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 누가복음 24:13-35_큰 그림을 기억하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설왕은31 2023. 4. 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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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시: 2023년 4월 23일 오전 11시 (부활 후 세 번째 주일)

설교 장소: 분당성화감리교회

설교 제목: 큰 그림을 기억하라

설교 본문: 누가복음 24:13-35

 

(눅 24:13-35, 개정) 『[13] 그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들어가는 말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실 때에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제가 미국에서 돌아온 지 이제 만 5년이 되어 갑니다. 저는 미국보다 한국을 100배 정도 더 좋아하는데 그래도 미국에 있을 때 좋았던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꽃과 나무였습니다. 봄이 되면 정말 다양한 종류의 꽃이 여기저기 피어서 눈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가기 전에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보낸 봄이 2009년 봄이었는데 한국의 봄에 대한 기억은 10년 동안 거기서 멈춰 있었습니다. 미국의 애틀랜타나 뉴저지는 정말 꽃과 나무가 많습니다. 미국에서 봄이 되면 숲에 꽃이 피어나는 환상적인 광경을 보면서 즐거워하고는 했는데 이제 한국에 돌아가면 이런 장면을 못 보겠구나, 하고 아쉬워했었습니다. 그런데 제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대한민국에 돌아와 보니 우리나라도 봄이 되면 여기저기 꽃이 만발하더라고요. 2009년의 대한민국과는 달랐습니다. 그리고 해가 갈수록 꽃이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해마다 이맘때쯤 되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어떻게 해야 이 환상적인 꽃밭에서 잘 놀았다고 소문이 날까, 어떻게 해야 이 세상의 아름다움에 내가 합당한 반응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 보는데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본문 설명

오늘 본문은 부활절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에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간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천사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을 전해 주었지만 여인들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인데,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사건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그 말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부활했다는 말이, 죽은 줄 알았는데 안 죽었다는 말인지 아니면 비유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 정확히 그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기쁜 소식을 전달받았지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시신마저 없어졌기 때문에 하나둘씩 예루살렘을 떠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제자는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25리 정도 떨어져 있다고 나오는데 킬로미터로 환산하면 약 11킬로미터 정도입니다.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고 있는 도중 은근슬쩍 일행이 한 명 더 붙었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두 제자 중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였고 나머지 한 사람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아주 많았을 거라고 추정하면, 어쩌면 예수님이 그 사람들을 잘 몰랐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예수님이 잘 알고 있는 제자들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만났을 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예수님은 조용히 그 제자들과 같이 걸었을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서 엄청나게 낙심하고 비통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누군가 한 사람이 가까이서 함께 걷고 있다고 하더라도 크게 신경쓸 수 없었습니다. 함께 가고 있는 일행이 누구인지 제대로 얼굴도 한 번 확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잠시간 약간은 어색하게 세 사람이 함께 걸었겠죠. 성경에는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제 생각에는 그 상황이었다면 누구라도 예수님을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잠시 듣고 있다가 물었습니다.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까?”

그러자 두 사람이 갑자기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 엄청 심각하고 슬픈 표정을 지었습니다. 두 사람 중 글로바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당신은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최근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혼자만 모르고 있습니까?”

이 말은 일종의 책망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들썩거렸던 엄청난 사건인데 이 양반은 어떻게 이렇게 세상 돌아가는 물정에 어둡냐고 답답한 양반이라고 한심하다는 듯이 따지고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무슨 특별한 일이 일었습니까?”

두 제자가 예수님께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쭉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무덤에 옮겨졌는데 오늘 새벽에 여인들 몇 명이 찾아가서 빈 무덤을 발견했고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서 제자들 중 몇 명이 무덤을 찾아갔지만 예수님을 발견하지는 못했다는 말까지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다 아는 이야기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그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들은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이번에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미련하다고 대놓고 한마디 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을지 궁금합니다. 미련하다 또는 어리석다는 말을 다른 사람이 좋은 감정으로 들을 수 있도록 말하기는 매우 어려울 텐데요. 그래도 좀 부드럽게 표현을 하자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두 분은 매우 바보 같군요.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왜 그렇게 못 믿습니까?”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성경의 예언을 하나하나 풀어 주셨습니다. 11km를 같이 걸었다면 적어도 한 시간 이상 대화가 이어졌을 것입니다. 어느덧 그들은 엠마오에 도착했고 예수님은 더 가려고 했는데 두 제자가 같이 들어가서 밥을 먹자고 강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두 제자는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지만 예수님은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그 이후에 32절이 이어집니다. 두 제자는 서로 말했습니다.  

