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대림절설교] 누가복음 1:46-55_복이 있다 하리라

설왕은31 2023. 12. 24. 11:40
300x250

설교 일시: 2023년 12월 24일 오전 11시

설교 장소: 분당성화감리교회

제목: 복이 있다 하리라

(눅 1:46-55, 개정)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인사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지난 한 주 날씨가 너무 추웠습니다. 그리고 그제가 동지였습니다. 일년 중 낮이 가장 짧은 날이었습니다. 이제 동지로부터 이틀 지났으니까 그때보다 낮이 조금 더 길어졌겠죠? 그리고 앞으로 622일까지 계속 낮이 길어질 것입니다. 저는 그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사람이 복잡한 것 같은데 또 생각보다 단순하고 강한 것 같은데 또 약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저희 집에 1미터 정도 되는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거실에 세워 놓았습니다. 12월 초부터 일부러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을 계속 켜 놓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방문을 열고 나왔을 때 환한 불빛이 반겨 주니까 왠지 안심이 됩니다. 저는 크리스마스가 이때 있어서 좋습니다. 크리스마스가 진짜 예수님이 태어난 날이 맞는지 논란이 있는데 역사적으로 정확한 날짜를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밤이 점점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니까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덕분에 그런 것 같아서 기분이가 좋습니다.

 

본문 설명

오늘 본문은 마리아의 찬가라고 부르는 부분입니다. 천사가 찾아와 예수를 낳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뒤 실제로 마리아는 아이를 가졌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이를 가지게 된 마리아는 그의 친척인 엘리사벳을 찾아 갔습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엘리사벳과 그의 뱃속에 있던 세례 요한은 마리아의 뱃속에 있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봤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굉장히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이었을 텐데, 엘리사벳의 반응을 통해서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서 마리아는 찬가를 부릅니다.

 

마리아의 찬가는 사무엘상 21절에서 10절까지 나온 한나의 노래와 매우 비슷합니다. 사무엘상에서 한나는 태의 문을 열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합니다. 마리아의 상황이 한나의 상황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리아 역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인데 아이를 가졌다는 데서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나의 노래와 마리아의 찬가는 느낌이 좀 다릅니다. 한나의 노래는 의기양양한데, 마리아의 노래는 신나기보다는 매우 차분한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는 찬양하고 기뻐한다고 표현하고 있기는 한데 자연스럽게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후자 쪽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마리아의 찬가를 보면 내가 찬양하고 기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이 찬양하고 내 마음이 기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내 영혼과 내 마음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할 때 자주 나오는 표현이기는 합니다. 내 영혼과 내 마음은 나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일컫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렇게 진지하게 기쁨과 찬양을 표현한다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게 느껴집니다. 마리아는 사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처녀가 갑자기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마리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리아에게 일어난 사건을 받아들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48절에 보면 마리아는 자신이 비천함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비천함을 돌보셨다고 고백합니다. 마리아는 지금부터 모든 세대가 자신을 복이 있다고 일컬을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이것은 지금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그렇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보입니다. 처녀가 아이를 가진 상황 그리고 그 아이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구체적으로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이 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자기를 복된 사람이라고 일컫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리아가 당황하고 있다는 사실은 49절에도 나타납니다. 능하신 이, 즉 능력이 많으신 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일도 할 수 있는 분이 자신에게 위대한 일을 행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바로 그 이름이 거룩하시다고 찬양합니다. 거룩은 구별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말, 그 이름이 거룩하시다는 말은 인간과 하나님이 구별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 말은 다르게 말하면 잘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에 이른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이해 안 되는 행동을 선의로 받아들이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고 나서 마리아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생각해 보니 하나님은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사람을 흩으시는 분입니다. 권세 있는 자들, 기득권 계층에 있는 사람을 내리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분입니다. 배고픈 자에게는 먹을 것을 베풀어 주시지만,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영원히 선대하시는 분입니다. 마리아에게 이해하지 못할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 마리아는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정리해 보고 다시금 자기 자신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확인시키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알고 있던 하나님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 묘사가 나와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일단 수준 차이가 너무 납니다. 다섯 살 짜리 꼬마가 엄마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엄마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엄마를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지식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 경험에 있어서도 엄마가 살아온 삶의 시간들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엄마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꼬마가 어른이 되어서 엄마가 되면 엄마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 묘사가 나와 있지만, 그 사람이 아무리 유명하고 위대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의 하나님 묘사가 다 올바른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오해가 있을 수도 있고 특별히 정치인인 경우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악용하는 사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사람 중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편견 없이 순수하게 나쁜 의도 없이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려고 했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우리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가 또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예수님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거나 예수님의 하나님 이해에 공감하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을 떠올리실 텐데, 사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은 그의 엄마, 마리아였을 것입니다. 마리아도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배웠겠지만, 예수님도 그의 엄마에게서 하나님을 배웠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찬가를 보면 마리아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알고 있던 하나님은 참 좋은 하나님이고 평화의 왕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어떻게 하실까요? 5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눅 1:51, 개정)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하나님은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어지게 하십니다. 교만한 마음을 품고 있는 나쁜 사람들이 모이면 아주 악한 짓을 저지르기 쉽습니다. 바벨탑 같은 것을 쌓아서 하나님과 대결해 보려고 하고, 사람들 위에 군림해서 그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마치 1212 쿠데타를 일으켰던 하나회처럼 말이죠. 그런 사람들을 막아야 합니다. 협박을 할 수도 있고 잡아서 감옥에 가둘 수도 있고 사형이라는 중벌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시편을 많이 썼던 다윗은 하나님께 어떻게 해 달라고 했습니까? 다윗은 하나님께 그들의 수염을 뽑고 뺨을 후려치고 이를 꺾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교만한 마음을 품은 사람들을 흩어 버리시는 분입니다. 아마도 악인들의 악행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선한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벨탑을 쌓던 자들에게 하나님이 취하신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언어를 갈라지게 하셔서 그들을 흩어버리셨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배고픈 자에게 어떤 것을 주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5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눅 1:53, 개정)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하나님은 주린 자에게 좋은 것을 배불리시는 분입니다. 마리아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배가 고픈 사람은 이것저것 가릴 수가 없습니다. 배가 고픈 사람이 몸에 좋은 음식이나 맛있는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없습니다. 당장에 굶주려 쓰러질 것 같으면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작정 넣어야 합니다. 그래서 옛말에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 특별히 보릿고개 기간에는 굶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잘 먹지 못하니 신진대사가 원활하지 못했고 그래서 변비로 인해서 고통받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굶주림을 해소하기 위해서 소나무의 속껍질을 벗겨서 먹기도 했습니다. 소나무 속껍질은 섬유질 덩어리여서 오랫동안 소화가 되지 않고 배가 부른 장점이 있지만 대장까지 가는 동안에 돌덩어리처럼 굳어 버리게 됩니다. 안 그래도 배변 활동이 어려운데 소나무 속껍질을 먹으면, 엎친데 덮친 격이 되는 것이지요. 배고픈 사람이 또는 가난한 사람이 손을 벌리면 그들에게 무엇을 주기가 쉬울까요? 그들을 도우려고 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먹다 남은 것 또는 자신들이 먹기 싫은 것, 좋은 음식이 아니라 질이 나쁜 음식을 주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주린 자에게 불량 식품으로 배를 채워 주는 분이 아니라 좋은 음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배고픈 자에게 돼지 비계를 주는 분이 아니라 꽃등심을 구워 주는 분입니다. 마리아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었습니다.

