 척만 하는 사람이라면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느 순간 여러분이 피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둘째로, 여러분이 서기관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강자가 가진 것을 뺏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보다 약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뺏기는 수월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게 굴어서 약자가 가진 것을 빼앗는 경우가 흔합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죠. 서기관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늘 깨어서 자기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화 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약자가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또한 그 피해자가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또한 그런 약자가 생기지 않도록 이 사회를 개혁해서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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