그분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리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않았습니까?”

우리말 성경에서는 뜨겁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영어 성경에서는 burning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즉 타고 있다는 단어를 썼습니다. 영어 성경은 이런 느낌입니다.

그분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리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활활 타오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바로 일어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미 날이 저물었다고 했고 저녁 식사도 했으니 꽤 어두워졌을 텐데 다시 11km를 걸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시간당 6km 정도를 걸을 수 있는데 약 두 시간을 걸어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 편도로 11km 거리였다면 두 제자는 네댓 시간 동안 약 22km를 걸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의 열한 제자와 또한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엠마오에서 돌아온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전달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왜 자신을 예수라고 밝히지 않으셨을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낙심과 절망과 비통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만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엄청난 기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분명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제껏 예수님의 사역을 지켜본 사람들이었다면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밀면 힘 한 번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픽 쓰러지는 허술하게 세워진 허수아비처럼 허망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로 추앙받고 환영받던 예수님은 정말 순식간에, 체포된 지 24시간도 되지 않아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신까지 없어졌고 여인들이 천사들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지만 그 여인들의 말을 무작정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도 없었습니다. 슬프지 않다면 정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슬픔에 빠져서 엠마오로 돌아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따라붙었습니다. 제가 만약 예수님이었다면 두 제자에게 저의 신분을 밝혔을 것 같습니다.

“저예요. 잘 보세요. 예수입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두 제자는 깜짝 놀라기는 했겠지만 그들이 느끼고 있었던 슬픔은 한순간에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두 제자가 슬픔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아마도 일부러 그의 얼굴을 제자들에게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예수님이 끼어들었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고 물었지만 사실 그 말의 의도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너네, 왜 슬퍼?”

여기에 대한 두 제자의 반응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너는 왜 안 슬퍼?”

그러면서 예루살렘에서 지난 며칠간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 말의 의도는 이런 것이었죠.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었는데 슬프지 않을 수 있냐?”

그 말을 듣고 나서 예수님은 물었습니다.

아니, 난 하나도 안 슬프고 너희가 되게 바보 같은데. 너희는 왜 믿음이 없어? 이미 예언자들이 수없이 예고한 일이 일어났을 뿐인데 왜 낙심하고 절망하고 있어?”

우리는 슬플 때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냥 슬퍼하도록 내버려 두고 이런 식으로 물어보셨습니다.

왜 슬퍼? 계획대로 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왜 낙심하고 있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는 예언이 수도 없이 있었는데 그거 왜 안 믿어? 왜 이렇게 어리석지?”

 

두 제자는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을 잘 모른다고 핀잔을 주었지만 사실 뭘 잘 모르고 있는 사람은 예수가 아니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예수라고 밝혔다면 제자들이 당장에 기쁘기는 했겠지만, 사실 제자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큰 그림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영광의 자리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큰 그림으로 본다면 그들의 낙심과 절망과 슬픔은 뭘 잘 모르는 반응, 즉 미련한 반응이었습니다.

