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본문: 시편 122편
설교 장소: 분당성화감리교회
설교 일시: 2022년 11월 27일
(시 122, 개정)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2]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3]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5]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8]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들어가는 말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하나님을 함께 예배하는 모든 분에게 하나님 주시는 평화가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그동안 이상 고온 현상 때문에 늦가을인데도 봄 햇살 같은 태양이 내리쬐어서 따뜻한 가을을 즐길 수 있었는데 이제는 겨울이 오려나 봅니다. 다음 주 날씨 예보를 보니까 목요일에는 영하 9도까지 떨어진다고 합니다. 아마 다음 주는 겨울 옷을 단단히 입고 다니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은 교회 달력으로 한 해가 시작하는 주일입니다. 세상의 달력에서는 1월의 첫 번째 일요일이 새해의 첫 주일이지만 교회 달력으로는 오늘이 새로운 해의 첫 번째 주일입니다. 교회에서는 새로운 해를 먼저 시작하는 것이죠. 그래서 대림절 첫째 주일은 아주 의미 있는 주일입니다. 또한 대림절은 성탄절을 바라보는 절기입니다. 저는 크리스마스를 좋아합니다. 여러분도 좋아하시죠? 대림절 첫째 주일은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성탄절을 맞이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 그럼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도록 소원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 설명
시편 122편은 다윗의 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설명이 맨 앞에 붙어 있습니다.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에 가는 순례의 길에 있는 사람들이 불렀던 노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편 122편은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자고 누군가가 제안했고 그래서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가는 길은 기쁨의 여정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122편을 보면 좀 특이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을 의인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후반부에 보면 예루살렘을 계속 ‘너’라고 부르면서 친근감 있게 언급합니다. 이 시편 전체에 예루살렘에 대한 애정이 넘쳐흐르고 마치 애인을 부르듯이 다정하게 예루살렘을 대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시인은 예루살렘 성문 안에 들어가서 바로 성큼성큼 걸어가지 않고 잠시 서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예루살렘 성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너무 감격스러운 일이라서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그 감동을 느끼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시편 기자가 예루살렘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3절부터 5절까지 세 가지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첫째, 예루살렘은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뭐가 좋으냐면 안전한 느낌을 주는 도시라는 것이죠. 함락되지 않는 도시, 그래서 예루살렘 안에 있는 성전도 안전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자고 했을 때 기뻐했던 두 번째 이유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모두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뭉치고 있다는 점에서 그랬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고 그 성전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려고 모든 지파가 모입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의 구심점이 되는 도시입니다. 셋째, 예루살렘에는 심판의 보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예루살렘 성전의 사법적 기능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속적인 사법 기관의 기능을 말하는 것인지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예루살렘 안에는 성전도 있고 궁전도 있기 때문에 그 둘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예루살렘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정의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편 기자는 “나는 예루살렘이 좋아”라고 말하고 있고 그 이유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6절에서 시인은 요청합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의 집이나 공동체에 들어갈 때 평화의 인사를 전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 자신도 당연히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를 빌겠지만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도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고 요청합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 자체가 평화의 장소, 평화의 마을,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의 뜻처럼 예루살렘은 반드시 평화로운 도시가 되어야 한다고 시인은 생각하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친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할 것이라고 일이 술술 잘 풀릴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예루살렘 사랑에 동참하라고 사람들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7절부터 9절까지 시인은 예루살렘에게 직접 말을 겁니다. 직접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고 있습니다. 성 안에 평안이 있기를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8절에 다시 한번 평안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구하는 이 평안은 단순히 예루살렘을 위한 평안이 아닙니다. 시인의 형제와 친구를 위해서 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9절은 시편 122편의 결론입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예루살렘은 평안해야 하고 복을 받아야 하는데 그 마지막 결정적 이유는 그곳에 우리 하나님의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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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며 올라갑시다
