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일시: 2021년 9월 5일 오전 11시
설교 교회: 분당성화감리교회
설교 본문: 시편 146편
(시 146, 개정) 『[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2]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6]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7]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8]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9]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10]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 인사말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 주시는 지혜와 용기와 평화가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코로나 때문에 많이들 힘드시죠. 하지만 이제는 정말 거의 마지막 단계에 이른 것 같습니다. 한두 달 정도만 더 견디시면 많은 것들이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백신 접종률이 80%를 넘어가고 코로나에 걸리더라도 중증으로 가지 않고 치명률이 대폭 낮아진다면 우리는 점점 이전 모습을 되찾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가 되면 교회에서도 다시 모여 예배드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당분간 마스크는 계속 쓰고 손 소독이나 체온 측정과 같은 방역 수칙을 지켜야 하겠지만 모여서 예배드릴 수 있다면 그 정도 불편함은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많이 지치고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더 견뎌 주시기 바랍니다.
*시편과 시편 146편
오늘 본문 말씀은 시편 146편입니다. 저는 시편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시편은 인간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내용이 많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많은 시에서 시인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시편에 탄식시가 참 많습니다. 마음이 정말 괴로울 때는 다른 누군가의 위로가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정말 마음이 힘든 상황이면 타인의 섣부른 위로나 격려는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위로할 때 그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다면 “힘내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될 거예요”와 같은 말은 전혀 먹혀들지 않습니다. 죽을 것 같이 마음이 괴로울 때 그 마음의 쓰라림을 제대로 돌볼 수 있는 타인은 사실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스스로가 나에게 타인이 되어서 마음을 들여다보며 돌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의 탄식시는 그런 시도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스스로가 마치 타인인 것처럼 마음을 관찰하고 위로하고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 마음의 복잡한 부분을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시편 146편도 내가 나에게 타인인 것처럼 말을 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스스로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 같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 146편은 탄식시는 아닙니다. 시편 146편부터 150편까지는 할렐루야 시편입니다. 모두 다 할렐루야로 시작합니다. 찬양시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시편은 찬양시가 많을 것 같은데 사실 그렇게 찬양 시편이 많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탄식시가 더 많습니다. 그래도 시편 150편을 마무리하는 다섯 개의 시편은 모두 찬양 시편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처음과 끝이 참 중요한데, 시편의 마지막에 찬양시를 배치한 이유는 삶의 아픔과 고뇌와 탄식이 순간들이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한 우리의 삶의 자세라는 것이 시편의 결론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인은 1절에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라고 스스로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 또 스스로 화답하고 있습니다.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내가 나에게 말을 걸고 내가 나에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3절부터는 분위기가 약간 바뀝니다.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닌 회중에게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아라” 하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회중에게 권유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회중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내가 나 스스로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은 이러한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행동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내 영혼아 배가 고프니까 밥을 먹어라”라고 명령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나올 수 없는 행동일 때 명령을 내리는 것이죠. 시편 146편도 아주 유쾌한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뭔가 일이 잘 풀렸거나 큰 성공을 거두었거나 자랑할 만한 일이 생기면 저절로 찬양이 튀어나올 수 있습니다. 지금 시인의 상황은 탄식시를 쓸 정도의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찬양이 막 흘러나오는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인들, 귀인들은 지금 시대로 말하면 권력이나 돈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권력이나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의 처세술입니다. 힘이 있는 인생을 의지하는 것이 그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세상을 성공적으로 또는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무난하게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쉽게 납득할 만한 처세술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포함한 회중에게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힘이 있는 사람들을 의지하고 싶겠지만 의지하지 말아라.”
