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바다 끝에서
설교 본문
(시 139:7-14, 개정)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들어가는 말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요새가 딱 여름휴가 기간입니다. 그리고 일 년 중 가장 더운 시기이기도 합니다. 가장 더운 이 시기에 일을 잠깐 멈추고 쉬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여름휴가에는 주로 여행을 많이 가시는데요. 제일 많이 가는 여행지가 아무래도 바다죠. 여러분들도 교회에 다니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바닷가에서 모래 속에 몸을 파묻고 쉬고 계시거나 파도에 몸을 맡겨 물속에서 출렁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바다를 참 좋아합니다. 겨울 바다도 좋아하고 여름 바다도 좋아합니다. 서해보다는 파도가 높이 치고 깨끗한 동해를 좋아합니다. 파도에 몸을 맡기고 있으면 바다가 저를 들고 흔들어 주면서 놀아 주는 것 같아서 재밌습니다. 거대한 지구와 놀고 있는 느낌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비록 바다에는 못 가셨지만, 사실 알고 보면 여기도 바다입니다. 들어오시면서 안내판 보셨죠? 여기는 성화해수욕장입니다. 하나님 은혜의 바다가 출렁이는 곳입니다. 심지어 오늘 설교 제목도 ‘바다 끝에서’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함께하는 모든 분이 하나님 은혜의 물결에 몸을 맡기고 성령이 주시는 회복과 기쁨을 만끽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본문 설명
시편 139편은 다윗의 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고 느끼셨겠지만 시편 139편은 그리 유쾌한 분위기가 아닙니다. 시인은 억울하고 답답하고 위험한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다. 시인을 대적하는 무리가 그의 피를 보고자 그를 뒤쫓고 있습니다. 그의 피를 흘리기를 원한다는 것은 단순히 조금 혼내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를 죽이려고 쫓고 있는 무리가 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와 뜻을 같이 하면서 그를 지켜주고 지지해 주는 무리가 있다면 한 번 싸워볼 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시편 기자 옆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의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 모두 떠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결백과 정당함을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늘 살펴보셨으므로 자신이 부당한 대우와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주 잘 알고 계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 되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시인은 이상한 질문을 합니다. 갑자기 하나님을 따돌려 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떠나 어딘가로 가 볼 수 있을까, 또는 하나님을 피해볼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혹시 하늘 높이 올라가면 하나님께서 거기까지 못 따라오시지 않을까? 땅 속 깊숙한 곳으로 숨어 들어간다면 하나님께서 못 쫓아오시지 않을까?’ 사람이라면 하늘 높이 또는 땅 속 깊숙한 곳으로 달아난 사람을 쫓아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렇게 머나먼 곳으로 깊숙한 곳으로 갔을 때도 하나님께서 이미 거기에 계시다고 확신합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시편 기자의 확신은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9절 이하는 그의 경험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9절에 새벽 날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사람은 날개가 없는데 날개를 친다는 표현도 특이하고 날개 앞에 새벽이라는 말을 붙인 것도 범상치 않습니다. 그런데 새벽 날개가 있다면, 점심 날개도 있고 저녁 날개도 있을까요? ‘새벽 날개’는 문학적이고 감상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아마도 새벽 날개는 하늘에 보이는 천체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하늘에 보이는 별은 공중에 떠 있으므로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새벽 날개에서 새벽은 아침에 동이 트기 전에 보이는 아침별 morning star, 달리 말하면 샛별, 금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동쪽에서 떠서 서쪽 바다 끝으로 떨어지는 천체를 생각하면 새벽 날개나 바다 끝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새벽에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바다 끝에 가면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다 끝에 가면 위험합니다.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거기서도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든다고 말합니다.
