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히 신학

운명과 자유_틸리히 신학

설왕은31 2019. 10. 30.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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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히는 인간의 운명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운명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자유에 의해서 조정될 수 있고 인간에게는 충분한 자유가 주어져 있습니다.

 

 

"운명 없는 자유는 단순한 우연성이며, 자유 없는 운명은 단순한 필연성이다." (조직신학 3, 202)

 

틸리히는 운명과 자유를 결합합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운명도 없고 완전한 자유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같은 페이지의 아래쪽에 있는 문장을 더 인용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끄시는 창조성은 인간의 경우 그의 자유를 통해서 작용한다.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의 창조성에 의해서(by) 결정되지만 인간의 자기-결정, 즉 그의 유한한 자유를 통해서(through) 결정된다." (조직신학 3, 202)

 

이 문장은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운명이라는 말 자체가 결정되어 있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인데요.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통해 결정된다고 하는 말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운명이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 자체로 이미 운명에 대한 설명이 종결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좀더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인간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틸리히는 "아닙니다."라고 답하고 있는 것이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나 의지가 있지만 그것은 완전히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고 그것 자체를 운명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죠. 즉, 다시 말하며 운명이란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또 아니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운명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죠. 틸리히는 뭔가 결정되어서 한 개인을 그 안으로 끌어들이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봅니다.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란 없다고 봅니다. 인간의 자유는 부분적인 것이죠. 그리스도인들이 보통 소명이라고 부르는 것도 운명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운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거부할 수 있습니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로 생각하면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운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는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면 좀더 적극적으로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운명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죠.

 

운명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최종적인 완성은 결국 인간의 자유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제가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은 운명이 있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많은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운명을 찾으려는 잘못을 범한다는 점입니다. 운명이 아닌 기호의 문제를 운명이라고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짜장면을 먹을 것인지, 짬뽕을 먹을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운명이 아닙니다. 기호의 문제이죠. 여름 휴가로 한라산에 갈 것인지, 경포대에 갈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운명이 아니라 기호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다 보면 모든 것이 운명이 될 수 있지만, 인간의 유한한 자유는 생각보다 꽤 영역이 넓습니다. 

 

인간은 땅 위를 걷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운명이죠. 하지만 인간이 다리를 이용해서 혹은 자동차나 비행기를 타고서 갈 수 있는 곳은 많습니다. 유한한 자유지만 꽤 자유로운 자유입니다. 

 

저는 운명 없는 자유는 우연성이고 자유 없는 운명은 필연성이라는 틸리히의 말 중 후반부만 동의합니다. 필연성은 거부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인간인 이상 필연성이 지배하는 인간은 진짜 인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전반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운명 없는 자유는 우연성은 아닌 것 같습니다. 조건 없는 자유라고 우연한 결정으로 자유를 행사하지는 않으니까요. 아름다운 대칭 구조이나 후반부만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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