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새로운 마음을 가지라
(마 4:12-22, 개정)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들어가는 말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설날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모이신 모든 분에게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넘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제는 진짜 새해가 된 것 같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2023년입니다. 생각해 보니 우리는 새해를 세 번 맞이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력으로 일단 시작합니다. 교회는 대강절이 시작되면서 한 해가 시작됩니다. 12월 초쯤에 새해가 시작되죠. 그리고 양력 달력으로 1월 1일이 또 새해입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새해라고 생각하는 첫날은 또 음력 1월 1일, 오늘입니다. 설날이라고 부릅니다. 2023년이 토끼띠의 해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오늘부터 계묘년입니다. 2023년 토끼띠의 해가 꼭 기억할 만한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2023년에 내가 뭐했더라가 아니라 2023년에 내가 무엇을 했지, 무슨 사건이 일어났지라고 좋은 기억으로 떠올릴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설명
오늘은 설날로서 한 해를 시작하는 날이고,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세례 요한이 잡혀 가면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주로 사시던 동네는 나사렛이었는데 세례 요한이 잡히고 나자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서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잡히자마자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사역을 시작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호수에서 좀 떨어져 있는 동네이고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의 북쪽에 붙어 있는 지역입니다. 갈릴리에서 가버나움까지는 북동쪽으로 약 40km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나사렛은 시골 촌동네였지만,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에 붙어 있어서 어업이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상업도 아주 번창했던 번화한 지역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서 사역을 시작하신 이유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한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바빌론 포로시기 이후로 지속적으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마태는 이사야서에 나온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라고 칭한 지역이 바로 가버나움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메시지는 간단하고 명료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하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나와 있지만 제가 ‘천국’이라고 하지 않고 ‘하늘의 나라’라고 말한 이유는 ‘천국’은 죽은 이후에 가는 곳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 나온 천국은 헬라어로 정확하게 풀어서 번역하면 ‘하늘의 나라’(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입니다. 물론 ‘하늘의 나라’는 중국글자말로 쓰면 ‘하늘 천’에 ‘나라 국’을 써서 ‘천국’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우리가 보통 천국은 지옥과 대조되는 말로 죽은 후에 가는 곳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하늘의 나라’로 풀어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하늘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하늘을 의미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계시는 초월적 세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하늘의 나라’이건 ‘하나님의 나라’이건 둘 다 의미는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나라를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4장 18절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가버나움 지역이 바로 갈릴리 해변 지역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는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당연히 근처에 어부가 많이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어부의 직업을 가졌던 사람이 많았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정확히 말하면 호수입니다. 그런데 갈릴리 바다라고도 하고 갈릴리 호수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고대 히브리어는 호수와 바다를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8절에 보면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베드로와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셨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호수인데 바다라고 말했다고 틀린 것이 아닙니다. 갈릴리 호수도 맞고 갈릴리 바다도 맞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우리의 관점에서 부르는 말이고, 갈릴리 바다는 예수님 살던 당시에 사람들이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18절에 보면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죠.
“나를 따라오세요. 내가 여러분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안드레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어렸을 때 성경을 읽으면서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던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이런 행동들이 저는 불가능해 보였거든요.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고 제자들이 따라나서는 것에는 전조나 복선, 사전 작업 같은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했고 길을 가다가 베드로와 안드레를 만났고 “너, 너 나와” 하니까 주저함 없이 바로 나오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게 말이 되나, 또는 이게 가능한가라는 질문과 함께 인상에 깊이 남았습니다.