* 시편 146편 전체 내용
시편 146편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들어가 있지만 간략하게 요약해서 정리하면 중심 생각은 ‘사람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3절에 보면 귀인들과 같은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권유하면서 5절에 보면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다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146편의 중심 내용입니다. 1절, 2절은 도입부이고 6절 이하는 왜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아야 하는지 왜 그를 자기의 소망으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6절에 보면 하나님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나옵니다. 바로 이것이 시인이 말하는 인간과 하나님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인간의 특징은 4절에 나오고 하나님의 특징은 6절에 나옵니다. 인간은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의 몸뿐만 아니라 생각도 모두 소멸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7절 이하에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를 계속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서 정의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눈먼 자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의인들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십니다.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10절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핵심 이유를 다시 한번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다스리시고 대대로 통치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우리의 도움으로 우리의 희망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한번 잘 보십시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귀인들, 힘이 있는 사람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있는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시인은 그들에게는 우리를 도울 힘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험과는 사뭇 다릅니다. 내가 힘있는 사람을 알고 또한 그 힘있는 사람이 나를 신경써 준다면 그가 나에게 도움이 될까요, 안 될까요? 여러분의 경험은 어떻습니까? 도움이 됩니다. 도움이 많이 될 때도 있습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노력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정말 도움이 많이 됩니다. 이렇게 저렇게 도와주겠다고 큰소리치시면서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실제로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도움을 항상 기대할 수는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권불십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권력이 10년을 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시인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람이 호흡이 끊어지면 아무리 나를 돕겠다는 사람이 대단한 계획을 세운다고 할지라도 그 계획은 그 사람이 호흡이 끊어지면 함께 사라집니다. 귀인이 아예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도움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은 의지할 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어지지 않으시는 분, 능력을 절대로 잃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7절부터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억눌린 자를 위해서 정의로 심판하시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갇혀 있는 자에게 자유를 주신다고 선포합니다. 눈먼 자를 보게 하시고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의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나그네를 보호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붙들어 주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다 좋은 일입니다. 다 좋은 일이고 희망을 주는 말씀이기는 한데 저는 마음에 탁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여러 번 읽어봐도 마음에 탁 와닿지 않아서 왜 그런가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잘 보니, 저에게 해당하는 사항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사람들이 저와는 좀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억눌린 자도 아니고 배가 고픈 자도 아니고 갇혀 있는 자도 아닙니다. 눈먼 자도 아니고 비굴한 자도 아니고 대단한 의인도 아닙니다. 나그네도 아니고 고아도 아니고 과부도 아닙니다. 아마 많은 분들도 저와 비슷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은 우리와는 큰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돕고 계시기는 한데 하나님께서 돕고 있는 대상이 ‘나’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은 참 불안정합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재산을 모아 놓으려고 하는 이유도 우리의 삶이 불안정하기 때문입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돈을 모아 놓고 있으면 뜻밖에 발생한 사고나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데 필요한 돈이 1억이라고 생각을 해 봅시다. 그러면 딱 1억만 있으면 사람들이 만족하고 더 많은 돈은 필요 없다고 사양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0억을 모을 수 있으면 10억을 가지고 있으려고 하고 100억을 모을 수 있다면 100억을 가지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데는 집이 꼭 필요합니다. 집 장만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가진 돈을 다 모으고 대출을 받아서 집을 한 채 사면 사람들이 그걸로 만족합니까? 아닙니다. 만약 두 채를 살 수 있다면 두 채를 살 것입니다. 세 채를 살 수 있다면 세 채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집이 세 채가 있어도 세 채밖에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욕심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삶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사업이 망할 수도 있고 불의의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억눌릴 수도 있고 굶주릴 수도 있고 정말 눈이 멀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처럼 갑자기 난민 신세가 될 수도 있고 우리 아이들이 고아가 될 수도 있고 우리가 홀아비나 과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내몰린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변두리로 밀려나 여차하면 세상 밖으로 밀려나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세상의 가장자리로 밀려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변두리에서 여차하면 세상 밖으로 밀려날 것 같은 사람들을 친히 돌보시고 그들을 도우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회안정망의 역할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고 믿고 있으면 우리는 마음의 근심을 덜 수 있습니다. 언제라도 불의의 사고나 원치 않는 사건으로 인해서 또는 나이가 들어서 은퇴하고 몸이 쇠약해지면 세상의 변두리로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질 수 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또한 믿고 있다면 우리의 삶이 극도의 불안 상태에 빠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돕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내가 극한 상황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나를 도우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면 훨씬 더 안정감 있고 자신감 있고 편안하고 즐겁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경계에 계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 어디에 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억눌린 사람들, 굶주린 자들, 갇힌 자들, 눈먼 자들, 비굴한 자들, 핍박받는 의인들, 나그네, 고아, 과부와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돕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튕겨내 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그들을 도와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합니다.