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 마태복음 10:34-39_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설왕은31 2023. 6. 25.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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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설교 일시: 2023년 6월 25일

설교 장소: 분당 성화감리교회

본문: 마태복음 10:34-39

(마 10:34-39, 개정)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인사말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모든 분이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풍성히 누리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은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73주년이 되는 날이고 또한 순교자 기념 주일입니다. 어제 기획위원회 때문에 교회에 오기 위해서 명동에서 9401을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공화당에서 시위를 하고 있었는데, 정말 오래간만에 625노래를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625일이면 칠판에 625노래 가사를 적고 그 노래를 부르던 기억이 납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한국전쟁을 일으킨 북한을 단순히 조국의 원수라고 부르기에는 적당하지 않고 북한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매우 복잡합니다.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서는 백 번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이제는 평화 통일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순교자의 정신을 가진다면 평화 통일의 날이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희망해 봅니다.

 

본문 설명

마태복음 10:34은 당혹스러운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평화의 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태어날 때도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예수님도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은 참된 평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속된 표현으로 마태복음 1034절은 골때리는 말씀입니다. 진짜 머리를 한 대 팍 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 뭐라고? 예수님이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이게 무슨 말이야?” 그래서 이런 말씀을 들을 때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일단 잘 읽어봐야 합니다.

 

칼을 주러 왔다는 말은 칼부림을 일으켜서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35절에 보면 칼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칼은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불화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족 간의 화목을 깨뜨리려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은 누구보다도 이 세상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사이입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도 내어줄 정도로 서로를 사랑하는 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끈끈하고 강력한 사랑의 끈을 끊어버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말씀일까요? 그리 좋은 일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누구보다도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될 것이라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이 왔고 그것을 위해서 칼을 쥐어 줄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가족 간의 화목을 끊어버리려는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아무 이유 없이 가족 간의 화목을 깨뜨리고 식구끼리 원수가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무슨 목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목적은 36절에 나옵니다. 가족 간의 끈끈하고 강력한 사랑의 끈을 끊어버리려는 이유는 식구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의도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에게 합당하지 않고 아들이나 딸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예수님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는 이유는 가족 간에 끈끈하게 얽혀서 서로를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사랑의 끈을 끊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식구 간에 있는 사랑의 끈을 완전히 모두 끊어버리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가족 간의 사랑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해야 합니다. 어머니가 딸을 사랑하고 아끼지 않으면 누가 사랑하겠습니까? 딸이 어머니를 사랑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다. 가족 간에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보다 크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가족 간의 사랑이 너무 강력해서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면 그 사랑을 조금 끊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끈을 아예 끊어버리고 서로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관계가 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가족 간 사랑의 끈을 조금 끊어내고 해야 할 일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위해서 죽어라, 순교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또는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이나 고통스러운 일을 억지로 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여기서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와 연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곧 죽으라는 말로 받아들이거나 심각하게 고통스러운 일을 감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과 비슷한 말씀이 마태복음 1624절과 25절에도 나옵니다. 마태복음 1624절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한 후에 십자가를 지라는 말이 아니라 십자가를 진다는 말 자체가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이면서 동시에 그 정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고행을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심하게 자기를 부인하라는 의미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도 어려운 말입니다. 나는 나인데 내가 나라는 것을 부인하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삶의 방향성을 뜻합니다. 나 자신에게 몰두하는 삶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삶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삶을 멈춰야 하는 이유가 39절에 나와 있습니다. 나 자신에게 몰두하는 삶을 사는 사람을 결국 생명을 찾지 못할 것이고 예수님에게 몰두하는 삶을 사람은 결국 생명을 찾을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생명을 잃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발견하고 그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실제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는 제자들이 실제로 예수님을 따라다닐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을 의미할까요? 만약 그렇게 이해한다면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주신 칼로 가족과 얽혀 있는 연을 끊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고통스럽더라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라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일도 중요합니다. 예배드리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성경 공부하는 것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드리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성경 공부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따르는 일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실제로 쫓아다니거나 교회에서 종교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공부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공부 자체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고 그것이 선한 일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성경 공부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또는 하나님의 뜻을 이미 알고 있지만 논리적인 근거나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 달리 말하면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서 성경공부를 하기도 합니다. 성경공부 자체가 최종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뜻을 행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너무 쉽습니다. 사랑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앞뒤를 한번 살펴보십시오. 어떤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꺼내셨는지 살펴보시면 역시나 사랑해야 하는 상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0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 10:1, 개정)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귀신을 쫓아내면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받은 제자들이 주로 찾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병에 걸려도 치료할 돈이 없어서 계속 고통을 당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로 가난한 자들 소외받는 자들에게 갔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모든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을 못 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더욱 예수님의 손길과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부자도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도 사랑해야 합니다. 부자라고 미워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데 부자들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랑을 못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자들을 소홀하게 대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차별이 아닙니다. 모두가 받아야 할 사랑이 있는데 그 사랑을 못 받는 사람에게 사랑의 양을 채우는 정당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나 먹고 살 돈도 없는데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을 돕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병 고치는 은사라도 있었으니 그 능력으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겠지만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주로 어떤 사람이었겠습니까? 돈 많고 권력 있는 기득권 계층이나 지도자들이 아니라 돈 없고 권력 없고 무시받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그런 어려움을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42절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아무리 돈이 없고 가난해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작은 자 중 한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을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결단코 그 상을 잃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곧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에서 남으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일종의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달리 말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나에 대한 시선에서 남에 대한 시선으로 옮겨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맛있는 것을 먹을 것인가, 내가 얼마나 예쁜 옷을 입을 것인가, 내가 얼마나 좋은 집에서 살 것인가와 같은 나에 대한 관심에서 남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 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곧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향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생각하는 것이고, 더 큰 공동체의 이익을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것인데 많은 사람이 이와 같은 방향 전환을 이루지는 못하지만 이와 같은 방향 전환을 이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나에 대한 집중에서 벗어나서 남에게 관심을 돌릴 때, 나의 이익보다는 타인의 이익 더 나아가서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거나 그 결심을 행동으로 옮길 때 그것을 가장 열심히 방해하는 사람은 바로 가족입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한 연설 중에서 제가 종종 기억에 떠올리는 연설이 있습니다.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 주었던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그만 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독재 정권에 맞서서 시위를 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탄압받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대신 전해주며 권력에 맞서서 싸우던 젊은이들을 가장 열심히 말렸던 사람들은 바로 그들의 엄마, 아빠였습니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 되고 국민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밝힐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 말은 맞는데 그런 세상이 와야 하는 것은 옳은데 내 자식이 희생당하는 것을 볼 수는 없습니다. 눈치 보면서 너는 뒤로 빠지라고 조언합니다. 부탁하고 명령합니다.