마태가 서술한 바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 모집은 거침은 없으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먼저 합류를 했고 바로 뒤이어서 또 다른 제자를 모집하십니다. 21절에 보면 거기서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만나셨습니다. 여기서 세베대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야고보와 요한이 아버지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베대, 야고보, 요한이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온 대로 이해하면 예수님은 하루에 적어도 제자 네 명을 모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 모집 과정은 해변에서 조개껍데기 줍는 것보다 더 쉬웠던 것 같습니다. 조개껍데기는 허리를 굽혀서 골라낸 후에 모래라도 떨어내야 하는데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너, 너. 나와”라고 말하면 가지고 있던 그물도 자동으로 내려놓고 따라나선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을 보면 마치 제자들이 초면에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고 예수님의 설교나 메시지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합니다. 성경에 전후 사정을 다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이 친절하게 서술되어 있지 않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의 카리스마로 말만 하면 사람들이 다 듣고 순종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서기 전에 이미 충분한 이해와 설득의 과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과정을 이처럼 짧게 서술한 것은 마태의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는 이 부분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당장에 생업 도구를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랐던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의 본을 따르라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바꿔라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한 단어로 말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는 말은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고백하고 앞으로는 똑바로 행동하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닌데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원어로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입니다. 헬라어에 담긴 뜻을 그대로 살려서 이해하면 ‘마음을 바꾸라’ 또는 ‘생각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또는 ‘다르게 생각하라’로 번역하는 것도 좋습니다. 잘못한 것을 이실직고하고 앞으로는 똑바로 살라는 말과는 사뭇 다른 말입니다. 회개는 ‘뉘우칠 회’에 ‘고칠 개’자를 쓰기 때문에 회개는 이미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알고 있어야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원어 ‘메타노에오’에 담긴 의미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을 다 내려놓고 또는 버리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살펴보면 ‘회개하라’가 어떤 의미인지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요청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천국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늘의 나라라고 말하는 이유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은 “잘못을 빨리 고쳐라 안 그러면 너희는 다 죽는다”라는 말로 오해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새로운 나라가 왔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가면 누구의 법을 따라야 합니까?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당연합니다. 새로운 나라가 임한다면 우리는 그 나라에 맞는 사고 방식과 생활 방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바꾸십시오. 새로운 나라가 왔습니다.”
또는,
“이제는 다르게 생각하십시오. 새로운 하늘의 나라가 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사고 방식을 버리기를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사고방식은 땅의 나라에 속한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땅의 나라 사고방식을 버리고 하늘의 나라 사고방식을 가지기를 촉구하십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이제까지의 삶을 돌이켜보고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해 보고 잘못한 것을 고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새로운 생각을 하고 삶의 방식을 바꾸라는 요구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의도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도 예수님의 의도를 잘 알아차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뒤이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세요. 내가 여러분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처분해서 헌금한 후에 예수님을 쫓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돈이나 재물에 관한 요청이 아닙니다. 이제까지는 물고기를 낚는 어부였는데 앞으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말씀은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요구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 가졌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질 것을 요청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안드레는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태가 그의 복음서를 읽는 이들에게 이제까지 가졌던 삶의 방식을 버려두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익히도록 재촉하고 있습니다.
삶으로 삶을 배우라
간혹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아니, 착하게 살면 되지.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뭐가 있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맞습니다.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착하게 살려면 무엇이 착한 일이고 무엇이 악한 일인지 자기 스스로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아마 가끔 그런 문구 보신 적 있을 것입니다. 착한 김밥, 착한 라면, 착한 짬뽕, 착한 구두, 착한 바지, 착한 가방, 이런 말 들어 보신 적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착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사용하는 ‘착하다’라는 단어는 가격이 싸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도 잘 합니다. “가격이 참 착하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좋은 물건을 싼 가격에 내어놓으면 그것을 착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준에서 착하다는 말과 하나님의 기준에서 착하다는 말은 같은 뜻일까요?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너희 생각에 착하게 살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착하게 살라는 요구를 받는다면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기준에서 착하게 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준이 하나님 나라 기준에 맞는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이미 무엇이 착한 일이고 무엇인 나쁜 일인지 잘 알고 있다면 제자들이 자신들이 하던 일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라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냥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더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면 될 텐데요.