고난을 견뎌야 할 때

사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세상에 두려운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 손을 대거나 말을 해서 병을 고칠 수도 있었고 눈먼 자의 눈을 뜨게도 했으며 죽은 지 며칠 된 나사로를 살리기도 하셨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마구 몰려들었고 예수님 근처에서 예수님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제자들에게는 기대감이 점점 커졌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것은 위험하기도 한 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자들의 기대감은 더 커졌을 것입니다. 이제 정말 뭔 일이 일어나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순식간에 돌아가셨고 그들은 구심점을 잃었고 그들이 예수의 제자였다는 사실은 자랑스러운 훈장이 아니라 그들을 위험에 빠뜨릴 만한 오점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낙심하고 절망한 근본적 이유는 그들이 따르던 예수님이 치명적인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예수님만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에게도 해코지가 가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까지는 일이 정말 술술 잘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잡히시고 돌아가시게 되자 예수님도 고난을 당하셨지만 제자들에게도 역경이 닥칠 것이라는 사실은 정말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보통 어떻게 반응합니까? 뭔가 고통스러운 일이 생겼다면 또는 생길 것 같다면 우리는 그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고통스러운 일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도 이해할 수 없었고 자신들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고난도 견딜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이 그렇게 허망하게 또한 그렇게 잔인하게 십자가형벌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고 병을 낫게 해 주고 좋은 말을 전하고 희망을 주고 위로를 준 것이 죄일 수 있습니까? 제자들이 알거나 경험한 사람 중 세상에서 제일 착한 사람이 예수님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예수님에게 죄라는 것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처참하게 고난을 당하고 결국 죽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해야 했다면 그들 역시도 고난을 당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 역시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왜 고난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당한 고난이 의외의 사건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셨습니다. 일어날 수밖에 없는 예견된 사건이었고 그래서 그 일들이 일어났지만 고난의 끝에는 영광의 자리가 있다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상기시키셨습니다. 고난과 영광이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이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의 삶에 비추어 자신들의 삶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고난이 닥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방식대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병든 자를 도와주고 상처받은 자를 치료해 주고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어주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을 한다면 이것이 무엇이 문제인지 잘 모르겠지만 고난이 닥칠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고난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이 닥치더라도 피하지 말고 선을 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도 슬퍼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첫째, 그 길이 예수님이 가셨던 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을 고난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영광의 자리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고난 자체는 선한 것이 될 수 없지만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당한다면 그 고난 속에 머물러야 합니다. 피하지도 말고 슬퍼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 길이 영광의 자리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치는 말

한 가지 예화를 말씀드리고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인천 공항에서 출발해서 미국의 JFK공항으로 가는 대한항공 여객기가 있었습니다. 인천에서 JFK까지는 약 14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한 일곱 시간 정도 지나서 비행기가 태평양 상공을 지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더니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무장한 북한 간첩들이 총을 들고 일어서더니 사람들을 위협했습니다. 북한 간첩 중 한 사람이 재빠르게 승무원 한 명을 인질로 삼아서 비행기 앞쪽으로 가더니 총을 쏴서 조종실 문을 부수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더니 기장의 목에 총구를 대고 소리쳤습니다.

기장 동무, 지금 내가 시키는 대로 기수를 돌리라우.”

그랬더니 기장이 뭐라고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기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차거.”

차가운 총구를 연약한 목살에 대었으니 정말 차갑기는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기장의 반응이 적절합니까? 아니죠. 어리석습니다. 바보 같습니다. 기장이 어리석은 바보 같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기장의 반응은 전체 상황의 커다란 맥락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미련하다고 핀잔을 준 이유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큰 그림에 대한 설명이 수도 없이 있었는데도 제자들은 순간적이고 감각적인 반응만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고난을 뜻밖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슬퍼하면서 자신들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고난을 피하기 위한 그들의 선택은 고난과 영광이라는 하나님의 큰 그림을 숙지하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화 교회 가족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선한 삶을 사셨던 예수님은 극심한 고난을 당하셨지만 또한 인간의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영광의 자리로 오르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고난 없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 없이 부활하셨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인생에 대해서 뭘 알아?”라고 말하면서 무시했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 없이 십자가 고난만 당하셨다면 우리의 인생은 그냥 슬픈 것이며 어떠한 고난도 견뎌낼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고난은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여러분, ‘고난과 영광이라는 큰 그림을 늘 기억하십시오. 선한 삶을 살다가 고난이 닥치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피하지 말고 부딪쳐야 합니다. 돌아서지 말고 앞으로 걸어 나가야 합니다. 물론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슬퍼하거나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광의 자리까지 견디며 나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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