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조3-39_43]
틸리: 폴 틸리히 Paul Tillich
조: 조직신학 Systematic Theology
3: 3권
39_43: 39쪽에서 43쪽까지
실존주의와 본질주의는 일종의 대결 관계로 보면 19세기까지는 본질주의의 승리였습니다. 실존이 existere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밖에 서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존을 존재라고 생각하면 밖에 서 있는 것은 비존재의 밖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요. 실존과 본질이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면 비존재는 본질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실존은 존재이고 본질은 비존재이죠. 이런 측면에서 틸리히는 실재의 두 수준을 구분합니다. 하나는 본질의 수준이고 다른 하나는 실존의 수준입니다.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실존주의가 나타났고요. 플라톤부터 19세기까지는 본질주의가 득세한 시기이죠.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의 세계는 본질의 세계, 이상향이고 이 세상은 본질의 세계, 이데아, 이상향을 흉내 낸 모방된 세계, 불완전한 세계입니다. 당연히 본질의 세계가 우월한 세계이고 이 세상은 문제가 있는 세상이죠. 실존은 본질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에 실존은 본질보다 항상 열등합니다. 틸리히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존과 본질의 차이를 줄이려고 노력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고 고대 세계는 본질이 압도적으로 대우를 받는 세계였다고 설명합니다. 20세기에 돼서야 실존주의가 나타났으니 그전까지는 이 세상은 불완전하고 모자란 곳이라는 이해가 팽배해 있었던 것이고요.
그렇다면 신학자들은 본질과 실존의 구분과 관련해서 어떤 주장을 했냐면 세상이 본질로부터 이탈해 있는 반면에 신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신은 본질과 실존이 분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통합된 존재라고 주장했습니다.
틸리히는 실존과 본질의 관계의 관점에서 철학과 신학의 역사를 설명합니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에는 본질과 실존의 사이가 좁혀졌다고 지적합니다. 실존은 안 좋은 거고 이탈해 있는 거고 모자라고 불완전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고 실존에 대한 긍정의 눈을 가지게 됩니다.
"실존 속에 있는 인간은 본질에 있어서의 그 자신이다. 즉 실존 속에 있는 인간은 우주의 여러 힘들이 통일되어 있는 소우주이며, 비판적이며 구성적인 이성의 담지자이며, 그의 세계의 건설자이며, 자신의 잠재성을 실현하는 존재로서 자신의 창조자이다. 교육과 정치 기구는 실존이 본질에 대해서 뒤떨어져 있음을 극복하게 해 줄 것이다." (42)
실존은 나쁜 거 아니고 실존은 본질이 발현된 것으로 보는 관점이죠. 틸리히는 실존이 본질에 삼켜지게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본질주의를 최고로 발전시킨 사람이 헤겔입니다. 틸리히는 헤겔을 고전적인 본질주의자라고 말합니다. 신이 본질과 실존을 극복한 존재인 것처럼 인간도 그런 성향을 이미 가지고 있고 역사를 통해서 그것을 구현했다고 주장합니다. 헤겔은 세계가 신의 자기실현 과정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실존은 본질의 표현, 발현, 구현이고 역사를 통해서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고 결국 최종 완성에 이를 것이기 때문에 실존은 미완성, 타락, 부족함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한마디로 실존은 나쁜 거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실존의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어라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19세기까지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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