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 로마서 8:6-11_어제 심은 사과나무

설왕은31 2023. 3. 2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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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제 심은 사과나무

본문

( 8:6-11, 개정)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들어가는 말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이 예배에 함께하는 모든 분에게 우리 하나님 주시는 생명과 평안이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은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이전 40일의 기간으로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지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잘 살아가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 기도를 소홀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는 시간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봄이 시작하는 무렵에 사순절을 보내게 됩니다. 요새 여기저기서 색깔이 막 터지는 것 같습니다. 즐겁고 신나는 계절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 말씀의 꽃이 팡팡 터지듯 피어서 사순절을 지나는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설명

제가 우리 교회에서 로마서를 본문으로 하는 설교는 오늘이 처음입니다. 저는 원래 로마서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20대 때에 성경 공부를 할 때면 주로 선택했던 성경이 로마서였습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로마 제국은 그 당시에 전 세계를 호령하던 나라였고 그 로마 제국의 수도에 있는 교회 공동체는 제국의 지대한 영향 아래 놓여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중심부에 교회를 굳건히 세우기 위해 바울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것과 믿어야 할 것을 잘 정리해서 열정을 담아 편지를 썼을 것입니다. 이 편지에는 강력한 호소력도 있어야 했고 탄탄한 논리도 필요했고 다양한 상황에 대한 실천 방안도 제시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복음의 진수가 로마서에 담겨 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로마서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신학을 배우고 나서는 로마서를 가지고 설교를 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로마서를 비롯한 바울 서신서를 보면 그리스 철학의 그림자가 드리어져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플라톤의 철학이 깃들어 있는데 이게 좀 불편합니다. 플라톤은 육신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육신은 영혼의 감옥이라고 여겼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맥과 상충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신의 업적에 대해서 평가하셨는데 그 평가는 한마디로 좋다입니다. 사람을 지으신 여섯째 날에는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과 육체에 대하여 긍정적인 정도가 아니라 극찬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보는 눈과 플라톤이 세상을 보는 눈은 서로 다릅니다.

 

하지만 로마서의 저자인 사도 바울이 활동하던 당시에 그리스 철학이 워낙 유행하고 있었고 그래서 공부를 좀 한 사람들은 이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서를 읽다 보면 플라톤의 철학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그리스 철학을 뛰어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문제는 읽는 사람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느냐입니다. 오늘 본문은 잘못 읽으면 그리스 철학에 빠져 버릴 수 있는 위험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마치 한 발자국만 잘못 내딛으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좁은 산비탈길을 걷는 마음으로, 조심하면서 잘 분별하여 받아들여야 합니다.

 

86절에 보시면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육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다음 7절은 더 심한 표현이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도 않고 순종할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8절에는 육신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7, 8절을 보면 육신은 정말 나쁜 거구나 그래서 우리는 육신 안에 있으면 안 되는구나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 구절들을 읽고 있으면 육신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원수와 함께 살고 있구나’ ‘내가 육신 안에 살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나 육신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육신이 정말 나쁜 것이라면 우리는 육신을 벗어버려야 합니까? 육신을 벗어버리는 방법이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죽으면 나의 육신을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런 식의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우리는 육신이 아니라 영 안에 있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11절에서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바울은 6절부터 육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들을 계속 쏟아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도 못하고 몸은 죽는 것이라고 그러면 썩어 없어질 테니까 결국 육신은 나쁜 것이라고 계속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11절에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계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몸이 진짜 나쁜 것이라면 몸을 살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몸이 죽어서 없어지면 더 좋은 일이 아닙니까?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임하시면 결국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몸은 죽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살리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면 우리의 죽을 몸도 살아날 것입니다. 11절까지 읽으면 우리는 적어도 육신은 나쁜 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이 나쁘다