 

마리아의 하나님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자비를 베풀고 정의를 구현하는 분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과 닮아가기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한다면 그 사람에게 계속 관심을 가지고 계속 바라보고 알아보고 그 사람이 한 말을 들어 보고 읽어 보고 그 사람의 행적에 대해서 궁금해할 테니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닮아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에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평화의 왕으로 알고 있다면 자신도 평화의 방법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는 분이시라면 자신도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 애쓸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의를 실천하는 분이라고 이해한다면 자신도 정의의 편에 서려고 결심할 것입니다. 그와는 달리 하나님을 화가 나서 사람들의 죄를 벌하는 분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자신도 화가 난 상태로 사람들의 죄를 찾아내서 벌을 주고 교정하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하나님이 강압적으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는 분이라고 이해한다면 그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타인에게도 억지로 하기 싫은 일을 강요할 것입니다. 마리아가 이해하는 하나님을 통해 마리아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평화를 사랑하고 정의의 편에 서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마리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복을 받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이미 잘 알고 있고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의 삶의 시작부터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 한꺼번에 펼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위대한 일을 행하신 분의 어머니가 된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가 어떤 일을 할지 어떤 삶을 살지 모르는 상황에서 천사가 나타나 네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를 낳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에게 한 첫 인사는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였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이게 뭔일이래 생각했습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29]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몹시 놀라,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궁금히 여겼다.

