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 시편 32편_행복하게 사는 방법

설왕은31 2023. 2. 2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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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시: 2023년 2월 26일 오전 11시 (사순절 첫 번째 주일)

설교장소: 분당성화감리교회

 

제목: 행복하게 사는 방법

 

(시 32, 개정) 『[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교훈 [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6]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7]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8]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9]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10]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들어가는 말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이 예배에 함께 하는 모든 분에게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봄바람처럼 임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은 입학졸업 축하 예배입니다.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시작을 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놀랍고 기쁜 일들이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이번에 입학하는 저희 첫째 아이 보면서 저는 ‘아, 참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해 주기도 합니다. 새로운 시작이 불안하기도 하겠지만 엄청난 가능성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시기도 될 것이고 평생을 함께 할 친구들이나 선생님도 만나게 될 것이고 무엇보다 젊음의 기운이 있으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마음껏 힘을 기울여 볼 수 있는 시간도 될 것입니다. 오늘은 또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그리고 이번 주에는 꽃이 피는 3월이 됩니다. 설레는 시간입니다. 꽃이 피는 이 계절은 2023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활짝 펴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 함께 걷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설명

시편은 주제에 따라서 몇 가지로 분류를 할 수 있습니다. 탄식시, 찬양시, 감사시, 지혜시, 참회시와 같은 분류로 각각의 시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시편이 어떤 분류에 속하는지 알면 대충 내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32편은 분류하기 어려운 시편입니다. 감사시인 것 같기도 하고 개인 참회시인 것 같기도 하고 지혜시인 것 같기도 합니다. 초반부에 보면 시인이 뭔가 잘못을 저지르고 그 잘못을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회개하는 것 같습니다. 또 잘 읽어 보면 시인은 회개하고 하나님이 용서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잘 살펴보면 시편 32편은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지,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전체 맥락에서 볼 때 시편 32편은 지혜시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1절과 2절에서 시편 32편의 주제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1절의 마지막과 2절의 마지막은 같은 말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무엇무엇한 자는 복이 있도다”로 끝이 납니다. 복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도 되고 행복하다는 뜻도 됩니다. 복을 받으면 행복해집니다. 복받은 사람 또는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 시편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만약에 누군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어떤 삶을 살기 원하세요?” 또는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라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아마도 많은 분이 “저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혹시 주변에서 “저는 불행한 삶을 살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도 없으실 겁니다. 실제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있지만 불행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시편 32편은 ‘행복하게 사는 방법’에 대해서 지혜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시편 32편을 잘 읽어 보고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시편 전체가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서술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시편을 참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시편은 사람의 다양한 감정이 춤을 추듯 분출되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감정 중에서도 사람이 제일 갖고 싶은 감정은 행복입니다. 아 참 행복하다,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시편 1편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성경 66권 중 가장 긴 책, 150개의 시로 구성되어 있는 시편의 첫 번째 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행복하려면 이렇게 살아야 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핵심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편 32편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으로 시작하는데 시편 32편은 1절의 끝에서 복이 있도다가 나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시편 1편과 시편 32편이 시작하는 단어가 똑같습니다. “복이 있도다” 또는 “행복하다”를 의미하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시편 32편도 시편의 핵심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 복을 받아서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면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입니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1절과 2절에서 시편 기자는 죄를 세 가지 단어를 써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허물, 죄, 정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죄를 표현하는 단어가 많은데 우리말로 번역하기 어렵습니다. 처음에 나온 허물은 일부러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입니다. 일부러 나쁜 짓을 하는 것을 허물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transgression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어원을 보면 가로질러 걸어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영어 단어가 뜻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잔디를 밟지 마시오”라고 써 있는데 그걸 보고도 굳이 잔디 안으로 들어가서 밟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빨간 신호등이 켜져 있는데 굳이 건너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행동이 바로 허물입니다. 두 번째 나온 ‘죄’는 과녁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허물보다는 좀 낫죠? 허물은 굳이 반항하는 것, ‘죄’는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잘 안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활쏘기 체험해 보면 과녁이 있고 화살을 쏴서 맞히면 되는데 잘 안 맞습니다. 그래도 과녁 방향으로 쏘는데 엉뚱한 데 가서 맞기도 합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마지막 정죄에서 사용된 ‘죄’라는 단어는 ‘죄’보다는 ‘악’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이 죄는 공정하지 않음, 정의롭지 않음,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죄라는 단어를 세 가지나 사용하면서 이 죄들이 모두 가려지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3절에서 시인은 갑자기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입을 열지 않아서 뼈가 쇠할 정도로 아픈 상황이고 주의 손이 나를 눌러서 진액이 빠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름에 가뭄으로 인해서 말라버린 상태처럼 되어버렸다고 말합니다. 아픔과 마름의 상황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자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모든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께 ‘말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죄를 고백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9절에서 시인은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무지한 말이나 노새는 재갈과 굴레로 단속해야 하는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시인은 그렇게 어리석게 살지 말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10절에 나온 악인은 자신의 잘못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죄인이기는 하지만 악인은 아닙니다. 시인은 죄를 짓고 죄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이 악인이라고 부릅니다. 절대로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어떨까요? 악인은 자기 멋대로 살고 자기 잘못도 인정하지 않으니까 나름 기쁘게 살 것 같은데 많은 슬픔이 있다고 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잘못을 아뢰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두른다고 말합니다. 악인은 슬프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기쁨과 즐거움이 넘친다고 시편 기자는 서술하고 있습니다.

