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폴 틸리히 "존재의 용기" (1952)
“존재의 용기”는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폴 틸리히(1886-1965)가 1952년에 출간한 책입니다. 제목은 흥미롭고 왠지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읽어 보면 아마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 책은 실존주의 철학의 근본적 질문에 대한 틸리히의 신학적 답변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의 질문은 이런 것이죠. “어떻게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틸리히의 답변은 이 책의 제목 그대로입니다. 인간이 존재하려면 “존재하려는 용기(the courage to be)”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실존주의에 익숙하지 않거나 실존주의적 존재의 질문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 책을 읽지 마십시오. 저는 처음에 틸리히의 신학을 알고 싶어서 이 책을 두 번 정도 읽었는데요. 이 책은 신학적인 내용은 별로 없고 철학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때 존재의 문제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별로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혹시 ‘용기란 무엇인가?’ 궁금하셨다면 이 책에 틸리히가 정의하는 용기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틸리히는 용기란 “비존재의 실제에도 불구하고 행하는 존재의 자기 긍정”이라고 정의합니다. (193) 말이 너무 어렵죠? 좀 더 쉽게 풀어서 말하면 ‘죽을 줄 알지만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것’ 정도로 말할 수 있겠네요. 무슨 대단한 깨달음을 줄 만한 그런 정의는 아닙니다. 틸리히가 말하는 용기의 정의 자체도 실존주의 철학에 기반해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죽음으로 인해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용기는 하이데거가 말한 인간 불안의 문제에 대한 틸리히의 해결책입니다. 그러니까 존재가 비존재하게 될 때를 인식하더라도 지금 존재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 용기라는 것이죠. 용기란 어떠한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문제는 용기의 정의가 아닙니다. 어떻게 용기를 가질 수 있느냐, 다시 말하면 어떻게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겠죠.
제2장 “존재, 비존재, 그리고 불안”에서 틸리히는 불안의 세 가지 유형을 제시합니다. “운명과 죽음의 불안”, “공허함과 무의미함의 불안”, 그리고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입니다. 세 번째는 종교적 관점에서의 불안이고요. 좀 더 단순하게 말하면 ‘인간은 어차피 죽는데 삶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 인간의 불안의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어렵게 말하면 ‘우리는 어차피 존재하지 않게 될 텐데 지금 우리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그런 불안감이죠.
틸리히는 제 4장 “용기와 참여”, 제5장 “용기와 개별화”에서 지금까지 자기 긍정의 노력이 어떤 식으로 시도되어 왔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중세시대까지 인간은 일부로서 존재함으로써 자기 긍정이 가능했습니다. 중세 이후로 계급 사회가 깨어지고 개인이라는 개념이 확립되면서 5장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은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죠. 인류가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를 가지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죠. 사람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스로 자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보통 우리는 조직 속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를 파악함으로 존재 의미를 파악합니다. 아주 쉽게 축구를 예로 들어 보죠. 내가 축구 경기에서 골키퍼를 맡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축구 경기에서 나의 존재 의미는 명확하죠. 상대방의 공격으로부터 우리 편의 골대를 지키는 것입니다. 혹은 내가 두 아이의 엄마라고 생각해 봅시다. 나의 존재 의미는 아이들을 보호하고 사랑하고 잘 교육해서 그들을 훌륭하게 키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조직을 구성하는 한 사람으로서 혹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파악합니다. 그런데 만약 조직이 없어지고 내가 혼자 남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의 존재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때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개별화로 인한 용기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용기를 갖지 못한 수많은 개인들로 인해 나치즘과 파시즘이 태어나게 되었죠. 지금도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갖지 못하고 타인을 흉내 내거나 혹은 타인이 요구하는 모습을 가지려고 노력하죠.
한 인간이 한 명의 개인으로서 어떻게 존재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틸리히는 여기에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종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죠. 그는 말합니다. “존재의 용기를 위한 궁극적인 원천은 ‘하나님 위에 계신 하나님(God above God)’이다.” (222) 일부로서 존재하려는 용기는 준거점이 있어서 존재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는 용이하나 그것이 정말 자기 긍정인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준거점 자체가 주체가 되어버리니까요. 축구 경기에서 본질적 주체는 개인의 기록이 아니라 팀의 승리이죠. 반면에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는 준거점이 없어서 판단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습니다. 결국은 준거점이 존재해야 하는데요. 이 준거점은 나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되 동시에 내가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준거점이 주체로서 존재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우리가 절대적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절대적 신앙은 “용납의 ‘주체’가 없는 용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221) 틸리히에게 있어서 존재의 용기란 “용납됨을 용납하는 용기”입니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존재의 용기는 의심의 불안 속에서 하나님이 사라져 버린 때에 나타나신 하나님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 (226)
“The courage to be is rooted in the God who appears when God has disappeared in the anxiety of doubt.”
좀 더 쉽게 말해 보죠. 하나님이 없구나 생각될 때 나타나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고요. 그 하나님을 통해 불굴의 자기 긍정이 발견될 수 있다고 합니다.
틸리히의 “존재의 용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문제 자체가 워낙 어려운 문제라서요. 앞으로 얼마나 더 쉬운 답이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의 가치는 존재의 문제에 있어서 틸리히가 나름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했죠.
이 책이 논리적으로는 참 훌륭합니다. 하지만, 틸리히는 초반에 용기가 개인의 주도적 결심과 행동이라고 설명하다가 종반부에 가서는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듯한 느낌으로 풀어갑니다. 불굴의 자기 긍정을 내가 단독으로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위의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지 잘 모르겠네요. 전자라면 어떻게 용기를 내야 할지 추가 설명이 주어져야 하고요. 후자라면 그냥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틸리히는 자기 긍정에 ‘왜’ 신이 필요한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자기 긍정의 행위가 어떤 것인지 저는 감이 안 옵니다. 용납됨을 용납하라고요? 그러면 불안과 무의미함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나는 나 자신으로 살 수 있을까요? 좀 약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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