 

 

그리고 천사가 마리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사람은 이런저런 좋은 일을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천사가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저 이런저런 추상적인 말들만 전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마리아의 상황에 있었다면 천사에게 어떻게 대답했겠습니까? 마리아는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저는 처녀인데요?” 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천사가 나에게 나타나서 이런 말을 했다면 나는 뭐라고 말했을까?’ 아마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저는 남잔데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에이, 남자가 어떻게 아기를 낳나? 말도 안 되지.’ 그렇죠? 남자가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남자가 아기를 낳는 것이나 처녀가 아기를 낳는 것이나 모두 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걸 누가 믿겠습니까? 남자가 아기를 임신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괴물로 취급받을 것입니다. 처녀가 아기를 임신했다고 한다면 그 처녀가 자신이 처녀가 아닌데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그냥 행실이 단정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여기거나 아니면 미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기를 가진 남자와 아기를 가진 처녀, 어느 쪽이 더 견디기 어려울까요? 아기를 가진 남자는 완전한 기적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아기를 가진 처녀는 수많은 사람에게 따가운 시선을 받을 것이 뻔합니다. 어느 쪽도 세상에 떳떳하게 자신이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지만, 후자가 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성모 마리아라고 해도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주변의 따가운 눈총을 견디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천사의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자신을 도와 줄 사람, 또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찾은 사람이 자신의 친척 엘리사벳이었습니다. 39절에 보면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도착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기적처럼 임신을 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도움으로 마리아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던 세례 요한도 그것을 알아채고 신이 난 것처럼 마구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축복의 말을 전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옆에서 조금 안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역시 이 상황은 젊은 여자가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56절에 보면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세 달을 더 머문 것으로 나옵니다. 세 달이라고 하면 아마 세례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있었던가 아니면 거의 예정일이 되었을 때까지 함께 머무른 것입니다. 엘리사벳도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가져서 힘들었을 텐데 아무리 친척이라고 해도 누군가가 몇 달씩 자신의 집에 머무는 것이 편했을 리가 없습니다. 마리아는 민폐를 끼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머물 수 있는 최대한도로 엘리사벳의 집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마리아가 심각하게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어서 이 상황을 극복하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위대한 사람을 낳을 것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에게 떨어진 이 사건이 무엇인가 고민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결론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복이다였습니다.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지금 시대에 있는 사람들은 인정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나중이 되면 모든 사람이 자신을 복받은 사람이라고 칭할 것이라고 믿음의 선언을 합니다. 그리고 정말 마리아의 믿음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임신하고 낳고 그를 키우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까지 마리아의 마음은 수시로 요동치며 이것이 복인지 화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낳은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일을 당한다면 어느 엄마가 이 비극적인 사건을 복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한 그 당황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했습니다. 이제 후로는 만세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복받은 사람이라고 일컬을 것이라고 말했고 그 말은 정말 이루어졌습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자기 자신을 복 있는 사람으로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알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배고픈 자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고 부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분입니다. 마리아는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생각하기에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진다는 것은 비천한 자가 비참하게 되는 것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비천한 자를 더 비참하게 만드시는 분일리가 없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자신에게 무언가를 베푸신다면 그것은 비천한 자를 높이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믿음대로 예수를 통해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영광스러운 삶을 살았던 사람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예수를 잉태했을 때 예수를 낳아서 키울 때도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까지 마리아의 믿음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우리는 마리아의 믿음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복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치는 말

사랑하는 성화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은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이고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내일은 성탄절이고 예수님이 오신 날입니다. 기쁜 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에 오셔서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예수님을 몰랐다면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예수님 때문에 삶이 더 어려워진 것 같지는 않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일요일에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면 일요일에 편히 누워서 쉬거나 어디 좋은 데 여행을 갈 수도 있었을 텐데요. 예수님 때문에 여러분은 헌금도 합니다. 이제까지 교회에 헌금한 돈을 모았다면 아마 좋은 차 한 대 정도 살 돈 정도는 충분히 될 것입니다. 나를 선대하지 않는 사람 교만한 사람 재수 없는 사람에게 따끔한 말도 하고 미워하고 혼내 주고 나에게 해를 끼쳤으면 고소해서 벌도 받게 해 주면 시원할 텐데, 예수님은 평화의 방법을 쓰라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용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기는 편이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고 어느 쪽이 이길지 생각해서 그쪽에 서면 훨씬 더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우리가 정의의 편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복인지 화인지 상인지 벌인지 헷갈립니다. 마리아에게도 예수는 평생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 배고픈 자에게 좋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 그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생일 전날에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는 선물입니까, 아니면 폭탄입니까?’ 나는 예수를 선물로 받아들이고 기뻐하고 있습니까, 폭탄으로 생각하거나 일단 받아들이긴 했는데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괴로워서 전전긍긍하고 있습니까? 일단 여기 앉아 계신 여러분들은 예수를 폭탄으로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피하는 데는 실패하신 분들입니다.

사랑하는 성화 교회 가족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선물이 아닌 것 같은 여러 가지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리아처럼 믿음의 선언을 해 봅시다. 같이 말해 볼까요?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하리라.” 누구 덕분에요?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이런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탄절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로 믿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00x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