바다 끝은 해가 지는 곳이고 떨어져서 죽을 수 있는 위험한 곳이며 어둡고 캄캄한 곳입니다. 그래서 11절에 시인은 흑암이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이 밤이 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밤이 되어서 흑암이 온 세상을 덮으면 무섭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함께하십니다. 12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12] 주님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며, 밤도 대낮처럼 밝으니, 주님 앞에서는 어둠과 빛이 다 같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 갑자기 시인의 시선이 옮겨 갑니다. 자신의 외부에서 자신의 내부로 옮겨 갑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내장을 지으셨고 엄마 뱃속에서 자신을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자신을 지으신 것이 참으로 기묘하다고 느끼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흑암 속에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시편 139편의 ‘새벽 날개’를 진짜 날개로 생각하고 그림을 그린다면 새벽 날개를 어떤 색깔로 칠하시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날개가 있다면 그 날개의 색깔은 어떤 색깔일 것 같습니까? 날개가 있으면 하늘을 훨훨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으니까 아마도 밝은 느낌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처럼 하얀색도 좋고 하늘의 색깔처럼 파란색도 어울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편 139편에 나오는 새벽 날개는 밝은 색으로 칠하면 안 됩니다. 시편에 나온 새벽 날개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입니다. 시인은 아침해가 뜨기 전 하루 중 가장 어두운 새벽에 날갯짓을 하고 있습니다. 날개의 색깔이 하얀색이었다고 할지라도 빛이 거의 없기 때문에 검은색으로 보일 것이 확실합니다. 게다가 날개를 치며 가는 곳 또한 좋은 곳이 아닙니다. 날개를 치며 하나님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피해서 바다 끝으로 도망가고 있습니다. 바다 끝은 해가 지는 어두운 곳이며 아마도 한 발자국만 더 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곳입니다. 잠시라도 날갯짓을 멈추면 어두운 무저갱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곳입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새벽 3시에 내 남편이 또는 내 아내가 갑자기 일어나서 집 밖으로 나가는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무슨 일일까요? 아주아주 불길한 일입니다. 조금 있으면 큰일이 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새벽 3시에 문소리가 작게 ‘쾅’ 하고 들려서 잠이 깼는데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사람이 안 보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장에 따라 나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두운 시간에 갑자기 나간 그 사람은 더 어두운 곳으로 찾아갈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시편 139편을 쓴 시인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간 경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어두운 시간에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어두운 곳으로 가서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갈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해가 뜨기 전에 산에 올라가 아래쪽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벽 위에 올라섰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바다 끝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찰나에 그를 붙드시는 손을 느낍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은 정확하게 그를 붙들었습니다. “아들아”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그의 마음속에 들립니다. 그렇다고 이 정도로 자신의 결심을 포기할 거라면 새벽에 나와서 산에 오르는 수고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외쳤습니다. 새번역에 나온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11] “아, 어둠이 와락 나에게 달려들어서, 나를 비추던 빛이 밤처럼 되어라.” (새번역)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나님의 빛을,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합니다. 그러나 이내 시인은 깨닫습니다.
[12] 당신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고 밤도 대낮처럼 환합니다. 당신에게는 빛도 어둠도 구별이 없습니다. (공동번역)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우리를 꽃길로 또는 빛으로 인도하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어둠의 길을 걸을 때가 꽤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두려움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빛을 비추어 주세요. 어둠을 물리쳐 주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도 하지만 때때로 그냥 어두움 속에 우리를 놓아두십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함께하시는 것 같은데 상황이 하나도 나아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계속 어둠 속에 있는 것 같고 때로는 더욱 짙은 어둠이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 때는 주위를 둘러보면 안 됩니다. 어차피 봐도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상황을 살펴보면 더 두렵기만 합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의 손을 꽉 잡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에게는 흑암이나 빛이 모두 같아서 하나님 손을 붙잡고 가면 넘어질 일도 없고 위험할 일도 없습니다. 어둠 속에 있다면,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그저 한 걸음씩 걸으십시오.
자존감이 무너질 때
시편 139편을 쓴 시인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시를 통해서 시인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추리해 볼 수 있습니다. 12절과 13절을 보면 시선의 이동이 매우 갑작스럽고 내용이 잘 이어지지 않습니다. 12절에서는 흑암과 어두움에 대해서 말하다가 갑자기 13절에서는 자신의 내장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13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왜 갑자기 이런 시선의 이동이 생겼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거한다는 것은 막장에 다다른 상황입니다. 아마도 시인은 극단적인 선택도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시인은 수많은 적들로 에워싸여 있었습니다. 만약에 주변에 누군가가 나서서 시편 기자를 응원하고 도움을 주었다면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그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요? “너 때문에 우리가 불행해졌어. 너 때문에 우리가 너무 힘들어. 너만 없어지면 우리가 모두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존감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존감은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느낌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 나는 소중한 존재야, 라고 느낀다면 자존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존감은 스스로 만들어내기 어렵습니다. 보통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떤 모임에 가서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는데 아무도 아는 척도 안 해 준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사람들이 눈길 한번 안 주고 또 앉을 데도 없어서 어정쩡하게 서 있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 자신을 소중한 사람이라고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모임에 가서 인사를 했을 때, “네 저도 반가워요. 잘 오셨습니다. 여기에 앉으세요. 시원한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이렇게 반응해 주고 사람들도 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봐 주면 아마 저도 모르게 ‘아, 내가 이 모임에서 정말 중요한 사람이구나’라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시편 139편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죽이려는 듯 증오의 눈빛으로 시편 기자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를 따르거나 응원하거나 추종하거나 지지하던 사람들도 주변에 없었습니다. 그런 날이 하루이틀이면 괜찮겠지만 한 달 두 달이 되고 또는 몇 년 동안 그런 시간이 이어진다면 어떨까요? 자존감이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자존감을 가질 수 있을까요?