제가 지난 목요일에 청년들과 함께 모임을 했습니다. 모임의 이름은 ‘사랑해설1’입니다. 제가 쓴 책 ‘사랑해설’을 한 달에 한 챕터씩 읽으면서 각 장의 마지막에 나온 질문들을 통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장의 내용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였습니다. 어느 해에 풍년이 되어서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수확량을 얻은 부자가 자신의 창고를 늘릴 계획을 세웠는데 그 밤에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취한다면 그가 얻은 재물이 결국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보통 우리는 그 부자 비유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제가 그 글을 쓸 때도 그렇게 느꼈지만 이번에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 부자는 우리의 기준에서는 전혀 어리석은 부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나쁜 짓을 해서 수확량을 늘린 것도 아니고 재물을 가지고 나쁜 짓을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이 나중에 노후를 편하게 보내려고 저축해 놓겠다는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갑자기 여러분에게 돈이 들어와서 여윳돈이 1억이 생긴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갑자기 생긴 1억을 자신의 노후를 위해서 연금저축에 넣어 놓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마 거의 백이면 백 잘했다고 칭찬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르게 생각해 봐라. 생각을 바꾸어 보아라. 기존의 사고방식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사고방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익혀야 합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고 그 바뀐 생각에 따라서 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단순히 “앞으로는 진짜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저절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고 새로운 삶을 방식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업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새로운 생각을 배우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익혀야 했습니다. 그들은 배워야 할 것이 많았고 또한 그것을 삶으로 실천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요구는 단순히 너의 기준에서 착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기준 자체를 바꾸라는 요구입니다. 왜냐하면 다시 말씀드리지만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나라에서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할 때 반드시 교회 공동체에 속해야 합니다. 교회의 지체들과 함께 살면서, 삶으로 삶을 배워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웠던 것처럼 우리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생각과 삶의 방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마치는 말(적용)
사랑하는 성화 교회 가족 여러분, 오늘은 2023년의 설날입니다. 2023년 여러분 모두 가족들 건강하고 화목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족이 화목하려면 무엇보다도 부부 사이에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는 천륜이라서 끊으려야 끊을 수 없지만 부부 관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종종 끊고 싶습니다. 그럴 때 집안에 풍비박산이 일어납니다. 2023년 가족의 화목을 위해 오늘 말씀을 구체적으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사귈 때 또는 부부 간에 다툴 때가 있습니다. 남녀 간에 다투게 되어서 여자 쪽이 마음 상해하면 보통은 남자가 먼저 사과를 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싸우더라도 보통은 남자 쪽보다 여자 쪽이 훨씬 더 속상해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런데 여기서 순순히 여자 쪽에서 “그래, 내가 용서할게”라고 넘어가면 좋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보통은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 뭐를 잘못했어?”
저도 남자로서 이 말은 매우 섬찟한 말입니다. 그럼 이다음에는 어떤 장면이 이어질지 여러분도 대충 예상하실 것입니다. 보통 남자들은 단순해서 자기가 잘못을 해 놓고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릅니다. 물론 모든 남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대체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싸우는 와중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라고 말하는 것은 진짜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싸우기 싫어서 그냥 하는 말이죠. 그러니까 뭐를 잘못했냐고 물으면 사실은 잘못한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할 말이 없습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앞으로 잘할 수가 없습니다. 남자들에게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복잡한 감정의 세계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이 세계에 대해서 배우지 않는다면 쭉 계속 잘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남녀 사이의 세계는 말로 또는 글로 배울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삶으로 부딪치면서 배워야 하는 세계입니다. 그래야 나중에는 진짜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저도 아직도 배우고 있습니다.
남녀 사이의 세계도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는데,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에 일어나는 땅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 사이에 충돌은 얼마나 더 심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새로운 마음과 생각을 배우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열심히 익혀야 합니다. 신앙 생활은 책이나 지식을 통해서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을 배울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주변에 예수님을 믿기 원하시는 분이 있다면 성경책을 던져 줄 것이 아니라 교회로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 성화감리교회는 그리스도인을 낳을 수 있는 좋은 교회입니다.
설날 아침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마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2023년 한 해 동안 열심히 하나님의 나라 시민의 생각과 삶을 배우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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