육신이 나쁜 것이 아니라 육신과 관련된 무엇인가가 나쁩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분별해 내야 합니다. 육신이 나쁜 것이 아니라 육신의 생각이 나쁩니다. 여기서 또 설명이 필요합니다. ‘육신의 생각이란 육신이 하는 생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은 다 육신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육신 없이 생각한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보통 머리로 생각을 한다고 받아들이는데 머리도 육신입니다. 머리가 없으면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육신이 하는 생각이 아니라 육신을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사 를 이런 식으로 쓸 때가 있습니다. ‘앞에 있는 명사가 뒤에 나온 명사의 행동 대상일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질서의 확립’, ‘인권의 존중과 같은 말을 쓸 때 가 그런 역할을 합니다. 질서의 확립은 질서를 확립하는 것을 의미하고 인권의 존중도 인권이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인권을 존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금 더 풀어서 설명을 하면 육신의 생각육신에 고정된 생각입니다. 몸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해 보십시오. 육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의 대상을 몸으로 고정시켜 보십시오. 그 끝은 무엇입니까? 육신의 끝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몸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죽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그 끝에 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욕망을 따르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육신의 쾌락을 좇아서 몸에 안 좋은 것을 먹고 마시거나 육체를 혹사시키면서까지 쾌락에 탐닉한다면 더 빨리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아주 절제하고 몸을 잘 보살핀다고 하더라도 결국 우리의 몸은 죽습니다. 수명이 있습니다. 영원히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100년 정도 되면 거의 그 한계에 도달합니다. 육신을 골똘히 생각하면 그 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반대로 영은 어떻습니까? 특별히 그리스도의 영을 생각하면 그 끝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죽음이 없고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영을 생각하면 그 끝에는 생명과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대해서 집중해서 생각하면서 육신의 결국은 사망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요? 나의 육신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입니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을 버킷리스트라는 문구를 써서 표현하기도 합니다. 버킷리스트를 한번 작성해 보셔도 좋고, 다른 사람이 써 놓은 버킷리스트를 한번 보시면서 분석해 보십시오. 아마도 대체로 육신의 만족을 위한 리스트일 것입니다. 영화 버킷리스트에서 두 주인공이 써 놓은 리스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장엄한 광경 보기

2. 모르는 사람들 도와주기

3. 눈물 날 때까지 웃기

4. 머스탱 셀비로 카레이싱하기

5. 정신병자 되지 말기

6. 스카이 다이빙하기

7. 가장 아름다운 미녀와 키스하기

8. 영구문신 새기기

9. 중국 홍콩 여행, 이탈리아 로마 여행, 인도 타지마할 보기, 이집트 피라미드 보기

10. 오토바이로 중국 만리장성 질주하기

11. 세렝게티에서 사자 사냥하기

 

 

이 목록에서 마음에 드시는 것이 있습니까? 이 목록을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거의 다 자신의 육체를 즐겁게 하는 소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우리도 버킷리스트를 작성한다면 이것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미슐랭 별 세 개 받은 레스토랑 100군데 방문하기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좋을 것 같죠? 우리는 맛있는 것 먹고 멋있는 것 보고 싶어 합니다. 그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우리의 육신에 대해서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먹으면 막 웃음이 절로 나오는 음식을 먹으면 좋죠. 보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한 장엄한 광경을 보는 것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위대한 걸작품이니까요. 문제는 육신의 생각이 우리의 삶 전체를 집어삼켜서 그것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버릴 때 발생합니다. 육신이 나쁜 것이 아니라 육신의 생각이 나쁩니다. 사망에 이르기 전에 육신의 즐거움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이 바로 육신의 생각이며 이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어 봅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육신의 생각을 벗어나야 합니다. 육신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생각을 벗어나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벗어나면 우리의 행동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마 이 말을 다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

 

 

이 말이 뭔가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저는 이 말이 참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옛날에는 이런 가정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이런 가정을 해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내일 밤 1023분에 소행성 1492가 지구로 떨어질 것이 예상되어서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내일 밤 1023분에 완전히 소멸될 것이라는 뉴스가 떴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내일 지구가 산산조각이 날 텐데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은 참으로 쓸모없는 행동 아닙니까?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오늘 사과나무를 한 그루 심을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사과를 하나 사든가 아니면 어떻게든 구해서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보통 사람이 하는 생각이고 오늘 본문에 나온 구절을 인용하면 육신의 생각입니다. 죽기 전에 육신의 쾌락을 최대한 누리겠다는 생각입니다.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것은 올바른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겠다는 말입니다. 가치 있는 일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칠 만한 행동을 하겠다는 말입니다. 나무를 심는 것은 나쁜 일인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환경에도 좋고 보기에도 좋고 나무는 여러 가지로 유익을 줍니다. 게다가 사과 열매를 맺는 나무라면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그 나무로부터 맛있는 사과를 먹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나도 죽을 것이고 사과나무도 죽을 것이고 사과를 먹을 수 있는 사람들도 몽땅 죽을 텐데 어떻게 이런 기이한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인터넷으로 찾아봤습니다. 이 말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한 말일까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찾아봤습니다. 저는 이 말을 스피노자가 한 것인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한 말이거나 그 당시에 회자되는 말이었다 합니다. 마틴 루터도 이 말을 했고 스피노자도 했다고 하는데, 마틴 루터는 16세기 사람이고 스피노자는 17세기 사람이기 때문에 마틴 루터에게 그 저작권을 돌리는 것이 맞습니다. 스피노자가 마틴 루터의 말을 인용한 것 같습니다. 마틴 루터가 했다고 하니 오늘 본문에 비추어 보면 설명이 됩니다. 일단 루터는 내일 지구의 종말을 생각해야 할 만큼 평생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살았습니다. 마틴 루터는 육신의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영의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영의 생각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영의 생각은 끝이 없는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래서 육신의 죽음이 잠시 동안의 수면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내일 죽더라도 또는 지구에 종말이 와서 우리가 다 같이 죽더라도 오늘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죽음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는 말

