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히 신학

믿음은 궁극적인 관심이다_폴 틸리히 "믿음의 역동성" (1장 중심)

설왕은31 2019. 10. 3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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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폴 틸리히 "믿음의 역동성" (1장 중심)

 

“믿음의 역동성”은 폴 틸리히(1886-1965)의 저서 중 “존재의 용기”와 더불어 가장 널리 읽힌 책 중에 한 권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인지 20세기에 가장 저명한 신학자 중 한 사람인 틸리히의 생각을 알 수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믿음이라는 주제는 기독교에서 가장 오래된 주제이면서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던 의미 있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이해하기 쉬운 듯하면서도 파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려운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 믿음이란 무엇인가?
2장, 믿음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3장, 믿음의 상징들
4장, 믿음의 유형들
5장, 믿음의 진정성
6장, 믿음의 삶

 

틸리히의 글은 매우 응축되어 있는 글입니다. 짧은 내용 안에도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도 쉽지 않고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구성면에서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책을 적당한 한 권 분량으로 만들기 위해 믿음과 관련된 주제들을 모아서 엮은 듯한 느낌을 줍니다. 믿음에 대해 다각도로 설명해주고 있는 점은 좋지만, 그로 인해서 주제가 분산되어 믿음의 역동성(Dynamics of Faith)이라는 요점을 부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1장, 믿음이란 무엇인가와 2장, 믿음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6장 믿음의 삶을 가지고 더 얇은 책을 만들던가 아니면 그 세 개의 장을 중심으로 하고 좀 더 쉽고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여섯 개의 장 중에서 제일 중요한 장은 제1장 '믿음이란 무엇인가'입니다.

 

 

1장의 첫 문장에서 틸리히는 믿음에 대해 정의합니다. 믿음은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정의합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관심이 바로 믿음입니다. 물론 그 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궁극적인 존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궁극적인 관심이 될 수도 있고,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나라가 궁극적인 관심이 될 수 있습니다. 세계대전의 기간 중에는 후자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자본주의가 만개한 세계 여러 선진국에서는 전자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주변에 가득하죠. 틸리히는 믿음이 인간 정신의 최중심부에서 나타나는 행위이며 동시에 개인의 총체적 행위라고 지적합니다.(35) 즉 믿음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포함하며 인간의 의지와 자유, 감정과 확신을 모두 포함합니다. 또한 틸리히는 믿음이라는 총체적 행위에는 관심을 갖는 존재와 관심을 받는 존재가 있음을 설명합니다. 관심을 갖는 존재가 주체라면 관심을 받는 존재는 객체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행위 속에서 주체와 객체의 구분은 사라져 버릴 수 있습니다. 궁극적 관심 속에서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일단 정리해보죠. 믿음은 궁극적인 관심입니다. 궁극적인 관심은 여가 시간에 잠시 시간을 내서 호기심이나 작은 애정을 표출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전존재를 모아서 관심의 대상을 향해서 있는 힘껏 던지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될 때 믿음을 가진 자신과 믿음의 대상과 혼연일체가 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믿음은 극단적인 중독 현상과도 비슷합니다. 정확히 들어맞는 예는 아니지만 술을 지나치게 마시다 보면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인지 술이 나를 마시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고 하죠. 극단적인 중독 현상으로 인해서 주체와 객체가 혼동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믿음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과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틸리히는 1장, “믿음이란 무엇인가”에서 믿음과 거룩의 역동성과 믿음과 의심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믿음의 역동성에 대해서 틸리히가 이 부분에서 좀 더 친절한 설명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틸리히는 믿음이 역동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역동적의 반대는 정적인 것이죠. 믿음이 역동적이 되기 위해서는 의심이 필수적입니다. 대상에 대한 궁극적인 관심이 믿음이라는 틸리히의 정의는 많은 목회자들이나 기독교인들이 싫어하거나 꺼려할 만한 정의입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하나님이 없다고 의심하는 것조차도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관심이 된다면 말이죠. ‘나는 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는가’에 대해 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역설적인 결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적극적인 무신론을 펼치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판단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믿음의 정의에 ‘신뢰’라는 단어 대신에 ‘관심’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우리의 전존재를 던질 때 의심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거룩성 때문입니다. 거룩은 완전히 다름을 의미합니다. 틸리히는 거룩에 대해서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이해는 늘 부족하고 불완전합니다. 따라서 의심을 통해서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대한 관심과 이해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과는 달리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역동적이 되어야 합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끊임없는 의심을 가지고 대상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 그 관심의 대상이 궁극적이고 무한한 존재일 때 믿음은 역동적으로 성장하게 되고 관심의 대상이 유한한 존재일 때 우리는 실망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에는 의심이 필수적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신앙인 틸리히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심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은 우리의 의심에 의해서 깨질 수 없는 존재라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그의 주장을 밑받침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보죠. 틸리히에 따르면 믿음이란 궁극적인 관심입니다. 그 관심의 대상이 국가나 돈, 성공과 같은 유한한 것일 때는 필연적으로 실망이 뒤따르게 됩니다. 성공할 수 있는 믿음은 그 대상이 궁극적인 존재일 경우에 국한됩니다. 믿음이란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고 말을 거는 것입니다. 전쟁 같이 치열하게 사랑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틸리히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궁극적인 존재인 하나님일 때 우리의 믿음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확신이 없다면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이 역동적인 믿음을 위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할 수는 없겠죠.


여기까지가 1장의 내용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나머지 부분도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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