시편 122편은 예루살렘 성전을 항해 가는 순례자가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에 우리의 경우에 비추어 본다면 교회에 가면서 부르는 노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상황과 그들의 상황은 매우 다릅니다. 우리는 보통 주일마다 교회에 오지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는 것은 특별한 절기에만 갔기 때문에 많아야 1년에 몇 번 정도입니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특별한 교통수단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아마도 거의 걸어갔을 텐데, 그렇다면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은 며칠씩 걸려서 예루살렘에 갔을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이미 순례였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사셨는데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거리는 지금 도로로 약 150km 정도이고 이천 년 전에 도로가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은 것을 고려해 보면 약 200km 정도 되는 거리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나사렛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간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하루에 20km를 걷는다고 해도 10일이 걸리는 일이고 그 길은 걷기 좋은 길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연히 힘든 일이었고 위험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10일을 하루에 20km씩 걸어서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한다면 그 감격은 어떻겠습니까? 예루살렘 성문 앞에 도달했을 때 안도감과 함께 드디어 도착했다는 기쁨과 이제 성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설렘을 동시에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주일마다 교회에 오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성전에 도착했다는 기쁨과 설렘을 가지기는 어렵습니다. 교회에 오는 길도 그리 멀지 않고요. 교회 오는 길이 멀다고 하더라도 차를 타고 오기 때문에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122편에 나온 예루살렘은 교회보다는 성탄절, 12월 25일을 대입해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은 공간을 지시하지만, 성탄절을 ‘시간의 예루살렘’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성탄절은 예수님이 태어난 날이고 우리는 그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공간의 순례 여행이라면,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림절은 시간의 순례 여행입니다. 시간 여행이 좋은 점이 있습니다. 공간 여행은 나의 다리로 걸어가든가 아니면 차를 타든지 비행기를 타든지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이동해야 하는데 시간 여행은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흘러가거든요. 시간 여행은 다리 아플 일이 없고 돈 들 일도 없습니다. 시간 여행의 단점도 있습니다. 항상 미래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또 다른 단점이 있는데 시간 여행은 머물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예루살렘에 머물 듯이 우리는 성탄절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금세 휙 지나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휙 지나가거든요. 성탄절이 딱 4주일이 남았습니다. 별생각 없이 별 감정 없이 지내도, 우리는 성탄절이라는 성전에 들어갈 텐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감동도 없이 설렘도 없이 성탄절을 지나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일단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시편 122편 1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대림절 기간에 우리가 단 하나의 감정만 가져야 한다면 그 감정은 바로 기쁨입니다. 우리는 기쁨으로 성탄절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 예수님이 가르쳐 준 기도, 제대로 알고 합시다 "주기도문으로 응답하라" (설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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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재정비하라
성탄절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삶을 재정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탄절 당일에만 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길은 분명히 고생스러운 순례길이었겠지만 단지 고통스러운 여행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가는 기쁨이 있었을 것이며 정말 오래 걸리는 여정이지만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성전에 들어감으로써 그들의 삶을 재정비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삶의 중심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그들은 그들의 삶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며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집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삶의 계획을 재정비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최후의 보루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시편 122편이 반복해서 간구하고 있는 주제가 있는데 바로 예루살렘의 평안입니다. 예루살렘에 평화가 있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평화가 있어야 성전을 보존할 수 있고 그래야 성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약 예루살렘이 다른 나라에 의해서 점령이 되거나 예루살렘이 혼란한 상황 가운데 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예루살렘을 반드시 평안하게 지키고 싶어 했으며 예루살렘을 위한 복을 구했습니다.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다른 나라에 의해서 점령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예루살렘만은 반드시 평안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에 평화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힘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는 그들의 삶이 깨어지고 부서지더라도 예루살렘이 건재하다면 그래서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순례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탄절까지는 우리는 4주 동안 순례의 길에 오릅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가는 길을 통해 그들의 삶을 재정비했던 것처럼 우리도 크리스마스를 중심으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재정비해야 합니다. 삶이 고단할 때가 참 많습니다. 때로는 원치 않는 환난으로 인해서 평화가 깨어지고 혼돈의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나의 계획대로 삶이 흘러가면 좋은데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발생합니다. 삶의 평화가 깨어질 수 있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챌 수도 없게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아등바등 살아가느라고 주변 상황을 돌아보지도 않고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기도 합니다. 나는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 생각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삶에 기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그래서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의 여정에 올라야 합니다. 성탄절을 바라보며 대림절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흐트러진 삶을 다시 정돈하고 방향을 조정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 완전히 혼돈 상태로 무너졌다면 여기서 삶의 기초를 확인하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또한 평화 가운에 성탄절을 맞이하여 이천 년 전에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났던 예수님을 다시 만나면서 삶의 여정에 용기를 불어넣고 기운을 내고 방향을 세밀하게 조정해서 다시 하나님과 함께 걸어야 합니다.