 
죄의 세 가지 그물

시편 기자가 죄를 언급할 때 세 가지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죄의 그물을 여러 개 풀어서 그 안에 사람들을 다 가두려는 의도입니다. 허물, 죄, 악에 해당하는 죄의 그물을 모두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첫 번째 그물인 허물은 그나마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명확하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어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에 나온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명확하게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거짓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허물이라는 그물을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그물인 ‘죄’를 벗어날 수 있을까요? 무엇이 선한 일인지 알고 그 선한 일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면 반드시 그 일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도, 즉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그 길로 가려고 의도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길로 제대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단순한 예로 땅에 금을 그어 놓고 그 금을 따라서 걸어 보십시오.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벗어나기 쉽습니다. 사실 이 두 번째 ‘죄’라는 단어에 걸리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세 번째 단어인 ‘악’도 빠져나가기 힘든 그물입니다. 하나님 뜻에 대한 존경이 부족한 것, 또는 정의롭지 않은 것이 ‘악’인데 두 번째 그물을 벗어난 사람이라면 이 세 번째 그물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두 번째 그물을 벗어나려면 ‘선한 행동’을 제대로 해야 하는데, 사람에게 선한 행동이란 ‘사랑’입니다. 그런데 정말 누군가를 온마음으로 사랑한다면 공정하게 행동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유리하게 판단하고 그 사람에게 좋은 방향으로 행동할 것입니다. 그러면 공평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런 사람은 바로 이 세 번째 그물에 걸립니다.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아주 쉬운 질문입니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슬플까요, 아니면 그물을 걸리지 않은 물고기가 슬플까요? 네, 당연히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슬플 것입니다. 똑같이 생각해 보면 죄라는 그물에 걸린 사람이 슬프고 죄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기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기는 것을 싫어합니다. 죄인으로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은 비참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실상은 반대라고 분석합니다. 죄라는 그물을 풀어서 우리를 가두려고 하는 이유는 우리를 괴롭히거나 우리를 슬프게 하거나 우리가 그물 속에 갇힌 물고기를 잡아먹듯이 우리의 생명을 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를 둘러싸는 것은 따가운 그물이나 차가운 감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시편 32편 10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0]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자백하여 입으로 말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관계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방법

우리는 착하게 살아야 하지만 착하게 사는 것과 행복과는 크게 관련이 없습니다. 착하게 살면 행복할까요? 착하게 살려면 힘듭니다. 나 혼자 기준을 세워서 착하게 살려고 해도 힘들고, 다른 사람에게 “너, 참 착하다”라고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더 힘이 듭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준과 기분도 맞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서 선한 삶을 살려면 얼마나 긴장하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시편 32편은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하게 사는 방법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죄가 있는데 용서받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입을 열어서 죄를 고백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관계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과도 사랑과 용서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 앞에 선한 사람으로 당당하게 서 있으며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름 사람과도 그런 관계를 맺기가 쉽습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기쁘고 즐거울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많은 슬픔이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정말 많은 슬픔이 있는지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한번 잘 관찰해 보시고 혹시 여러분이 그런 삶의 시간이 있었다면,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나는 절대로 잘못한 게 없어’라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있었다면 그때 여러분의 삶이 기쁘고 즐거웠는지 아니면 슬펐는지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저도 그런 시간이 있었습니다. ‘나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라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들을 기억해 보면 그때 참 힘들었고 시편 32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슬펐습니다. 내가 착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주장하고 항변하고 상대방이 잘못했거나 나를 오해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크게 소리를 내어 지적하고 나의 선함을 지키기 위해 언제든지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항상 옳고 상대방은 항상 나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니가 나빴어” 또는 “네가 잘못했어”라고 말하면 전쟁이 벌어집니다. 전쟁에서 승패가 갈리기는 하지만 사실 전쟁이 일어나면 모두가 다 패자입니다. 특별히 전쟁의 상대가 내가 사랑하는 배우자, 나의 자녀들, 형제자매들, 부모님, 또는 친한 친구, 직장 동료, 사업 파트너라면 상대방을 눌러서 내가 이길 때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날 수 있겠습니까? 


