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먼저 와서 좋은 점은?
(마 20:1-16, 개정)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들어가는 말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교회 오실 때 어떤 마음으로 오시나요? “와, 주일이다. 교회 가서 예배드려야지”라는 마음가짐으로 기쁘게 오십니까? 아니면, “아이고, 또 주일이네. 교회는 가야겠지?”라는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오십니까? “아, 주일이네. 교회에 가기는 싫은데 안 가면 무슨 일이냐고 엄청 연락 오겠지. 에고, 가자 가” 하고 오십니까? 아니면 그냥 별생각 없이 교회에 오십니까? 저는 교회 올 때 일단 의무감이 있습니다. 여기는 저의 직장이고 일주일에 하루 출근하는데 바로 오늘 일요일입니다. 그리고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 같은 경우는 설교를 해야 하니까 빠지면 안 되겠죠? 의무감이 있기는 한데 즐거운 의무감입니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데 동시에 그 일을 해야 하는 즐거운 의무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일 예배가 저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퍼즐 그림을 새롭게 맞추는 마음으로 주일 예배에 참석합니다. 삶을 일종의 퍼즐 맞추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면서 저는 지난 한 주간 너무 허둥지둥 엉망진창 퍼즐을 맞춘 것은 아닌지 너무 게으르게 조금만 맞춘 것은 아닌지 다른 사람과 협력을 잘 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는 제대로 차근차근 열심히 성실하게 잘 맞추어봐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그래서 예배는 참 중요한 시간입니다.
본문 내용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내용입니다. 익숙한 내용으로 설교를 할 때가 마음이 편합니다. 대충 내용을 다 알고 계시니까 복잡하게 설명한 필요가 없어서 좋습니다. 오늘은 포도원 품꾼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천국,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예수님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다릅니다. 다르게 돌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잘 적응할 수 있고 또한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 나라인지 한번 살펴봅시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에 일할 일꾼을 찾으러 나갔습니다. 아마도 오전 6시 이전에 나간 것 같습니다. 복음서에서 말하는 하루의 시작은 보통 오전 6시입니다. 그때부터 일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시각부터 시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거리가 꽤 많이 있어서 하루 종일 꽤 많은 사람이 일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전 6시 이전에 나가서 사람들을 구했습니다. 온전한 하루 품삯을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면 노동자가 하루 일하는 품삯입니다. 하루에 12시간을 일해야 하고 힘든 농사일이기 때문에 지금으로 치면 20만원 정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마 생각보다 일거리가 너무 많았나 봅니다. 그래서 주인은 세 시에 또 일꾼을 찾으러 갔습니다. 세 시는 지금 시각으로 오전 9시입니다. 오전 9시에 나가서 또 일꾼은 데리고 왔습니다. 이번에는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지 않고 상당하게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미 하루에 일할 수 있는 시간의 4분의 1이 지나버렸기 때문에 한 데나리온을 약속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일꾼들도 아마 한 데나리온까지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인은 오후 12시에 또 나가서 일꾼들을 데리고 오고 오후 3시에 또 나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오후 5시에도 나갔습니다. 일은 오후 6시에 끝났습니다.
이제 하루 품삯을 정산할 시각이 되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서 나중에 온 자부터 시작해서 처음 온 자들에게까지 수고비를 지급하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나중에 온 사람들은 오후 5시를 지나서 왔기 때문에 미처 한 시간도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았지만 20만원을 받았습니다. 이게 웬 떡이냐 생각하며 신이 나서 집에 갔을 것입니다. 오후 3시에 온 사람들 20만원을 받았습니다. 12시에 온 사람들도 20만원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도 기분 좋게 집에 갔을 것입니다. 9시에 온 사람들도 20만원을 받았습니다. 9시에 온 사람들은 불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9시간이나 일했는데 한 시간 일한 사람과 같은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당연히 불평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입을 다물었던 이유는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일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한 일의 양에 비해서는 그래도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침 6시에 온 사람들은 20만원을 받고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주인에게 따졌습니다. 공동번역에 있는 본문을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듣고 보면 이 말도 분명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일꾼 중 한 명을 불러서 자신이 한 약속을 상기시킵니다.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는 얼마를 주겠다는 약속을 정확하게 하지는 않았는데 처음 온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약속을 했습니다. 하루치 품삯 즉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다는 것을 다시 언급합니다. 분명히 20만원을 주기로 했으니까 20만원을 주었는데 무엇이 잘못이냐고 되물었습니다. 그 말도 분명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품삯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하면서 처음 온 사람이나 나중 온 사람이나 같은 돈을 주는 것이 자신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입니다. 개정역에는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라고 나와 있지만 새번역성경의 번역이 좀 더 정확합니다. 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
15절까지는 일관성 있는 비유의 말씀인데 16절은 비유의 말씀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16절은 예수님의 말씀일 수도 있지만 마태가 덧붙인 해석일 수도 있습니다. 나중 된 자가 처음이 되고 처음 된 자가 나중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은혜란 무엇인가?