😁 가슴이 따뜻해지는 에세이 "빗속을 걸어라"(설왕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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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용
사실 제가 늘 가지고 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보통은 중학교 2학년 때 하는 질문인데 저는 이 질문을 계속 품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사람은 왜 살까?” 여러분, 사람은 왜 살까요? 그 질문에 여러분은 어떤 답을 가지고 계십니까?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답을 가지고 계십니까? 삶이 참 고단합니다. 삶은 즐거운 것이기도 하지만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때도 많이 있습니다. 혼란스러울 때도 많이 있습니다. 풍요로운 삶을 살고 싶은데 겨우 겨우 살아가기도 합니다. 일이 술술 풀리면 좋은데 뜻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남들은 다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뒤처진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남들은 다 행복한데 나만 어렵게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신세한탄을 하기도 하고 그냥 괴로워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럴 때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은 왜 살까?” 아무래도 제가 공부를 계속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다소 자신 있게 그 답을 하고는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라고 스스로 대답을 하거나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해 살지 또는 이사야 43장 21절에 나온 말씀처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서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또는 노래하기 위해서 살지라고 대답을 했는데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런 답이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제가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으로 인해 즐겁다기보다는 세상일로 즐거움을 느낄 때가 많아서 그것도 좀 아닌 것 같고요. 제 삶이 하나님께 무슨 영광이 되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단한 업적을 이룩한 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 같고 그러면 결국 나는 왜 살까, 또는 사람은 왜 살까라는 질문에 만족할 만한 답변을 하지 못합니다. 삶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습니다. 저는 목사이고 공부도 오래 한 박사인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살면 살수록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잠깐 제 아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 아내는 진짜 좋아하는 취미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유학할 때 가지게 된 취미인데, 바로 헌 옷 가게 가기입니다. 영어로는 쓰리프트 샵이라고 불렀는데 제 아내 말로는 쓰리프트 샵을 갈 때 너무 좋아서 마음이 떨릴 정도라고 합니다. 거기에 있는 옷은 모두 헌 옷입니다. 그래서 가격이 보통 5불, 10불 정도 합니다. 아내도 하도 좋아해서 저도 몇 번 따라갔는데 저는 적응이 잘 안 되더라고요. 아내가 사 오는 것을 보면 꽤 괜찮은 옷을 싼 가격에 사 오는데 실제로 가서 보면 이런 잡동사니처럼 보이는 혼돈의 옷 뭉치 속에서 어떻게 옷을 사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절도 듭니다. 주변 사람들이 아내가 싼 값에 괜찮은 옷을 사 오는 것을 보고 같이 갈 때가 있었는데 보통은 한 번만 같이 가고 그다음부터는 안 가더라고요. 다들 저와 같은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여기서 좋은 옷을 골라낼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생각을 하죠. 저는 아내에게 일종의 능력 같은 있다고 보는데, 옷이 쓰레기 더미처럼 쌓여 있더라도 거기서 좋은 옷을 알아보고 골라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참 신기한 능력입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번 가 보고 포기하게 되죠. 저에게는 옷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옷을 잘 아는 사람은 어떤 옷이 좋은 옷이고 아름다운 옷인지 알아보는 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질이 좋고 아름다운 옷인데도 헌 옷이기 때문에 다른 옷들과 엉켜서 뒹굴고 있는 옷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옷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옷은 선택을 받게 됩니다.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사람은 왜 살까?”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면서 제가 이어서 가진 의문은 이런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까? 사람이 생명의 가치, 삶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까? 옷이 옷의 가치를 알아볼 수는 없습니다. 옷의 가치는 사람이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도 저 같은 사람은 옷의 가치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옷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옷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그 옷의 가치를 알아볼 것입니다. 저는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생명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생명과 삶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분은 알고 계십니다.
마치는 말
사랑하는 성화 교회 성도 여러분, 예루살렘으로 올라갑시다. 삶이 힘들고 고되고 고통스럽고 정말 바쁘지만 성탄절을 바라봅시다. 왜 사는지 잘 모르겠다면,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대답할 수 없다면, 스스로 답을 찾지 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대답을 들어봅시다. 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나 자신에게 나쁜 평가를 내리고 스스로 괴로워하지 마시고 사람을 지으신 그분에게 가서 그분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봅시다. 성큼성큼 성탄절이라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그 성전 안에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어둡고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는 희생까지 감수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렇게까지 사람이, 내가, 우리가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사람이니까 사람을 잘 알지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스스로를 믿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갑시다. 올라가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사랑과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를 믿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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