마치는 말

사랑하는 성화 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행복합시다. 저는 이번에 시편 32편 설교를 준비하면서 죄에 대해서 다시 한번 묵상해 보았습니다. 죄가 행복한 묵상 주제는 아닙니다. 시편 기자가 언급한 죄에서 특별히 제가 걸리는 그물은 두 번째 그물입니다. 첫 번째 허물은 아마 대충은 넘어갈 수 있습니다. “잔디를 밟지 마시오”라고 쓰여 있으면 저는 굳이 그리로 가서 잔디를 밟고 지나가지 않습니다. 착해서가 아니라 소심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 말라는 행동을 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그물에 확실히 걸립니다. 우리가 가야 하는 올바른 길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참 어렵습니다. 제가 사랑하려는 누군가의 마음이 제 왼손이라고 하고 제 마음은 저의 오른손이라고 합시다. 제 마음을 던져서 상대방의 마음을 맞히는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잘 맞히기가 어려워요. 제 마음을 던졌는데 상대방의 마음에 제대로 맞지 않으면 오히려 상대방을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상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생 텍쥐페리가 쓴 “어린 왕자”라는 책 아시지요? 제가 최근에 “어린 왕자”를 두세 번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여러분, 어린 왕자가 왜 자신이 살던 소행성에서 떠났는지 아십니까? 어린 왕자가 살던 소행성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이 한 송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바람에 실려와 싹을 띄우고 꽃이 피었습니다. 그런데 그 꽃이 여간 까탈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침을 갖다 달라고 하고 바람막이를 세워달라고 하고 밤에 춥다고 하고 거짓말도 하고 어린 왕자에게 면박을 주기도 하고 거짓말도 했습니다. 어린 왕자는 그 꽃 때문에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어린 왕자는 후회했습니다. 꽃이 하는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합니다. 어린 왕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꽃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고 판단했어야 했는데, 꽃이 향기를 풍기고 내 마음을 환하게 해 주었는데. 도망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그 불쌍한 거짓말 뒤에 애정이 숨어 있다는 걸 나는 눈치채지 못했던 거예요. 꽃은 정말 모순덩어리예요! 하지만 난 너무 어려서 그 꽃을 사랑할 줄 몰랐어요.


그 꽃은 어린 왕자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꽃의 사랑 표현은 어린 왕자의 마음에 가서 정확하게 딱 맞지 않고 빗나갔습니다. 그것이 어린 왕자에게 상처가 되었고 결국 어린 왕자는 그 꽃으로부터 도망쳤습니다. 인간의 삶이 모순적일 때가 참 많은데 우리는 때로 사랑하기 때문에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 꽃의 사랑 표현이 어린 왕자를 내쫓았듯이 말이죠. 


특별히 내가 더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그런 일이 더 자주 발생합니다. 나의 배우자 또는 우리의 자녀들을 사랑할 때 나의 사랑이 그들에게 상처가 될 때가 있습니다. 또는 그들의 사랑이 나에게 상처를 줄 때도 있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말을 하지?, 하고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자녀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하는데 자녀는 “내가 알아서 할게” 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럼, 또 의심을 합니다. ‘우리 아들이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 걸까?’ 그런데 아이도 똑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아빠는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울까?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 걸까?’ 사랑은 어렵고 우리는 사랑에 서툴러서 우리의 사랑은 서로 빗나갑니다. 그 순간에 화가 나서 “야, 너 이리 나와 봐” 하고 감정을 폭발시키면 그 순간에 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랑의 의도를 가지고 죄를 짓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에 서툴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고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 표현이 많이 빗나가도 어떤 때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않고 우리의 행동으로 판단하시고 어떤 때는 우리의 행동에 눈을 감아 주시고 우리의 말을 믿어 주시며 오래 참고 용서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생각하면 저는 참 안심이 됩니다. 우리는 참 서툴고 언제든지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입으로 고백할 수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그물 안으로 들어가서 복 있는 사람이 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예수의 비유로 풀어 본 사랑 이야기 "사랑해설"(설왕은 지음)
http://aladin.kr/p/0L760

🛐 예수님이 가르쳐 준 기도, 제대로 알고 합시다 "주기도문으로 응답하라" (설왕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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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이 따뜻해지는 에세이 "빗속을 걸어라"(설왕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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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빗속을 걸어라

빗속을 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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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으로 응답하라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용서와 우리의 용서 사이의 관계, 악의 문제 등 어려운 주제들이 가득한 주기도문을 알기 쉽게 설명한 책이다. 주기도문의 의미를 분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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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설

종교의 껍데기와 고정관념에 의해 가리어져 있던 예수의 진짜 사랑 이야기. 왜, 어떻게,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사랑할 때 나타나는 부작용은 무엇인지 다룬다. 사랑이라는 렌즈를 통한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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