오늘 본문은 은혜가 무엇인지 잘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은혜라는 말을 정말 많이 쓰지만 우리는 은혜가 무엇인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알아도 은혜는 우리에게 매우 어색하고 적응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은혜가 무엇인지 대충 아실 것입니다. “고맙게 베풀어 주는 신세나 혜택”을 은혜라고 하는데, 이런 정의에 대해서 잘 모르더라도 어떤 것이 은혜인지 잘 분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제일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중에 와서 한 시간 일한 사람입니다. 오후 3시에 온 사람도 은혜를 받았고 12시, 9시에 온 사람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루치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하루치 품삯을 받았으니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고맙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침 6시에 온 사람은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냥 자신이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고마워할 일은 별로 없습니다. 굳이 고마운 것을 찾자면 그래도 자신들을 뽑아서 일을 할 수 있게 해 준 것에 대해서는 고마워할 수도 있지만 한 시간 일하고 20만원 받은 사람이 받은 은혜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은혜는 나의 노력에 비례해서 내가 땀 흘리고 일한 만큼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내가 노력하고 노동한 만큼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을 은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은혜는 이상한 것입니다.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은혜 때문에 화가 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이런 말을 듣거나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기도 열심히 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거야.” 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본 적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40일 새벽 기도를 했더니 시험에 떡하니 합격을 하는 은혜를 받았어.” 우리는 보통 하나님께서 우리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보시고 그에 대한 대가를 주시는 분이라는 이해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이해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런 방식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노력하는 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필요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주인이 일꾼에게 급여를 어떻게 주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일한 만큼 주었습니까? 일한 만큼 준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당연히 한 시간 일한 사람은 2만원 정도를 받아야 했고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은 20만원을 받는 것이 정당했습니다. 주인은 일한 만큼 준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모든 일용직 노동자는 하루치 품삯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그와 그의 가족이 하루를 살 수 있는 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데 우리가 노동한 만큼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한 만큼 주십니다. 그것이 누구에게는 은혜가 되고 누구에게는 정당한 대가가 될 수 있습니다. 아침 6시부터 와서 일한 사람은 주인이 은혜를 베푸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자기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은 사람에게 왜 은혜를 베풀지 않았냐고 따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당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안 주려고 애쓰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굶으면서 떼를 써야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조르고 졸라야 무언가를 주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굶으면서 떼를 쓰고 조르고 악악거려야 내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신다면 그 하나님을 은혜로우신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내 아들이 한 달에 최저생계비로 40만 원의 돈이 필요하다고 해 봅시다. 나에게 40만원의 돈이 있다면 내 아들에게 당연히 그 돈을 용돈으로 줄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네가 40만원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는데 네가 나한테 어떻게 하는지 보고 그 간절함을 보여 주면 그때 내가 40만원을 줄게”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40만원이 필요하다면 40만원을 그냥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라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분입니다. 악덕 고용주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치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한 만큼 노력한 만큼 기도한 만큼 헌금한 만큼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낌 없이 채워 주시는 분입니다.
먼저 와서 좋은 점
제가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마음 속으로 대답을 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오전 6시에 와서 12시간을 일하고 하루치 품삯을 받고 싶습니까? 아니면 오후 5시 넘어서 와서 한 시간 정도만 일하고 하루치 품삯을 받고 싶습니까? 만약에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후자 쪽에 끌리시죠? 한 시간 일하고 하루치 급여를 받는다면 땡잡은 것이지요. 게다가 그렇게 급여를 주는 주인에 대해서 얼마나 좋은 감정이 생기겠습니까? 그리고 16절 말씀을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나중 된 자가 처음 되고 처음 된 자가 나중 된다면 나중에 오는 사람이 훨씬 더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처음에 와 봤자 일만 실컷 하고 결국 나중에 온 사람보다 못한 사람이 된다면 처음에 올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미 포도원에 들어온 일꾼과 비슷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돕고 있습니다. 일찍부터 들어오신 분도 있고 인생의 중반쯤에 들어오신 분도 있고 일찍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분도 있습니다. 그래도 여기 계신 모든 분은 오후 5시에 포도원에 들어온 사람과는 다릅니다. 그래도 좀 일찍 들어와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전도할 때 이런 분들 종종 만나는데요. “선생님,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교회에 나오세요.” 이렇게 말을 하면 관심이 있으면서도 미루는 분이 있습니다. “나중에요. 좀 더 있다가 믿겠습니다.” 마치 지금 믿으면 자신에게 손해인 것처럼 느끼면서 그래도 죽기 전에는 교회 가야지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후 5시에 포도원에 들어가려고 작정하신 분들입니다. 그러면 빈둥빈둥 놀거나 자기 하고 싶은 것 하고 지내다가 막판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이득인가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득인 것 같기도 합니다. 한 시간 일하고 20만원 받으면 즐거운 일이죠.