사랑하는 성화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오늘 사과나무를 심어봅시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죽음이라는 말이 참 여러 번 나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죽음이라는 말이 모두 다섯 번이 나옵니다. 그중에 세 번이 11절에 모여 있습니다. 11절에 나온 죽음은 모두 극복되는 죽음입니다.

 

저는 종종 죽음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죽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고는 하는데 그중에 하나의 주제가 자살과 살인입니다. 자살은 자신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고 살인은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것입니다. 살인의 경우에도 단 한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한정 짓는다면, 자살도 살인도 결국은 한 사람이 죽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살이 더 나쁠까요, 아니면 살인이 더 나쁠까요? 자살과 살인 중 어느 것이 더 나쁜지에 대해서 이해가 잘 되는 비유를 하나 소개합니다. 각 사람에게 짜장면을 한 그릇씩 나누어 준다고 해 봅시다. 이 짜장면이 바로 생명입니다. 자살은 자기가 받은 짜장면을 먹기 싫다고 뒤집어 버리는 것이고 살인은 남이 받은 짜장면을 자기가 마음대로 엎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비유로 설명해 보면 자기 짜장면을 엎어버리는 것보다 남의 짜장면을 엎어 버리는 것이 더 사악한 행동으로 느껴집니다. 어떤 사람이 그 짜장면을 맛있게 먹으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와서 그 짜장면을 다짜고짜 엎어버린다면 그 사람의 행동은 매우 악하게 보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자살보다 살인이 더 나쁜 행동일 수 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또 다르게 생각도 해 봅니다. 이 세상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잖아요.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을 하나의 큰 그림이라고 생각을 해봅시다. 그런데 그 그림에서 일부분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저 사람은 세상에 없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히틀러 같은 사람, 이완용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경우가 되겠죠. 그 사람 한 명을 세상에서 지운다면 이 세상이 참 좋은 세상이겠다 싶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 생각을 직접 실천에 옮기면 살인을 저지르는 나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대해서 전체적으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몽땅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못 견디겠다고 해서 세상이라는 그림을 모조리 지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세상이 너무 큽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하나 있는데 이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살아가는 나 자신을 없애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자살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면서 세상에 대한 최악의 평가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행동입니다. 어쩌면 자살이 살인보다도 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행동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는 자살하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자살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 하나가 육신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인간의 삶은 육신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육신이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육신의 생각의 끝에는 사망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어야 하는데 잘 믿지 못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의 생각입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안에 거하는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죽은 몸도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밤 10시에 내가 죽는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하지만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나의 죽은 몸을 살리실 텐데, 내 몸이 다시 살아나는 날 내가 죽은 오늘은 어제가 될 것입니다. 오늘이 어제가 되려면 내가 내일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오늘 죽으면 오늘은 어제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내가 죽은 날이 어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어제 일은 기억이 잘 납니다. 자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상황 판단이 안 될 때가 있잖아요. 내가 왜 지금 여기에서 잠을 잤지, 하고 갑자기 놀라면서 깰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을 해보고는 합니다. 우리의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날 아마도 우리가 죽은 날 무엇을 했는지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만약 내가 죽은 날 나쁜 짓을 저질렀다면 부끄러워서 계속 죽은 척하고 있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내일 내가 눈을 뜰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었다고 해봅시다. 나의 육신이 살아나는 날 그 사과나무는 내가 어제 심은 사과나무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제 내가 좋은 일 했어라고 생각하며 뿌듯함과 기대함을 가지고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화 교회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오늘 사과나무를 심으셔야겠죠? 오늘 영의 생각을 가지고 사과나무를 심음으로써 우리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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