한 열흘 전쯤에 저희 막내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아빠는 삶의 목표가 뭐야?” 일곱 살 때쯤에도 아빠는 커서 뭐가 될 거냐고 물어봐서 그때도 당황했는데 최근 질문도 쉽지 않았습니다. 저희 아이가 볼 때는 제 삶의 목표가 확실해 보이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제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얼른 생각해 봤습니다. 생각해 보니 살면서 계속 삶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는 대학교 가는 것이 삶의 목표였고 대학교 가서는 대학원 가는 것이 목표였고 대학원 졸업하고는 취직하는 것이 목표였고 취직하고는 결혼을 하는 것이 목표였고 결혼하고는 아이를 낳아서 가정을 꾸리는 것이 목표였고 신학을 시작하고 나서는 목사가 되는 것 그리고 박사 학위를 받는 것이 목표였고 박사가 되고 나서는 교수가 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아마 그 목표를 이루었다면 또 다른 목표를 세웠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목표가 손에 잡힐 것 같지 않고 그 목표를 향해 달릴 힘이 없어서 멈췄습니다.
저희 아이의 질문을 받고 보니 저는 지금 삶의 목표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희 아이가 볼 때도 제가 좀 한심해 보였나 봅니다. 삶의 목표가 없다니 말이죠. 순간 저의 자존감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저의 삶을 돌이켜봤습니다. 뭐 잘한 게 있나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제가 삶을 쭉 돌이켜 보니 제가 제일 잘한 일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일인 것 같습니다. 조금 더 포장해서 말해 보면, 저는 사랑을 했고 또 사람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이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울컥하면서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내가 꼭 어떤 대단한 일을 이룩해 내야, 사람들이 모두 다 성공이라고 할 만한 어떤 일을 해내야 내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걸까?’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이 시편 기자와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 기자를 지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의 대적자들은 그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를 비웃고 조롱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너는 실패했잖아. 너는 일이 잘 안 풀리고 있잖아. 너는 결국 못 해낼 거잖아. 너는 결국 안 될 거야.” 그런데 그런 말은 그의 대적자들이나 전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만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시인도 스스로 자기는 결국 실패하고 일이 안 풀릴 것 같고 결국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가치가 없구나, 내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구나, 결국 나는 이렇게 어둠 속을 헤매다가 죽겠구나.’ 그를 둘러싸고 있는 흑암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습니다. 그럴 바에야 무가치한 시간을 줄이는 것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시인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으로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나님의 손이 그를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극적으로 그의 시선을 옮겼습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시선은 자신의 밖이 아니라 자신의 안으로 향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너무 신기하고 경이로웠습니다. ‘내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기관이 있고, 그 여러 기관들이 조화롭게 움직이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엄마의 뱃속에서 이 모든 것을 지으셨구나!’ 그래서 시인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자존감이 +100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너의 존재만으로 이미 감탄의 대상이야. 인정?”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화 교회 가족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정말 소중하게 지으셨습니다.
제가 잠버릇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가 있는지 몇 개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희한한 버릇이 하나 있습니다. 잠버릇은 제가 자고 있으니까 저 스스로 알 수 없는데 그 희한한 버릇은 제 아내가 알려줘서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걱정하는 일이 있으면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침대에 앉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그 상태는 제가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 상태로 얼마나 오래 앉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내가 옆에서 자다가 이상한 인기척이 나서 옆을 보는데 제가 고개를 저 아래에 처박고 앉아 있는 거죠. 처음에는 놀라서 아내가 저를 불렀다고 합니다. “여보, 여보” 하고 불렀는데 제가 대답을 안 하니까, ‘아 이 사람이 지금 자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고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누워, 누워. 자. 자.” 그러니까 제가 다시 누워서 잤다고 합니다. 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제가 종종 그러는 것 같습니다. 제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마음이 힘들 때 그런 행동을 합니다.
아마도 제가 무의식적으로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갈 채비를 했던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시편 139편의 경험은 몇몇 사람들만 겪는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삶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습니다. 주변 상황이 어두워지면 혼란에 빠지고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으로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으로 가는 일이 발생합니다. 빛이 들어오기를 간절히 소망하는데 점점 더 어두워지면 어느새 그 희망을 버리고 정말 제일 어두운 곳으로 숨어 들어가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그렇게 바다 끝에 가신 적이 있다면 그때 하나님이 그의 손으로 여러분을 붙잡아 주신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손을 기억하십시오. 두 가지 축원을 하고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먼저, 다시는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거하게 되는 일이 여러분과 저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하지만 혹여나 다시 또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게 된다면 그 바다 끝에서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나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는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림절설교] 누가복음 1:46-55_복이 있다 하리라 (1) | 2023.12.24 |
---|---|
[설교] 마태복음 20:1-16_먼저 와서 좋은 점은? (0) | 2023.09.24 |
[설교] 마태복음 10:34-39_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0) | 2023.06.25 |
[설교] 요한복음 7:37-39_목이 마르면 (0) | 2023.05.28 |
[설교] 누가복음 24:13-35_큰 그림을 기억하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0) | 2023.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