그러나 우리는 오전 6시부터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들에게 생겼던 좋은 일을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일찍 포도원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생겼던 나쁜 일은, 나쁜 일이라고 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것 같지만, 이들은 나쁜 일이라고 느꼈던 것은 은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일한 만큼 돈을 받았습니다. 늦게 온 사람들은 다 자신이 한 일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았는데 말이죠. 하지만 이들이 오전 6시부터 일을 했기 때문에 적어도 두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첫째,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습니다. 주인은 후하게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돈을 함부로 막 쓰는 사람은 아니었고 정확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일한 만큼 돈을 주지 않고 필요한 만큼 돈을 주는 사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늦게 온 사람들도 주인이 후하게 베푸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일꾼들이 언제 왔는지도 잘 모르고 주인이 돈이 많아서 그냥 많이 주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아마도 자기보다 일찍 온 사람들은 더 많이 주었을 것이라고 짐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모든 이에게 정확하게 하루치 품삯을 주었습니다. 은혜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었지만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저 정당한 대가를 주었습니다. 아침 6시에 온 사람들이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주인이 은혜가 필요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아침 6시에 온 사람들이 알게 된 또 하나는 자신들은 은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주인은 늦게 온 사람들에게도 하루치 품삯을 주는, 후하게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주인이 늦게 온 사람에게 하루치 품삯을 주든 아니면 일한 시간만큼 정확하게 돈을 주든 오전 6시에 온 사람들과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주인이 자기 돈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쓰는 것이고 늦게 온 사람들에게 하루치 급여를 준다고 하더라도 일찍 온 사람들에게 돌아갈 돈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그저 하루치 품삯을 받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후하게 은혜를 베풀자 일찍 온 사람들은 화가 났습니다. 주인의 선함이 악함으로 보였습니다. 주인의 선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주인의 행동은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이었고 분명히 그것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푼 것이었지만 일찍 온 사람들은 그것을 악이라고 보았습니다. 오전에 일찍 온 사람은 자신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이 이들이 포도원을 소유한 주인이었다면 늦게 온 사람들에게 하루치 품삯을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선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마치는 말
사랑하는 성화 교회 가족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따라 우리에게 후하게 베푸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온 포도원 주인은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이 포도원 주인이라면 일꾼들에게 품삯을 나누어 줄 때 어떻게 주었겠습니까? 아무 문제 없이 소란 없이 즐겁게 하루를 마감하려면 어떻게 주는 것이 좋았을까요? 먼저 온 사람부터 하루치 급여를 주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오전 6시에 온 사람들은 별말없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떠났을 것입니다. 오전 9시에 온 사람들도, 오후 12시에 온 사람들도, 3시에 온 사람들도 주인의 통큰 은혜에 기뻐하며 웃으면서 떠났을 것입니다.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은 ‘설마, 우리에게까지 20만원을 줄까? 에이 설마…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다가 20만원을 받고 기분이 좋아서 춤을 추면서 떠났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루 품삯을 나누어 주었다면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순서를 정확하게 반대로 했기 때문에 이 비유는 주인과 일찍 온 사람들 사이의 신경전이 벌어지면서 갈등이 채 해결되지 않은 채 끝이 났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별생각 없이 돈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일까요? 아닙니다. 아마도 포도원 주인은 일부러 이런 순서로 돈을 나누어 주었을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생각 없이 기준 없이 막 퍼주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정확하고 치밀한 사람이었습니다. 오전 6시에 일하러 온 사람들에게는 정확하게 하루치 품삯을 준다고 했고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는 그냥 상당하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말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덕분에 이 이야기는 갈등이 풀리지 않은 채로 끝났습니다. 요샛말로 하면 열린 결말이 되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에게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일찍 온 일꾼들이 포도원 주인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공감하고 동의한다면 세상에는 포도원 주인과 같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일찍 온 일꾼들에 의해 포도원 주인에 대한 나쁜 소문이 퍼지거나 그에 대한 평판이 나빠져서 포도원 주인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후자처럼 된다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가 스스로 박차고 나온 사람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비유의 열린 결말을 책임질 주인공은 바로 오전 6시에 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던 청중 역시도 오전에 포도원에 들어온 일꾼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습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도 아침에 온 일꾼들과 같이 일찍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여기에 앉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은혜를 계속 받기만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포도원 주인에게 가장 중요한 일꾼들은 바로 오전 6시에 온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된다면 이 세상은 ‘은혜의 포도원’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주인공을 되시겠습니까? 의로운 영웅이 되어서 이 세상을 은혜의 포도원으로 만들어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악당이 되어서 포도원 주인의 은혜로운 경영 방식에 침을 뱉고 그를 몰아내시겠습니까? 후자의 경우가 되면 나중 된 자가 다시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부디 의로운 영웅의 주인공 자리를 꿰찰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리지 마시고 하나님과 함께 은혜의 포도원을 점점 더 확장해 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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