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왜 저를 도와주지 않으십니까?” 물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강한 손길을 경험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돌이켜 보십시오. 언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강한 손길을 느꼈습니까? 평안할 때였습니까? 아니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바다의 나룻배 위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였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려면 어디에 가야 한다고요? 이 세상의 가장자리로 가야 합니다. 자칫 발을 잘못 내딛으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곳으로 가서 아차, 하고 미끄러지는 순간에 우리를 붙잡으시는 하나님의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만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만나고 싶지만 억눌리고 싶거나 굶주리고 싶거나 갇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그네나 고아나 과부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좋은 방법을 알려드립니다. 스스로가 그렇게 극한 상황에 처하지 않고도 우리를 붙드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곳에 우리도 가는 것입니다. 억눌린 자, 굶주린 자, 갇힌 자, 나그네, 고아, 과부를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돕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가서 그들을 도울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곳에 가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경험을 가장 많이 하시는 분들이 선교사님들입니다. 여러분, 선교사님들이 보내는 편지에 글을 읽어 보시고 사진을 보시면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계시는 선교사님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버티고 계실까, 하고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선교사님들과 말을 하고 또 글을 읽어 보면 이분들 안에는 평화가 있고 힘이 있습니다. 그 상황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누리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선교사님들의 삶이 불안정하고 이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데 우리가 볼 때는 뭐가 좋은 일이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유는,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가난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일 몬도
사랑하는 성화 공동체 교우 여러분, 세상살이가 어떠십니까? 힘드시죠? 저만 힘든 것은 아니죠? 그래도 여러분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내 삶이 더 힘들어져서 완전히 꼬꾸라지게 되면 어떡하지, 하고 극한 상황을 가정하면서 근심에 빠지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대부분은 그런 극한 상황에 이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약에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 이르면 하나님께서 도우신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어울리는 노래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몇 주 전에 제 아내가 무슨 노래를 열심히 듣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이 노래 정말 좋다고 저에게도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래는 일 몬도라는 이탈리아 노래였습니다. 저는 처음 그 노래를 들으면서 ‘아니, 우리말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이탈리아 노래를 왜 듣고 있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밑에 자막이 나오고 한국말 번역도 나와서 유심히 보면서 노래를 들었습니다. 잘 보니까 의미가 있는 가사였습니다. 중심 내용은 ‘우리 삶은 힘들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기억에 남는 가사는 “지라, 일 몬도 지라”였습니다. 지라는 돈다는 말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돌아요, 세상은 돌아요”입니다. 시작하는 사랑도 있고 끝나는 사랑도 있는데 세상은 낮이 오고 밤이 오고 또 낮이 오고 밤이 오는 식으로 계속 돈다는 가사입니다.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얼마나 찬란하게 느껴지겠습니까. 내일 아침에는 태양이 세 개 정도 떠오를 것 같은 기분일 것입니다. 하지만 태양은 하나만 떠오르죠. 사랑을 끝내는 사람에게는 세상은 오늘 끝이 날 것 같습니다. 오늘 밤으로 세상은 영원히 끝날 것 같은 기분인데 아침이 되면 또다시 하나의 태양이 떠오릅니다. 이 노래가 주는 의미는 세상살이가 어렵고 힘들어도 너무 걱정하거나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몽땅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것은 ‘기분’ 탓이고 사실은 내일의 태양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떠오를 테니 또 하루 열심히 살아보자는 내용입니다. 이 노래는 어바웃 타임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의 결혼식 때 웨딩 마치 대신에 나온 노래이기도 합니다. 집에 가셔서 한번 찾아서 들어보세요. ‘어바웃 타임’에 나오는 장면으로 보셔도 좋고, 잘 생긴 남자들이 나와서 부르는 동영상도 있습니다. 시편 146편과 어울리는 노래입니다.
*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화 교회 가족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할 바위가 되시고 환난 날에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보통 때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없고 하나님이 나에게 별 관심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다니시면서 어린아이가 길에서 걸어 다니거나 뛰어다니거나 노는 것을 볼 때 있으시죠? 그런데 어린아이가 혼자 길에 나와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엄마나 아빠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부주의해 보입니다. 나비를 보면 갑자기 보고 따라 달리기도 하고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기도 하고 방향을 순식간에 틀기도 합니다. 그런데 위험한 순간이 되면 어느새 엄마나 아빠가 달려와서 그 아이를 붙잡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그렇게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마음에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억울한 일을 당하면 어떡하지, 굶주리게 될 정도로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면 어떻게 하지, 집도 절도 없이 쫓겨날 상황이 되면 어떡하지,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물론 다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보통 그런 정도까지 이르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다행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대개 사람들은 그렇게 극한 상황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설사 그런 정도로 이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얼른 달려와 우리를 붙잡아 일으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되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근심하지 말고 즐겁게 기쁘게 살아가십시오.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평생 동안 의지하시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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