 

예수님이 꿈꾸는 세상은 모든 사람이 그저 사람으로서 존중받고 존엄성 있게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투쟁이 필요하다면 투쟁을 해야 할 것이고 고난을 당해야 한다면 그 고난을 감내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은 세상을 꿈꾸고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이 가족에 의해 저지당한다면 그때는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나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는 시선을 거두고 남으로 시선을 옮길 때 그리고 그들을 사랑할 때 그로 인해서 내가 생명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남에게 관심을 두고 그들을 어떻게 사랑할지 그들을 어떻게 도와줄지 생각하고 실천할 때 생명을 발견하고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생명은 내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바깥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39절에 우리말로 목숨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어는 프쉬케입니다. 프쉬케는 목숨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보통 영혼이라고 번역하는 단어입니다. 프쉬케는 숨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프쉬케는 죽음의 반대말인 생명으로 한정 짓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의미의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39절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숨을 쉬는 사람은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숨을 쉬는 사람은 자기가 살아 있다는 기쁨을 찾을 것입니다.” 진정한 생명은 내가 나를 위해서 살 때 찾아지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바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나의 이웃들을 돌보면서 그들과 함께 숨을 쉬고 혹시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이 있다면 그들이 숨을 쉴 수 있도록 도와줄 때 생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치는 말

사랑하는 성화 교회 가족 여러분, 진정한 생명을 찾아서 그것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이 참 어려웠습니다. 보통 예수님 말씀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들릴 때가 많기는 한데 오늘은 특히 더 어려웠습니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수긍하고 받아들이기도 어렵습니다. 우리의 상식과는 어긋나는 말씀입니다. 목숨을 얻는 자가 잃을 것이고, 목숨을 잃는 자가 얻으리라는 말씀은 정말 이상한 말씀입니다. 짜장면을 먹는 자는 짬뽕을 먹을 것이요, 짬뽕을 먹는 자는 짜장면을 먹을 것이다. 예배에 참석하는 자는 예배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요,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자는 예배에 참석할 것이다. 얼마나 이상한 말입니까? 짜장면을 먹는 자는 짜장면을 먹을 것이요, 짬뽕을 먹는 자는 짬뽕을 먹을 것이다라고 말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상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풍성한 삶을 누리기 원하는데, 그 방법은 우리의 상식과는 반대입니다. 내 삶에 집중할 때 내 생명은 오히려 빈약해지고 남의 삶에 도움을 주려고 할 때 내 생명이 오히려 풍성해집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제가 아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미국에 있다가 한국에 들어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여쭈어 봤다고 합니다. “어머니, 뭐 필요한 것 있으세요? 제가 한국에 들어갈 때 사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분 어머니는 미국을 굉장히 좋아하는 분이셨고 또 꽤나 잘 사시는 분이셨습니다. 그 어머니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미국을 다 가지고 와라.”

 

우리는 풍성한 삶을 누리고 생명의 만족을 느끼기 위해서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자기 안에 모아 들이려고 합니다. 맛있는 것도 먹고 비싼 시계도 차고 고급 자동차도 타고 아름다운 미술품도 사들입니다. 하지만 생명은 그런 식으로 발견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624절부터 나와 있는 말씀이 오늘 본문과 비슷한데 마태복음 1626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미국을 다 가진다고 하더라도 온 천하를 다 가진다고 하더라도 생명은 거기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무언가를 내 안에 채움으로써 참된 삶의 기쁨을 누리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은 내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바깥에서 다른 사람을 살게 해 주고 그들과 함께 숨을 쉴 때 찾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 말씀대로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음으로써 참된 생명을 찾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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